페트록의 귀환
핍 본 휴스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수첩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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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이렇다.

술은 마술사.그래서 술에 취한 사람은 어느 순간 자기 눈앞에 마법이 펼쳐져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거친 사암 재질의 다리에 기대어 시커먼 강물을 내려다보면서,마음만 먹으면 이 황량한 계곡에서 고향의 따스한 강둑으로 순간 이동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반달과 보름달 사이의 어중간한 달이 내 어깨 위로 떠올라 물의 원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하지만 눈을 질끈 감는 순간,이미 기회를 놓쳤음을 알았다.마법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시기를 잘 맞춰야 순간 이동도 가능한데,늘 이렇게 기회를 놓치고 만다.

눈에 띄지 않는 겉표지를 보고 그저 그렇겠거니 하고 책을 집어들었던 나로서는,이 책의 첫문단을 읽고는 책을 고쳐 잡았다.
'오홀~재밌겠는걸...문장이 딱딱 떨어지잖아!'
이 책은 열아홉살 먹은 풋내기 수도사 페트록의 성장기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면 풋내기 수도사가 유물 도둑과 살인자로 몰리는 바람에,
영국 데몬에서 그린랜드까지의 여정을 거치면서 해적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입체감있게 표현해 내고 있다.

이 책이 재미있는 건...흡입력 있는 문장력도 문장력이지만,
이런 류의 소설이 가지고 있었던 종교적 색채와 선입견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는 데 있다.
20쪽의 '나는 세속의 남정네 같은 음탕한 목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더듬더듬 말했다.'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우리의 '페트록'이 청년은 수도사라고는 하지만 적당히 세속적이다.
이야기의 전반에 걸쳐 이런 당위성과 현실 사이에서 적당히 고민하는 모습-즉 '수도'하는 과정,수도원 밖에서도 '수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친한 친구 윌과의 대화에서도 이런 페트록의 속내는 잘 드러난다.

"밤엔 잘 잤어,페트록 형제?"
"너도 알다시피 마음이 깨끗한 자는 꿈도 안 꾸고 잘 자."
거짓말이었다.나는 밤새도록 정신 사나운 꿈에 시달렸다...(28쪽)

도입부의,풋내기 수도사가 성물을 훔치고 사람을 죽였다는 누명을 쓰는 것도 적당히 반듯한 페트록이니까 가능한 일처럼 보였지만,

애드릭신부는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라거나 속죄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그저 책과 지식의 보고를 곁에 두기 위해 성직자가 된 듯했다.(88쪽)
책을 좋아하고,책 속에 숨은 역사와 유물을 탐구하기 좋아하는 페트릭과 애드릭 신부와의 연관은 정말 그럴듯한 얼개로 작용한다.

또 한가지 이 책이 맘에 들었던 점은,
어떤 책에서는 템플 기사단을 영웅시하고 있던데,이 책에서는 악독하고 타락한 기사단원으로 묘사했다는 점이다.
이건,내가 뭐 템플기사단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어서라기보다는...
내 알량한 소견으론,세상을 통틀어 절대적인 선이나 절대적인 악은 없는 것 같다.
13세기에 그토록 수도원이 부패되었는데,좋은 뜻과 결의로 뭉친 템플기사단이어도 타락했을 수도 있는 것이고,
유물을 훔쳐내고,가짜 유물을 만들어내고 약탈을 일삼는 해적들도 대의와 명분에 따라 움직인다면,의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 책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작가가 얘기하는 대의명분은 하층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다.
다시말해 배안의 수많은 다른 인종과 이교도를 배척하지 않고 하나로 뭉뚱그려 간다.
거기에 비잔틴의 공주였던 안나를 등장시켜 뱃사람들로 하여금 남녀차별과 신분 차별을 깨뜨려 준다.

다시말해,당위성을 가지고 도덕적인 척 하는 정형화된 모습이 아니라,
고민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열아홉살의 청년 수도사의 이런 고뇌가 충분히 타당하고,
그의 여정에 응원하고 힘을 보태고 박수를 쳐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잔틴의 공주였다는 안나 공주와의 로맨스를 엿보는 것도 내겐 솔솔한 재미였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처음 그렇게 죽은 줄 알았던 친구 윌이 다시 나타나고 다시 죽는 과정인데,
친구 윌이 나타나 안나 공주와의 로맨스에 연적이 등장하고 삼각구도가 되는 것은 재미있었지만,
악당 템플기사단 '휴'경의 노예가 되어 나타났다는 설정은 좀 그랬다.

열아홉의 그들이 겪어낼 수 있는 삶과 지혜의 무게,
애드릭 신부나,몽탈락 선장이 겪여낼 수 있는 사람과 지혜와 연륜의 무게를 적절하게 배치하고 있다.

몽탈락과 페트록의 대화는 어쩜 이렇게 단순하지만 멋질 수 있는 것인지, 몽탈락의 연륜이 돋보였던 부분이고,

"좋아.그거면 됐네.오네포드 사람 페트록,자네 가슴은 텅비지 않았어.가득 채워지고 더욱 강해졌지.거짓된의식의 그을음으로 영혼이 더러워졌지만 언젠가 다시 깨끗해져서 빛을 낸 걸세.이제 자넨 우리와 하나가 되었어.자네 말대로 우린 다른 이름을 두고 맹세를 하진 않아.자네가 자유 의지로 우리와 함께하게 되었으니 언제든 가고 싶을 때 떠나도 좋다는 뜻일세."195쪽

페트록의 성찰도 멋져보여,가슴 속에서 되내여 보게 된다.

*'어제 길든 짧든 새로운 길로 발을 내디뎌야 할 때였다.앞으로 걸어가는 것 외에 내겐 달리 선택  의 여지가 없었다.'(130쪽)
*"그자가 마음에 들던데요.거짓말쟁이 사기꾼은 아닌것 같아서요."(249쪽)
*내가 남에게 가한 칼질이 내 영혼에 그만큼의 상처를 남긴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327쪽)
*"그때 울지말았어야 했어 분노했어야 했어."(393쪽)

'살람 알레이쿰(당신에게 평화가 깃들기를)'에,'와알레이쿰 살람(당신에게도 그러하기를)(160쪽)' 이라고 대답하는 페트록의 모습에서,
수도사라고 하여 자신의 종교에 안주하지 않고,다른 사람의 종교를 존중해 주고 열린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 참 맘에 들었다.

배 위 생활을 하면서 괴혈병으로 시달리는 일면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우리의 안나공주를 앞니 빠진 중강새로 만들어버리는 건...좀 심했다.ㅋ~
아프거나 다친 사람을 치료하면서 기도라는 대책없는 방법을 사용하는게 아니라,약초나 민간요법 등을 적절히 사용하는 것도 좋았다.
좀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어도 재밌었을 것 같다.

인물들이 다소 거리감 있었는데,
'숱많은 잿빛머리카락,다소 가운데로 몰린 진회색 눈동자,매부리코,얇은 입술',이라고 묘사하는데서 난 '시라노'의 '제라르 드빠르디유'가 떠올렸고 그때부터 인물들도 입체적으로 살아 움직였다.

어찌되었건 결말이 못내 아쉬운 나로서는,<The vault of bones><Painted in blood>로 이어지는 페트록의 다음 활약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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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5-22 20:48   좋아요 1 | URL
저도 첫 문장이 맘에 들긴 하는데...
이 소설이 판타지나 SF 인가요? 첨 보는 소설이예요... ^^

양철나무꾼 2010-05-23 11:53   좋아요 1 | URL
제가 장르를 나누기 쉽지 않을 때,뭉뚱그려 하는 말이 있죠~
"장르소설"입니다.^^

이 소설,재밌는 소재이고 번역도 훌륭하고...참 괜찮은데,
표지도 그저그렇고,'문학수첩'이란 출판사에서 별로 광고도 하지 않았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