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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다 (반양장) - 노무현 자서전
노무현 지음, 유시민 정리,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돌베개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그는 '훌륭한 시민'으로 살고 싶은 꿈이 있었다. 현직에서 사랑받지 못했지만 전직 대통령으로 사랑받고 싶었다. 그리고 봉하마을로 내려간 후, 수많은 국민들이 그를 보기 위해 봉하마을을 방문했다. 전직 대통령으로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은 대통령이 있나 싶을 정도로. 그런데, 그 기간이 너무 짧았다. 더 오래, 더 자주 사람들이 방문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그는 '나는 언제나 양심과 직관이 명하는 바에 따라 스스로 당당한 사람으로 살고자 몸부림쳤다.'라고 고백한다. 사실인 것 같다. 그는 평생 민주주의, 자율과 분권, 투명과 공정, 원칙, 진실, 정의 등의 보편적 가치를 위해 살았다. 그리고 끊임없이 학습하고 지식의 공유를 위해 고민하였다. 놀라운 것은 컴퓨터에 취미를 붙이고 직접 '노하우'라는 업무표준화 프로그램을 완성했다. 이 프로그램을 대통령이 되고 나서 'e-지원'이라는 청와대 업무관리 시스템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노하우'를 개발하며 데이터베이스를 공부하고 컴퓨터 프로그램의 원리를 익혔다. 놀라운 일이다.
대의민주주의와 관련하여 그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대의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정당정치이다. 개인이 아니라 정당이 집권한다. 당연히 정당도 내부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해야 한다. 민주적 정당에 필요한 것은 대통령을 겸한 제왕적 총재가 아니라 분권적, 수평적, 개방적 리더십이다. 이것이 내 지론이었다. 당 총재가 대통령 후보가 되면 총재직을 떠나게 되고, 당선되어도 총재를 겸임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기회주의와 분열주의를 경멸했다. 그는 정치인들이 지역감정을 부추기며 자신의 이권만을 위해 수 없이 흩어졌다 모였다하는 것에 이골이 나 있었고 실망을 많이 했다. 김영삼 등. 그래서 줄곧 한 길, 외길만을 걸어온 김대중 대통령을 존경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성향이 분열주의, 기회주의임을 그는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지역을 분열시켜 표를 얻으려하고 기회가 있으면 당을 옮기면서 차지하려는 철새 정치가들. 이 두 가지 형태의 정치인을 몹시 싫어하였으며 이에 분노하였다.
그러나 정작, 정치에 모든 것을 바친 그는 '보통 국민들이 돈 걱정 취직 걱정 덜 하고 억울한 일 당하지 않으면서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정치의 목적인데, 정작 정치를 하는 사람은 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라고 고백한다.
노무현과 조선일보의 전쟁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언론에 맞선, 언론의 독재와 편향성을 대놓고 폭로한 정치인, 혹은 대통령은 노무현이 처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지금은 언론과 재벌에 대해 모두가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개혁 대상으로 여기는데 이 때는 재벌은 아직 그 대상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여러 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노무현 정권은 삼성과 어느 정도 연결이 되어 있었던 것 아닌가 싶다. 2005년 엑스파일 때에도 대통령의 거절로 수사가 잘 진행되지 않았다고 하니...
그는 허례허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허례허식이 없었다. 재밌는 예화도 책에 나온다.
기나긴 논란 끝에 미국 방문 문제를 정리했다. "갈 일이 있으면 간다. 일이 없어도 한가하면 갈 수 있다. 그러나 바쁜데 일도 없으면서 사진 찍으러 가지는 않겠다." 갈 일도 없고 바쁘기도 해서 결국 미국을 가지 않은 채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미국에 가서 인사하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는 결국 가지 않았다. 갈 이유가 없으면 가지 않는다. 노무현은 이런 사람이다.
16대 대통령에 당선에 대한 그의 평가는 냉정하다.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들이 기적을 만들었다. 기적 같은 승리였기에 감격도 그만큼 컸다. 그것은 결코 당연한 승리가 아니었다. 일회적인 승리, 의외의 승리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도, 나의 당선도, 모두 이례적이고 특수한 조건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사건이었다.' 기적, 일회적, 의외의 승리라고 표현한다. 이렇게 말하는데는 대한민국 정치에 대한 그의 확고한 관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다.
대한민국 정치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하는 축구 경기와 비슷하다. 보수 세력은 위쪽에, 진보 세력은 아래쪽에서 뛴다. 진보 세력은 죽을힘을 다해도 골을 넣기 힘들다. 보수 세력은 축구를 해도 쉽게 골을 넣는다. 나는 20년 정치 인생에서 이런 현실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꿔놓지 않으면 앞으로 진보 세력이 승리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보수 세력은 조직이 매우 크고 강하다. 이념적으로 튼튼하게 결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기득권의 결속력도 매우 강하다. 공동체 이익에 근거를 둔 네트워크를 감정적 네트워크로 재조직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어느 지역 어느 집단에서나 돈 많고 권력 있고 지위 높은 사람은 거의 다 보수의 네트워크에 가입되어 있다. 게다가 보수세력은 인구가 많은 영남을 장악하고 있다. 큰 신문사, 큰 기업의 소유자, 큰 연구소를 모두 보수가 장악하고 있다. 법원, 검찰, 국정원도 그 본질적 특성상 보수 쪽으로 편향되어 있다.
반면 진보 세력은 지역으로 갈라져 있고 이념으로 분화되어 있다. 돈 있는 사람이나 경제적 여유가 있는 단체가 별로 없다. 진보적 시민단체조차도 기업의 지원을 얻지 못하고 언론이 외면하면 힘을 쓰지 못한다. 튼튼한 정책연구소도 거의 없다. 그런데 보수의 나라에서 진보가 행 할 일은 너무나 많다. 두 차례의 대선 승리와 10년의 집권도 보수와 진보의 불균형을 크게 바꾸지는 못했다. 보수와 진보의 격차는 '조선일보'와 '오마이뉴스'의 자산 규모 차이만큼이나 크다.
실제로 이명박, 박근혜는 뻥 축구를 했다. 문재인과 보수 세력은 죽을 힘을 다해서 싸웠지만 결국은 패하고 말았다. 올해 대선에서는 어떤 구도가 펼쳐질 것인가!
그는 분야에 따라 불확실성이 있는 전략을 택할지 없는 전략을 택할지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안보 측면에서는 불확실성이 없는 예측 가능한 의사 결정을 한 반면, 경제 측면에서는 불확실하지만 안고 뛰어가는 쪽을 선택하였다.
나는 위험한 채찍은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확고학 밝혔고 그런 원칙을 견지했다. 내 카드를 노출시키지 않음으로써 상대방이 나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것도 때론 좋은 협상 전략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전략은 이익을 나누는 협상에서나 쓸 수 있다. 민족과 국가의 운명이 걸린 중대사를 협상할 때는, 상대방이 나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나도 상대방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 북핵 문제 협상은 본질적으로 이익을 다투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제거하기 위한 협상이다.
여기서 신뢰는 상대방의 인격에 대한 신뢰, 도덕성에 대한신뢰가 아니라, 상대방이 나에 대해서 불안감을 갖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다.
개방 전략은 아무리 정밀하게 연구하고 분석해도 위험과 불확실성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선택의 폭도 좁다.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위험을 안고 뛰어들거나, 불확실하기 때문에 위험을 회피하는 것. 이것 들뿐이다. 세계 경제의 흐름을 보면 장기적으로 FTA를 회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적어도 낙오를 면하려면 그 불확실성을 안고 뛰어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차피 뛰어들 것이라면 남보다 먼저 해야 앞서 갈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우리 국민의 역량을 믿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다 이루어 낸 우리의 현대사를 볼 때 국민들이 FTA에 내포된 위험과 불확실성을 감당해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이 없었다면 한미 FTA를 추진하기로 결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이 농업이었다. 우리 농민들은 나이가 많다. 은퇴하려는 농민들은 은퇴할 길을 열어 주고 다른 국가 정책으로 안정된 삶을 꾸려 나갈 수 있도록 돕는 한편, 계속 농사를 지을 사람들은 세계 일류 수준으로 농사를 짓도록 하는 것이 농민을 위해서도 국민경제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국민들은 미르·K스포츠재단 문제를 '강제 모금'이 아닌 '정경유착'으로 판단했다. 모금의 강제성만 따지면 재벌 회장들은 피해자가 된다. 그러나 뇌물을 바치고 사업의 특혜를 받는 정경유착이라면 박근혜 정권과 재벌 회장들은 가해자 공범이 되고 국민이 피해자가 된다. 국민들은 법률과 상식을 짓밝으면서 권력을 휘두른 박근혜 정권과, 그 권력에 야합하여 이권을 챙겨먹은 기업인 모두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으며, 국민 대표인 국회의원들이 이 분노를 대변해 주기를 기대했다."
이 글은 2016년이나 2017년에 쓰여진 글이 아니다. 사실, 이 글은 책 <운명이다>에 나오는 내용 중, '일해재단'을 '미르·K스포츠재단'으로 '전두환'을 '박근혜'로 바꿨을 뿐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인가보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똑같이 반복될 줄을 몰랐다! 그래서 역사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나보다.
원문은 아래와 같다.
"국민들은 일해재단 문제를 '강제 모금'이 아닌 '정경유착'으로 판단했다. 모금의 강제성만 따지면 재벌 회장들은 피해자가 된다. 그러나 뇌물을 바치고 사업의 특혜를 받는 정경유착이라면 전두환 정권과 재벌 회장들은 가해자 공범이 되고 국민이 피해자가 된다. 국민들은 법률과 상식을 짓밝으면서 권력을 휘두른 전두환 정권과, 그 권력에 야합하여 이권을 챙겨먹은 기업인 모두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으며, 국민 대표인 국회의원들이 이 분노를 대변해 주기를 기대했다."
정리하면, 그의 어깨는 너무 무거웠다. 그는 당당했고 자신 만만했고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현실의 여러가지 문제에 부딪히기 시작하며 그가 계획하고 생각했던 모든 정책들, 그리고 그의 지지자들은 오히려 그에게 부담이 되었고 두려움이 되었다. 책임감이 너무나 강하였기에 좌절도 너무나 컸고 상심이 너무나 깊었다. 결국 그는 그 좌절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길에 대해 사람들은 그가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