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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중지 - 재생산을 둘러싼 감정의 정치사 ㅣ Philos Feminism 8
에리카 밀러 지음, 이민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5월
평점 :
원서 제목은 Happy Abortions이다. abortion은 유산, 낙태 혹은 임신중절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저자는 abortion은 임시중지로 번역했다. 아무래도 유산이나 낙태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고 여성 중심적이고 여성 주체적이지 않기 때문에 임신중지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 같다.
책을 읽으면 임신중지와 관련하여 끊임없이 프레임을 씌우고 담론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담론을 태아 중심으로 옮겨 여성들에게 죄책감을 가지게 하거나 태아를 잃은 슬픔을 주입시키기도 했다. 임신중지를 부정적 감정과 계속 연결하는 것이다. 국가나 공동체는 여성이 임신중지를 숨기고 부끄러워하도록 수치를 주기도 했다.
피임 기술의 발달은 여성을 더 궁지에 몰아넣었다. 임신과 관련한 모든 짐을 여성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피임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도 넘기고 오로지 여성의 선택에 의하여 임신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임신중지가 임신한 여성에게 매우 문제적인 선택이라고 몰아간다.
"모성에 가치를 부여함에 따라 임신중지를 겪은 여성은 '좋은 어머니'에 대비되는 부정적인 인물로서 문화적으로 재현된다."
여성의 감정을 공략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회와 문화, 국가는 여성에게 수치와 죄책감을 가지게 만든다.
"오늘날 임신중지 여성은 선택이 제한되어서가 아니라 선택에 부여되는 의미, 주로 감정을 거쳐 소통되고 생성되는 의미를 통해 규제당한다."
"수치는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 사회적 존재로서 성공을 가늠하는 지표다. 임신중지는 여성이 여러모로 이에 실패했음을 알린다."
임신중지는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정당화된 적이 없다. 임신중지에 찬성하는 집단도 모든 임신중지를 찬성하거나 임신중지가 많아지기를 결코 환영하지 않았다. 이들은 여성이 사회 경제적 자원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임신중지를 해야 하는 절박한 여성에 한정 지어 임신중지를 찬성한다. 즉, 이들은 빈곤, 나이, 불안정한 관계 등의 요소로 수용 가능한 '사회적' 임신중지의 경계를 만든다.
"법안 지지자들이 임신중지는 편안하고 손쉬운 절차가 되어 여성이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반박한 일은 거의 없다. 지지자들은 절차상 의사의 역할이 중요하며, 나아가 임신중지가 여성에게 쉬운 일이어서는 안 되고, 단순히 자기 편의를 위해 임신중지를 하는 여성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임신중지를 반대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정치적 필요에 의한 경우도 있고 종교적 이유도 있다. 국가에 있어서 국민의 수는 경쟁력에 어느 정도 비례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 임신중지에 반대하기도 한다. 이러한 반대로 인하여 여성은 자발적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일 뿐 아니라 피해자인 여성을 이기적인 존재, 나아가 살인자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이다.
"임신중지는 국가에 대한 위협으로 나타날 때도 많다. '국민 만들기'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게 모성이기 때문이다."
태아 중심적 애통함이 임신중지 반대의 대표적 전략이었다. 태아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1980년대부터는 이러한 태아 중심에서 여성 중심으로 초점이 옮겨 간다. 임신중지는 건강적인 측면이나 심리적 측면에서 여성에게 좋지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평생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 모든 대립의 역사를 이야기한 다음에 임신중지는 축하받을 일이라고 당당히 선언한다.
"나는 임신중지가 축하받을 일이라고 본다. 임신중지는 의도치 않게 임신을 한 여성이 원하는 것을 얻고, 재생산 가능한 연령대의 여성이 재생산과 분리된 이성에 섹스를 보장받을 수 있는 일이다."
책을 통하여 임신중지를 괴로움, 애통함, 수치와 연결하는 담론과 패러다임이 무엇인지를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이러한 담론들이 행복한 임신중지의 가능성을 없애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임신중지야 말로 원하지 않는 임신을 했을 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덧붙인다.
"임신중지 여성을 평가하려는 고정된 규범이 없을 때, 수치나 죄책감은 임신중지의 정동적 지형에서 사라질 것이다. 모성을 해체해 여성에게 행복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은, 임신중지를 분명 여성의 선택으로 새롭게 프레이밍하되 자율적 행위자가 내린 선택으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기획에는 오늘날 임신중지의 감정으로 인식되는 것들에 균열을 내는 과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