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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록 - 라틴어 원전 완역판 ㅣ 세계기독교고전 8
성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박문재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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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록은 영어로 confession이다. confession에는 죄의 자백이란 뜻도 포함되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40세 때 이 고백록을 통하여 지난날에 지은 죄를 자백하며 자신의 믿음을 고백한다. 그렇지만, 그는 고백록을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한다. 결국, 자신의 삶을 돌아봤을 때 겸손히 하나님만을 찬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삶의 여러 여정을 이야기하면서 계속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자신의 죄된 습성과 본성을 회개한다.
약 1,700년 전에 살았던 그의 삶과 고백을 읽으며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그 당시와 지금의 문명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랐을 것이다. 차도 없고, 비행기도 없고, 휴대폰, 텔레비전 등도 없었던 시대이다. 문명의 이기라고 할만한 것이 거의 없었던 시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한 것은 1,700년이 지나면서 사람의 근본과 사고체계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니,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의 몇몇 사람들은 철학적 논리적 사고가 지금보다 훨씬 뛰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때도 물론, 사고를 방해하는 여러 오락 요소들이 있었겠지만 지금보다는 적지 않았을까. 그래서 더 깊이 사고할 수 있고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단조로운 삶을 유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그의 어머니 모니카이다. 그녀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에 빠져 하나님을 떠나 있는 동안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머니의 기도를 들으셨지만 여전히 자신을 어둠 속에 있도록 두셨다고 그는 고백한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주님께서 사랑하신 저 고결하고 경건하며 분별 있는 과부였던 내 어머니는, 한편으로는 한결같이 나를 위해 애통해하시면서, 나를 주님께 올려 드리는 가운데 울며 간절하게 기도하시는 것을 그치지 않으셨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소망에 넘쳐서 활기찬 삶을 살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주님 앞에 상달되었지만, 주님께서는 내가 그 어둠 속에 빠져서 계속해서 허우적거리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이런 어머니 모니카에게 암브로시우스 주교가 말한 내용이 인상적인데, 그는 모니카에게 아들을 그대로 놔두고 계속 기도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들이 언젠가는 책을 읽다가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라 말한다. 주교의 말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은혜로 책을 읽으며 마니교를 떠나게 되고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하나님을 믿기 전, 정욕을 좇아 살았으며, 주변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삶을 추구했다고 고백한다. 심지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정욕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길이 아닌 자신의 길을 사랑했다고 고백한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왜 이것이 문제가 되는지를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정욕을 좇아 사는 삶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칭찬받는 삶이 무엇인 문제인지, 내가 하고 싶고 원하는 길을 가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회심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나는 하나님을 안 믿지만 기쁘고 즐겁게 살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아우구스티누스는 주님 없는 기쁨은 거짓된 기쁨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주님이여, 내게 그 어떤 기쁨이 있다고 해도, 주님을 고백하는 이 종의 마음에, 내가 행복하다는 생각이 드는 일이 절대로 없게 해 주십시오. 왜냐하면, 악인들에게는 주어지지 않고, 오직 감사함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기쁨이 있는데, 그들의 기쁨은 주님 자신이고, 행복한 삶이라는 것은 주님을 바라보고, 기뻐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으로 기뻐하며, 주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이고, 그것 외의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기쁨들을 추구하겠지만, 그것들은 참된 기쁨들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거짓 기쁨들로부터 돌아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의 기쁨만이 행복한 삶인데도, 세상에는 그러한 기쁨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행복한 삶을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또는,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원하기는 하지만,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슬러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하고(갈 5:17), 사람들은 자신들이 할 수 없는 것들을 행하기 위해서는 아주 강력한 의지가 필요하지만, 실제로는 그 정도로 의지가 강하지 못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행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거기에 안주해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기뻐하는지, 아니면 거짓을 기뻐하는지를 물으면, 행복하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진리를 기뻐한다고 대답할 것이고, 진리를 기뻐하는 것은 곧 행복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그 사람의 인생은 변하게 되어 있다. 아니, 변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하루에 정해진 24시간을 어디에 써야 될지 고민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도 동일한 고민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나의 오전 시간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사용해야 하지만, 나의 나머지 시간들은 지금 어떤 것들을 하며 보내고 있는 거지? 왜 그 나머지 시간들에 성경을 읽지 않는가? 하지만 그 시간들을 성경을 읽는 데 사용한다면, 나를 지지하고 후원해주는 나의 유력한 친구들은 언제 만나고, 수업 준비는 언제 하며, 일 때문에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고 피곤해진 내 마음은 언제 쉬어 주어서 힘을 차리게 한단 말인가?
그런 쓸데없고 헛된 생각들은 다 버리고, 모든 염려를 다 내려놓고서, 오로지 진리를 찾는 데에만 전념하면 어떨까. 인생은 비참하고,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 죽음이 갑자기 찾아오면, 나는 어떤 상태로 세상을 떠나게 될까? 그렇게 되면, 나는 여기에서 찾지 못한 진리를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그리고 나는 여기에서 진리를 찾지 못했다고 해서, 거기에 가서 벌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언제 죽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차라리 1년 뒤, 2년 뒤에 죽는다고 정해져 있으면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쉬울지도 모르겠다. 1년 뒤에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계속 일할 사람은 없다. 남은 1년 의미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 가족과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모든 스케줄을 조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자신이 얼마나 오래 살지, 언제 죽을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루하루 우선순위를 제대로 정해야 된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오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 왜 성경을 읽지 않느냐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강하게 자신을 향해 질문한다. 나도 동일하게 나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도 다음과 같이 고백하며 이러한 변화가 간단하거나 쉬운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주님 안에서 생명을 얻어 살아가는 것"은 하루하루 연기할 수 있었지만, 내가 날마다 " 내 자신 안에서 죽어가는 것"은 연기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행복한 삶을 원하였으면서도 그 행복한 삶이 있는 자리로 가는 것은 두려워하고 있었고, 행복한 삶을 찾고 있었으면서도 실제로는 그 행복한 삶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나의 몸은 내 마음이 어떤 것을 조금이라도 원하는 기미가 보이기만 하면, 내 마음이 지시하는 그 방향으로 즉시 아주 쉽게 사지를 움직였던 반면에, 내 영혼은 오직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으면 이룰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의지의 명령에는 잘 따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