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애도하지 않는다 - 아버지의 죽음이 남긴 것들
사과집 지음 / 상상출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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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면 누구나 죽는다. 혹자는 인간은 죽기위해 살아간다고 하기도 한다. 매일 아침, 저녁 뉴스를 보면 누가 죽었고, 왜 죽었는지 보도가 안되는 날이 없다. 그 정도로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가까이에 있는 죽음을, 나 또는 내 주변인과 결부시키지 못한다. 특히 내 주변인과 결부시킨다는건 왠지 죄악같아서 더더욱 그렇다.


그러다 어느날, 내 주변인의 죽음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그 죽음을 이겨낼 수 있을까? 온전히 그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 사람을 추모하며, 내 삶을 돌아볼 수 있을까? 이 에세이는 바로 그 점을 이야기한다.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하지 못했던,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내기 바빴던, 딸이 아버지의 죽음과 마주하며 닥친 일상을 담담하게 써내려갔다.

그 일상에는 사라진 줄 알았던 가부장제의 잔재가 발견되기도 하고, 직장에서 죽어도 산재승인을 받을 수 없는 사회의 부조리함도 있다. 반면에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던 인간관계에 대한 고찰도 있다. 무엇보다 글쓴이의 이야기가 언젠가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정말 모든 자녀들이 읽기를 바란다. 그래야 언젠가 내 부모의 죽음과 맞딱드렸을때, 우왕좌왕 하지않고, 오롯이 내 부모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고, 그 상황에 처한 내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을테니까.

내가 목격하고 체험한 장례란 가부장적 ‘정상’ 가족이 얼마나 잘 살아왔는지를 평가하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여성과 남성이 할 일은 엄격히 나뉘어 있었고, 여성은 장손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해 겸허히 한 발짝 뒤에 서야 하는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그간 모든 제사와 명절에서 반복된 전통적 여성상이 가장 강하게 재생산되는 곳이 바로 장례식장이었다. p 023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본래 의례란 것은 산 자를 위해 존재하는 법이다. 그러나 불합리한 허례허식이 보일 때마다 애도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감정이 순간순간 치솟을 때마다 부끄러운 감정이 들었다. 아빠의 죽음 앞에서도 냉소를 감추지 못하는 나 자신을 질책하게 됐다. p 030

오백여년간 주자성리학에 함몰되었던 우리나라, 여성에게 많은 제제가 있었다. 하지만 그 제제도 몇십년의 시간을 지나, 많이 약화되었고 사라지기도 하였다. 선택적이긴 하지만 자녀가 엄마의 성을 쓸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에게 제제가 남아있는 문화가 있으니, 그게 바로 장례문화다.

그저 죽은 자를 애도하고, 죽은 자를 떠나보내기 위한 숭고한 의식이 장례식인데, 정작 저자가 마주한 아버지의 장례식은 허례허식이 난무한 한국의 장례식이었다. 고인은 분명 나의 아버지이고, 아버지의 자식은 바로 나인데, 여자라는 이유로 상주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남자라는 이유로 일년에 한번 볼까말까한 사촌오빠가 상주가 되었다.

지금까지는 한국의 장례문화에 대해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다녔던 장례식장을 떠올려보았다. 세상에, 모든 상주는 남자였다. 심지어 꽤 오래전 내 삼촌이 돌아가셨을 때는, 자녀였던 딸들이 아닌, 동생이었던 삼촌들이 상주가 되었다. 아, 그때 내 사촌동생들은 본인의 아버지의 죽음에서 배제되었었구나. 이제서야 알았다.

그러니 나는 상상한다. 육개장을 먹지 않아도, 남자 상주가 없어도 존엄하게 떠날 수 있는 장례식. ‘나 없는 송별회’가 이루어지는, 조금은 산뜻한 애도의 장을. 적어도 내가 죽고 없을 때도 고인을 애도함에 있어 성별이나 가정의 형태가 제약을 주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게 나는 나의 죽음을 천천히 준비하기로 한다. p 041

만약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면? 정말 다행스럽게도 나에겐 남동생이 있다. 또한 내 남편이 있다. 이런걸 다행스럽게 생각해야하는 한국의 장례문화란 대체 무엇일까. 지금의 대한민국은 핵가족화에 이어 1인가구가 많아지고, 편부/ 편모가정도 많다. 과거의 ‘정상가족’이라던 범주에서 많이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가족형태가 변경되면서 나라의 정책도 변화하고 있는데, 왜! 장례문화는 고릿적 모습에 갖혀 변화하지 않는 걸까.

누구나 태어나면 죽고, 나 역시 언젠가는 죽는다. 해서 언젠간 내가 상주가 될수도 있고, 또 언젠간 내가 장례식의 고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내가 주체가 되는 장례문화의 변화에 대해선 소심하게굴까. 허례허식이 난무하지 않는 장례식, 오롯이 고인을 추모하고, 고인을 떠나보낸 사람들의 마음을 추수리는 장례식. 그런 장례문화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봐야할 때다.

면담은 예상과 달랐다. 노무사는 아빠의 죽음에 ‘이 정도’ 로는 부족하다며 ‘적당한 정도’의 승소 케이스를 보여줬다. 그 중 하나는 공사장에서 포크레인에 떨어져 하반신이 마비가 된 사람의 산재 승인이었다. p 075

저자가 아버지의 죽음에서 맞딱드린건 한국의 장례문화 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선 정말 어려운, 근로자의 죽음에 대한 산재 문제, 바로 그것이었다. 직장에서 과로로 죽은 아버지기에 산재를 받고자 했지만, 산재를 신청하면서도 당연히 안될거라 생각했다. 그게 대한민국이니까. 그리고 정말 산재 승인을 받지 못했다.

우리는 뉴스에서 수많은 과로사를 마주한다. 배달을 하다가 과중한 업무에 죽은 피해자들, 반도체공장을 다니다 백혈병에 걸려 죽은 피해자들. 그들의 유가족들은 산재승인을 받기 위해 대기업과 싸웠다. 하지만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그들은 산재승인을 받지 못했다. 업무와의 인과관계를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 하나로.

근로자의 과로사가, 근로자에게 없었던 질병이 발병된게 정말 업무와 인과관계가 없는건가?모두가 의심하지만, 대기업과 정부단체는 없다고 일축한다. 그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나랑 상관 없는 일인데?’ 라고 생각하며 무시하기엔, 우린 모두가 근로자다. 내 부모가 대기업 임원이라, 대기업 대표라, 혹은 부동산 부자가 아닌 이상은, 우리같은 일개 서민들은 일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근로자다. 그래서 이런 과로사는 내 일이 될수도 있고, 내 친구의 일이 될 수도 있고, 내 부모의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대기업과 정부가 산재 불승인을 내는 것을 남일이라고 간과하면 안되는 것이다.

사실 부모의 죽음, 조부모의 죽음에 관한 생각은 최대한 미루고 싶다. 하지만 묫자리 탐방과 엄마가 원하는 죽음 이후를 들으며, 이상하게 미뤄온 일을 끝냈을 때의 후련함을 맛보았다. 가족의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남은 생에 내가 해야 할 일을 깨닫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p 151

위에서도 말했듯 이 책은 갑작스럽게 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한 한 여성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 여성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한민국을 사는 모든 자녀들의 이야기다. 그렇기에 이 책은 이 땅에 사는 모든 자녀들이 읽어야 할 책이다. 20대 자녀는, 30대 자녀든, 40대 자녀든. 그 누구든 내 부모가 살아있다면 꼭 한번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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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허영선 지음 / 서해문집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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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그곳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 하나 없는 우리나라 남단에 있는 섬이다. 한때는 신혼여행지로 각광받았었고, 또 한때는 수학여행지로 각광받았으며, 지금은 언제 어느때든 힐링을 위해 훌쩍 떠날 수 있는 여행지이기도 하다. 본토와는 다른, 이국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는 제주도.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그 제주도가 70년 전, 경찰 눈에 띄었다 하면 그저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섬 전체가 피비릿내 나는 학살터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난 제주여행을 계획할 때마다, 제주 4.3 사건 유적지를 꼭 찾아다닌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건 아니었다. 시작은 그저 역사여행이었다. 원래 내 모든 여행의 목적은 역사여행이었기에, 역사유적지를 즐겨 찾아다녔던거다. 다만 내가 찾아다니는 시기의 역사는 대게 고대에서 중세까지. 근/현대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나라 근/현대 역사는 어둡고 아프기만 한 역사였으니까. 근/현대 역사는 문자로만 봐도 분노에 치미는데, 그 장소를 찾아가게 된다면, 내 감정이 어떨지 두렵기도 했다.

그러다가 한 3년전쯤인가? 본격적으로 마음을 다잡고 근/현대 역사유적지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중 크게 나눈다면 일제강점기 관련 유적지, 광주 5.18 유적지, 제주 4.3 유적지 정도랄까. 그래서 그때부터 제주를 방문할 때마다 4.3 유적지를 찾아다녔다. 어떤 곳은 정비가 잘 되어있는 곳도 있었고, 또 어떤 곳은 차로는 진입하기가 어려운 곳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찾아다녔다. 나 한사람이라도 그 장소를 기억하고, 그 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한다면, 그 곳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지는 않을까 싶어서다.

뭐,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제주 4.3과 관련된 책을 읽어 보았다. 관련 역사 유적지에서 나눠준 책자나 안내판으로 짤막하게 읽었던 제주 4.3을, 보다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마음이었달까?

제주 4.3 속으로

※책 속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제주 4.3의 역사는 본토의 역사와도 연결됩니다. 해방 후, 미군정이 다스리던 시기의 미곡수집령은 제주와 본토가 동일했고, 남한 단독선거 반대를 했던 사람들은 제주 뿐만 아니라 본토에도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전후로 이승만이 실시한 예비검속 역시 제주 뿐만 아니라 본토에서도 자행되었습니다(본토 곳곳에도 예비검속 당시 학살터가 남아있습니다). 다만 제주는 고립된 섬이었기에, 본토보다 더 제제가 강했고, 그 결과과 섬 전반에 걸친 대 학살이었습니다.

제주 4.3의 시작

“쌀과 자유를 달라!” 식량 부족으로 위협을 받고 있는, 생존의 늪에 빠진 도민들의 거친 숨결이 흘러나온다. 1946년이 저물고, 해가 바뀌어도 도민들의 삶은 무겁기만 하였다. 어떤 때는 배급 받은 밀가루가 질이 좋지 않는 데다 비료나 석유, 석탄분 등이 섞여 있어 이것을 식량으로 먹은 주민들이 구토를 하여 배급을 중지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고개넘어 또다시 보릿고개, 밀기울까지도 구하기 힘들었다. 제주도는 이제 거의 빈사상태, 실오라기만 한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p 040

1945년 해방이 찾아왔다. 일본에 끌려갔던 수많은 사람들이 대거 조선땅으로 귀환했다. 제주도도 그랬다. 일본에 끌려갔던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제주도로 돌아왔다. 드디어 일제가 물러간, 우리 땅에서 살아보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일제가 물러간 자리에는 미군정이 들어앉았다. 그래, 미군정이라고 하더라도, 일제처럼만 아니라면, 사람대우 해주고 먹고살길 마련해준다면 상관없었다. 하지만, 미군정은 그러지 않았다.

미군정은 불안한 정국을 안정시킨다는 이유로 경찰, 행정 그 모든 자리에, 일제시대에 일본에 충성했던 친일파들을 그대로 앉혔다. 거기다 미군정은 미곡수집령을 시작했다. 일제의 쌀 공출과 다름없는 행태였다. 당시 제주는 일본에서 돌아온 도민들이 급증하여, 쌀 소모량이 급등하였는데, 업친데 덥친격으로 미군정은 쌀, 보리를 공출하기 시작한 것이다(본토포함). 그렇게 제주에는 대기근이 돌았다. 제주도민들은 살기 위해 고구마를 먹고, 돼지사료를 먹었다.

※미곡수집령

미군정은 일제시대를 청산하지 못한 모리꾼들이 쌀을 쟁여두는 바람에 식량난이 발생하자 이를 해결한다며 1946년 봄 ‘미곡수집령’을 발표했다. 더구나 1946년 7,8월엔 보리와 밀처럼 여름에 거두는 곡식까지 내라는, 일제 때도 없던 ‘하곡수집령’까지 내렸다. 이는 농촌의 쌀을 강제로 징수하기 위한것이었고, 헐값으로 사들이는 것이어서 민중의 불만이 컸다. 더구나 일제 시기 공출을 경험했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농민의 원성은 드높았다. p067

그렇게 제주도민들은 대기근속에서 근근히 버텼다. 지금은 미군정이 우리나라를 다스리고 있지만, 얼마 안있으면 제대로된 우리나라 정부가 들어설거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때부터 독립운동을 하고, 해방이후로는 제대로된 우리나라 정부를 만들기 위해 힘쓴 김구가 있었고, 여운형이 있었다. 그렇기에 버틸수 있었다.

하지만..

드디어 1947년 3월 1일 오전 11시,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역사적인 3.1절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 기념식에서 안세훈은 “3.1혁명 정신을 계승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의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자”고 외쳤다. 이어 각계 대표들이 나와 발언을 하면서 대회는 후끈 달아올랐다. 그도 그럴것이 이날 행사는 서울처럼 좌,우익 진영 두개로 나눠 진행되지 않고, 하나로 이뤄졌지. p 049

그때였다. 말을 탄 경관의 말발굽에 한 어린아이가 채어 쓰러진 것은. 그런데도 기마 경관은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유유히 가려했다. 성난 군중은 “저놈 잡아라” 쫒아갔고, 당황간 경관은 군중에 쫓기며 관덕정 옆 경찰서 쪽으로 말을 몰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관덕정이 날아갈 듯한 총성과 함께 구경하던 6명의 주민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자리에 쓰러졌고, 8명은 중상을 입었다. 이들은 제주 4.3의 첫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p 050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한반도는 그 기쁨도 만끽할 틈도 없이 좌,우익이 나뉘어 대립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오죽하면 3.1만세운동 기념행사를 좌,우익 진영이 각기 따로 진행을 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제주도는 달랐다. 섬 주민이라는 공동체의식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제주도는 1947년 3.1 만세운동 기념행사도 좌,우익이 함께 진행한 것이다. 누가봐도 평화로운 그 행사장에 미군정은 경찰들을 배치했다. 이유는, 제주도민들이 외치는 한 목소리가 “외세타도” 였기 때문에.

미군정은 어디까지나 외세였고, 그들 스스로도 그걸 잘 알았나보다. 행여나 제주도민들이 봉기라도 할까, 지레 겁먹고 대규모의 경찰들을 그 곳에 배치했다. 뭐든지 과하면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미군정이 배치한 대규모의 경찰들, 그들이 그곳에서 대형사고를 일으킨다. 그 곳에 있던 기마경찰이 기념행사를 잘 보고 있던 한 어린아이를 말발굽으로 치고, 그대로 뺑소니를 친 것이다. 이를 목격한 제주도민들이 항의하니, 오히려 그대로 경찰서로 도주. 방귀뀐 놈이 성낸다고, 미군정은 그 자리에서 제주도민들을 향해 총을 쏴댔고, 그자리에서 제주도민 5명이 죽었다. 그 중에는 초등학생도 있었다.

미군정과 경찰들은 이 날의 사건을 본인들의 과실이 아니라했다. 제주도민들은 분노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굳게 입을 닫았다. 진상규명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군정은 이 날의 사건을 제주도가 빨갱이 섬이라서, 폭도들이 일으킨 사태라고 규정해버렸다. 그날 이후부터 제주도는 빨갱이 섬이 되었다.

3.1사건 직후부터 제주도에 내려오기 시작한 서북청년회. ‘서북’이라 쓰인 완장을 찬 이들은 자금 모금을 한다는 구실로 태극기나 이승만 사진 등을 주민들에게 강매하기도 햇다. 1947년 말부터는 경찰과 행정기관, 교육계에 근무하는 서청 단원이 늘어났고, ‘좌익 척결’이란 이름 아래 서청에 의한 테러가 곳곳에서 발생했다. p 061

제주를 빨갱이 섬이라 규정한 미군정. 그들은 본토에서 수 많은 인력들을 제주로 보냈다. 그 중에는 ‘서북청년단(이하 서청)’이라는 단체도 있었다. 이들은 이승만을 지지하는, 우익단체였다. 그들 뒤에는 당연히 이승만이 있었다. 이승만은 이들을 이용해 좌익세력들을 탄압했는데, 제주 역시 그 좌익세력에 포함된 빨갱이 섬이었던 것이다. 다만, 여기서 문제가 있다면, 미군정 및 이승만 세력은 서청을 좌익세력 탄압에 이용했으나, 그들에게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지는 않았다. 해서, 제주에 온 서청은 말 그대로 좌익세력을 탄압하면서, 그에 응당하는 댓가를 얻기 위해, 본인들의 생활비를 얻어내기 위해 약탈을 자행했다.

그렇게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는 서청단원들은 어느새 제주에서 하나, 둘 씩 요직을 차지하게 된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이 불을 켜고 있었다. 어미 같은 한라가 품고 있었던 오름들, 볼록볼록 꾸물거리는 듯한 그 봉우리마다 일제히 벌건 불이 올라왔다. 타오르든 불들은 한참 후에야 서서히 사라졌다. 그들은 밤새 그 시간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것은 소위 산으로 간 무장대가 피워 올리는 불, 봉화였다. 남로당 제주도 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었다. 봉화신호가 떨어지자 무장대는 공격을 시작했다. 도내 24개 경찰 지서 가운데 12개 지서, 서북청년회 숙소 등 우익 단체 요인의 집과 사무실이 표적이었다. p 074

“탄압이면 항쟁이다!”,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을 결사적으로 반대한다!”, “반미구국투쟁에 나서자!” 이 것이 두 성명의 요지였다. ‘반쪽 조국은 안된다’는, 통일조국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깔고 있었다. 그러니까 통일 정부로 가야한다는 것이 4.3의 구호였다. 셋째는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미군정에 댛나 저항, ‘반미투쟁’이라는 정치적인 색채를 분명히 표출하고 있었다. p 076

제주4.3사건이라는 명칭을 얻게된, 바로 그날.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 있던 남로당 세력들이 한라산에 봉화를 피웠다. 서청이 극우세력이라면, 남로당은 좌익세력이었다. 이 소수의 ‘남로당’, 그들은 분명 우리가 혹은 책에서 흔히 말하는 빨갱이라 말하는 그런 세력이 맞다. 하지만, 잘 알아야 한다. 해방이전까지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좌익사상을 가진 분들도 있었고, 우익사상을 가진 분들도 있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좌익은, 지금의 북한 같은 독재공산주의가 아니라는 점이다.

당시 한반도 남쪽은 미국이 차지하고, 북쪽은 소련이 차지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라는 사상을 내세운 반면, 소련은 사회주의 사상을 내세웠다. 양 국가 모두 한반도에 자기들 입맛에 맞는 정부가 세워지길 바랐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저 남과 북이 통일된 정부를 원했을 뿐이다. 이건 남로당 뿐만이 아니었다. 미국의 뒷배를 믿는 이승만을 비롯한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김구 선생이나 김규식, 여운형 선생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국민들이 통일 정부를 원했다. 하지만 그 바람이 무색하게,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두고 저울질을 했고, 그렇게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수순에 들어갔다.

본토와 제주 모두에서 단독정부를 반대했지만, 제주도는 유독 극명하게 단독정부를 반대했다. 그래서 5월 10일에 치뤄질 단독선거도 역시나 반대했다.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움직이던 미군정은 이런 제주도를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그래서 마련한 대책이 바로 ‘오라리 방화사건’이다. 무장대가 제주도의 한 마을을 방화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경찰의 자작극이었던 그 사건 말이다. 이 자작극으로 미군정 이하 경찰들은 제주에 대한 탄압에 박차를 가한다.

아무튼 이 ‘오라리 방화사건(1948년 5월 1일)’에 대해 김익렬 연대장은 경찰의 후원아래 일어난 서청, 대청 등 우익청년 단체들이 저지른 방화라고 미군정에 보고했지. 그러나 김익렬의 보고는 철저히 묵살당한다. 경찰측에서는 무장대의 행위라고 주장했다. p 080

나중에 이 괴한들은 경찰서 소속이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경찰에선 이 사건을 경찰을 가장한 무장대의 기습 사건이라고 주장했지. 끝내 이날 미군이 경비대에게 총공격을 명령하면서 협상은 깨졌다. 이후 제주도는 걷잡을 수 없는 유혈사태로 치닫게 된다. p 081

그렇게 무자비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는 5.10단독선거를 거부했다. 제주도는 전국 유일하게 단독선거를 거부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았다. 선거를 거부한 모든 제주도민들은 분단되지 않은 조국을 원했을 뿐이었고, 그걸 실행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미군정은 단독선거를 거부한 제주도를 향하여 더 심한 탄압으로 맞섰다. 물론 그 이유는 어디까지나 단 하나, 무장대&빨갱이 색출.

5.6월 보리농사를 짓던 조천리 한 여인은 토벌대가 올라오는 것에 겁이 나 보리밭에 숨다가 경찰에 들켜 총을 맞아 죽었고, 짚신 삼던 어떤 농부는 총소리와 함께 군인들이 집으로 들이닥치자 도망가려다 붙잡혀 희상당하는 등 까닭 없이 애꿎은 죽음이 이어졌다. p 092

제주는 단독선거를 거부한 대가로 더 잔혹한 탄압, 학살을 당했다. 그저 밭에 일하러 나갔을 뿐인데, 어린 아이를 데리러 갔을 뿐인데, 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을 뿐인데…. 모두 경찰과 군인, 토벌대의 손에 죽었다. 빨갱이라고 죽였고, 무장대를 도와줄 것 같다고 죽였고, 그저 거슬린다고 죽였다. 쉽게 말하면 그냥 아무 이유없이 죽인 것이다.

이 기간에 정부는 보도 금지, 언론의 입을 막아버렸다. 군인과 경찰에 의한 학살을 절대 보도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공보부는 언론사에 무장대의 행위에 대한 논평이나 민간인 무차별 학살에 대한 동정어린 표현도 쓸수 없도록 했다. p 124

하지만 본토에서는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중요한 5.10 총선거를 앞두고, 이런 대 학살극이 본토에 알려지면 안되었다. 본토는 그렇게 보지도, 듣지도 못한채 단독선거가 진행되었고, 대한민국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렇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남과 북이 분단되었다. 그렇게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뭐, 분단이든 뭐든 말그대로 우리나라 정부가 들어섰으니, 제주도에는 평화가 찾아왔을까?

1948년 10월 경비대총사령부는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신설, 토벌작전을더욱 강화했다. 사령관에는 제5여단장인 김상겸 대령.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이 붙들려 갔고, 사람들이 사라졌다. 섬은 학살터, 비명의 공간으로 휘청대고 있었다. p 098

낮에는 토벌대 세상, 밤엔 무장대 세상, 무장대가 습격했다 가면, 토벌대가 들이닥치고, 토벌대가 가고 난 마을에 무장대가 들이닥쳤으니 오도 가도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이제나저제나 죽고 죽임의 사태가 끝나기만을 가슴졸이며 기다렸던 사람들이었다. 어느 마을에서는 어머니가 토벌대에게 죽음을 당한 사흘 후 아들이 무장대에게 희생당하는 비극도 생겨났다. 어느 마을에서는 아버지가 토벌대에게, 아들은 무장대에게 희생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희생을 가져온 때는 1948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약 6개월간. 군경 토벌대는 무장대의 피난처와 물자 공급원을 제거한다는 구실로 중산간 마을을 모두 불바다로 만들어버렸다. p 111

중산간 마을인 중문면 영남마을. 땅이 좋아 조 이삭이 어린아이 팔뚝만 하고, 고구마를 심어도 사람 머리만큼 자란다던 이 마을엔 16가구에 90여 명이 살았으나 미처 피신하지 못한 50여 명이 희생당했다. 마을은 사라졌다. p 115

대한민국 정부는 수립되었지만, 제주에는 여전히 학살이 지속되고 있었다. 더 강하게, 더 잔혹하게. 제주도는 대한민국에 속한 땅이며, 제주도민들은 대한민국이 지켜야할 국민들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게 제주는 빨갱이 섬이었다. 제주에는 학살 광풍이 계속 계속 불어닥치고 있었다.

※1948년 10월 17일, 전과에 열을 올리던 송요찬의 포고문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탕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죵료 기간 중 전도 해안선부터 5킬로미터 이외의 지점 및 산악 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해안선으로부터 5킬로 미터 이외의 지역 통제. 즉 해안 마을을 제외한 대부분의 중산간마을이 해당된다. 이 때부터 제주 중산간 마을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었다. 그들이 전개한 초토화 작전 방법은 ‘불태워 없애고, 죽여 없애고, 굶겨 없애는’ 이른바 삼진 작전.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중국을 상대로 써먹던 그 작전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해야할까.

모든 중산간 마을이 불탔다. 그럼 해안가 마을은 안전할까?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제주 해안가 마을 중 곤을동이라는 곳이 있었다. 그 곳은 제주4.3사건때 유일하게 사라진 해안가 마을이다. 한 군인이 무장대가 곤을동으로 숨어들은 것을 보았다고 하여, 곤을동을 불태워버린 것이다. 곤을동의 흔적은, 제주 북쪽 화북동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렇다. 제주 사람들에게 미군정이나 이승만 정부는 일제강점기 보다 더 악독하고 지독하고 참혹한 짐승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제주 초토화 작전을 앞두고 제9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제주로 출동 명령을 받은 제 14연대가 돌연 여수에서 총부리를 돌려 제주도 출병을 거부한 것이다. 이른바 10월 19일의 여순사건 이다. p 100

초대 대통령이라던 사람, 이승만. 그는 제주 초토화 작전을 위해 더더더 군대를 제주에 보낸다. 그렇제 제주로 보내지던 군인들중, 제주 학살에 반대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바로 여수 제14연대. 군인들이 지켜야할 사람들은 자국민인데, 그 자국민에게 총부리를 들이댄다는 것은 그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바로 여순사건.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

4.3진압을 명령받았으나, 그 명령을 거부한 여수 제 14연대 군인들. 그들은 여수와 순천, 광양, 구례 등 남부 지역을 잇달아 장악하며, 주요 정부기관 및 건물을 접수했다. 하지만 정부의 진압작전이 본격화되었고, 이승만은 이른바 공산분자, 불순분자를 철저히 숙청할 것을 지시한다. 이후 사회 각계 모든 분야에서 불순분차 색출 및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되었다. 이후 약 2개월 뒤 이승만은 국가보안법을 제정한다.

이승만은 명령을 거역한 여수 제14연대를 악랄하게 진압하였다. 이후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그 유명한 ‘국가보안법’을 제정한다. 이승만은 이 국가보안법이라는 칼을 휘두르며, 본인만의 독재정권을 만들어갔다. 이승만 사후에도 이 법은 군사정권의 칼이 된다.

1948년 12월, 제주읍에 살던 이**은 집에 있다가 “도망치려고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발이 묶인 채 돼지처럼 매달렸다. 등뼈가 튀어나올정도로 고문이 가해졌다. 그렇게 닷새를 살고 나오자 살아남기 위해 1949년 일본으로 도피했다. 2005년 고향에 돌아와 정착한 그는 그때 고문으로 튀어나온 척추뼈 때문에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리며 산다. 그때의 일을 말하면 고향의 친족에게 누가 미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아예 입을 닫고 유족 신고를 하지 않은 이도 부지기수다. p 128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끌려갔던 수 많은 제주도민들. 해방 후 내 나라 내 땅, 제주로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이들의 눈 앞에 나타난건, 일제강점기보다 더 지독하게 내 이웃을 고문하고 살해하는 대한민국의 군인과 경찰들이었다. 그렇게 제주도민들은 꿈에서조차 치를 떨던 일본으로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언제 어떻게 죽을 지 모르는 제주가 아닌, 적어도 내 한 목숨은 부지할 수 있는 일본으로 말이다. 그렇게 일본으로 밀항하는 제주도민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밀항도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밀항하다 걸리면, 수용소로 끌려가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

일본에 정착하여 살다가, 잠시 가족을 만나러 제주도에 들렀던 사람들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심지어는 일본인이었으나, 일본으로 건너온 제주도 사람과 결혼하여, 시댁을 방문하기 위에 제주도에 왔을 뿐인, 조선어 조차 못하는 일본인 여성도 있었다. 누구는 행방불명 되었고, 누구는 빨갱이 낙인이 찍혀 죽었다.

1949년 1월경 해변 마을 주민들과 중산간 마을에서 해변 마을로 소개당해 온 사람들은 토벌대의 명령에 따라 마을을 빙 둘러가면서 성담 쌓는 일에 나가야 했다. 청년들이 없는 마을, 성담 샇는 일엔 고사리손부터 여인들, 노인들의 주름진 손까지 동원되었다. 제주 읍내 어떤 여인은 성담을 쌓다가 남편의 시체를 보고 놀랐으나 비명조차 삼켜버려야 했다. 눈물을 흘릴 자유란 없었다. p 122

토벌대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토벌대에 감시하에 생활을 해야했다. 토벌대는 그들에게 무장대 침입을 막기 위한 성곽을 쌓게 했고, 그 성곽안에서 가건물(함바집)을 지어, 모두 그 곳에서 살게 했다. 난 그 성곽(낙선동)과 함바집을 직접 가서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이 공간은 이름없는 또 다른 수용소였다는 것을.

토벌대, 그들이 저지른 짓은 학살 뿐만 아니라, 성폭력도 자행했다.

허벅 지고 물 길러 갔다 오다가 붙잡혀 강제 결혼당하기도 했다. 도피자 가족으로 몰린 경우, ‘순경각시’가 되어야 가족과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여인들도 있었다. 남편이 없다는 이유로 지독한 고문이 이어졌고, 임산부에 대한 고문도 무차별적으로 이어졌다. 법이 없던 시절, 여인들은 위험했다. 어떤 마을에서는 때때로 술자리에 불려나갔고, 겁간을 당하기도 했다. p 196

(생략) 남편은 거리에서 붙잡혔고, 산파 대신 와다닥 집으로 들이닥친건 4며의 순경. 다짜고짜 온갖 발길질이 가해졌다.그 피범벅 속에서 아이는 세상에 나왔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끝내 후유증을 앓는다. p 199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면 제일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은 여성이라고 했던가. 제주 4.3사건 때도 여성들은 죽임보다 더 한 고통을 받았다. 토벌대를 만났을 때 그 자리에서 총살을 당해 죽으면 오히려 다행이었다. 토벌대들은 수시로 여성들을 유린했다. 옷을 다 벗게 하는 건 기본이고, 그 상태에서 고문을 가하거나, 강간, 죽음에 달하는 폭행을 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어떤 마을에선 주민들을 전부 모은 뒤 굳이 젊고 이쁜 처자들만 빨갱이라고 대려가기도 했다. 그렇게 끌려간 여성들은 지금까지 행방불명이다. 임산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만삭인 임산부를 죽기 직전까지 폭행하기도 하고, 배를 과녁으로 총질을 하기도 했다.

이게 바로 토벌대가 제주 여성들을 향해 한 짓이다. 일제는 대놓고 ‘위안소’와 ‘위안부’를 만들어 대외적으로 활용했다면, 제주 토벌대는 겉으로 들어내지만 않았을뿐, 일제와 하는 짓이 다를 바가 없었다.

제주 4.3사건 피해자 및 유족들 중에는 이상하리만치 한국전쟁 유공자가 많다.

제주 청년들의 (한국전쟁)군 입대는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양태병은 한국전쟁이 나자 입대를 자원했으나 신체가 약하다고 세 번이나 떨어지자 애원하다시피 해 겨우 군대에 갔다 올 수 있었다. 한국전쟁 때 자원입대했던 한 주민은 “어느 날 갑자기 불려가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죽는 것 보다 전쟁터가 훨씬 안전했다”고 회고했다. p 146

이로써 4.3은 끝난는가. 그랬으면 했다. 그런데도 4.3의 유혈 광풍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유족들에겐 또 다른 아픔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사상을 묻는 죄, ‘연좌제’라는 그물이었다. p 210

제주도에 있는 제주 4.3 평화공원, 그 안에는 기념관이 있다. 그 기념관을 보면서 놀랐던 점 하나가 바로 이거였다. 유독 제주4.3 유족들 중엔 한국전쟁 유공자가 많다는 점. 대체 왜 그랬을까? 자국민을 보호하지 않은 정부였는데, 왜 그정부를 위해서 전쟁터로 자원해서 나섰던걸까? 하고 말이다. 알고보니 그들이 자원해서 전쟁터러 나갔던 이유도, 단 하나였다. 제주라는 섬에 있으면 언제 토벌대에게 학살당할지 모르니, 차라리 전쟁터에 나가서 나라를 지키며 죽는게 낫겠다고. 혹은 이미 빨갱이라는 도장이 찍혀있는 가족들, 내 자식들이라도 거기서 벗어나게 해주기 빨갱이와 싸우는 전쟁터로 나선것이었다.

누군가는 전쟁터로 가는 것이 또 다른 죽음으로 가는 길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제주도민들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였다. 제주 4.3으로 인해 죽는다면 그 집안은 영원히 빨갱이 집안이지만, 한국전쟁에서 전사한다면 그 집안은 원수 빨갱이와 싸우다 죽은 국가유공자 집안이 될 수 있다. 제주에서 한국전쟁은 빨갱이 딱지를 땔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제주 4.3 학살은

제주도 전체에서 일어났다.

제주도의 유명 관광지, 그 곳은 제주 4.3사건 당시 학살터였다.

1948년 12월 18일, 무차별 학살극을 피해 중산간에 은신해 있던 사람들이 대거 희생당한 날이다. (생략) 웅장한 물소리를 내며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국민 관광지 서귀포 정방폭포, 동굴 속에서 숨어 지내던 동광리 마을 주민 등 많은 사람이 굴비 엮이듯 손 묶인 채 아득한 폭포 아래로 갔다. 폭포는 비명을 삼켜버렸다. p 176

1949년 1월, 성산포에 주둔하던 서청특별중대에 성산포 지역 주민들이 고문당하고 취조를 당하다 희생당한다. 성산일출봉 앞 터진목은 성산면 온평, 난산, 수산, 고성 등 인근 망르 주민 수백명이 집단 학살당해 흘린 피로 흘러넘쳤다. p 177

이승만 정권은 인민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자의적인 판단 아래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사람들을 전국적으로 예비검속이란 이름으로 잡아들였다.(생략) 예비검속, 그 회오리 바람은 너무나 큰 학살을 불러왔다. 1950년 7월 말부터 8월 말, 예비검속자에 대한 군 당국의 집단학살이 대대적으로 이뤄진 것이다. 예비검속자들은 정뜨르비행장(現제주국제공항)과 알뜨르비행장(모슬포비행장) 등지에서 처형되거나 바다에 수장당하기도 했다. p 147

지난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제주국제공항 남북 활주로 동/서쪽에서 있었던 유해 발굴 작업. 여기서는 385구의 유해를 발굴 할 수 있었다. 유해는 커다란 구덩이 속에서 조각난 뼈와 뼈끼리 뒤엉키고, 팔과 다리가 뒤섞인 채 겹겹 하나의 산을 이루고 있었다. p 225

제주도 여행 필수 코스 제주국제공항, 꼭 한번 씩은 방문하는 성산일출봉, 정방폭포, 그리고 수 많은 오름들. 지금은 그저 아름다운 제주 풍광을 보여주는 장소지만, 70여년 전만해도 그 곳은 수십, 수백, 수천명의 제주도민들이 비명에 죽어간 학살터였다. 제주에 처음 갔을 땐 이 모든 곳이 나에겐 아름다운 관광지였다. 하지만 그 다음에 갔을 때, 이 아름다운 곳들은 내 눈엔 그저 ‘학살터‘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뜨르비행장이 국제공항으로 변하고

하루에도 수만의 인파가 시조새를 타고 내리는 지금

‘저 시커먼 활주로 밑에 수백의 억울한 주검이 있다!’

‘저 주검을 이제는 살려내야 한다!’라고

외치는 사람 그 어디에도 없는데

샛노랗게 질려 파르르 떨고 있는 유채꽃 사월

활주로 및 어둠에 갇혀

몸 뒤척일 때마다 들려오는 뼈들의 아우성이 들린다

빠직 빠직 빠지지직

빠직 빠직 빠지지직

김수열, 정뜨르비행장 中

제주를 방문하는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그 곳엔 아직도 수백, 수천의 실종자의 유해가 묻혀있다. 폭포수가 아름다운 정방폭포 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성산일출봉을 시작으로 터진목 해안까지 많은 사람들이 끌려와 사살당했다. 탁트인 풍광이 보이는 서우봉에서도 수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제주 수 많은 오름들에서도 동네 주민들이 총살당했다.

제주의 대부분 해안이 학살터였고, 제주의 대부분의 오름이 매장지였으며, 제주에는 학살터가 아닌 곳이 없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저 제주를 관광지로 볼 뿐이다. 그렇게 제주 4.3은 계속 잊혀져간다.

제주 4.3 사건의 책임자는 누구인가.

희생자의 80퍼센트 이상이 토벌대의 손에 희생되었다. 이것은 1949년 미군 정보 보고서가 80퍼센트가 토벌군에 사살됐다는 기록과 상통한다. 그렇다면 무장대에 의한 살상 행위는 얼마나 되는가. 4.3 무장봉기 초기, 무장대는 경찰, 서북청년회나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원, 그리고 군경에 협조하는 우익 인사와 그들의 가족을 지목해 살해했다. 보복살해였다. 이런저런 형태로 무장대에게 희생된 사람은 전체 사망자의 약 10분의 1에 해당된다. p 140

미국의 세계적인 석학이자 사상가 노암 촘스키도 “1945년부터 1949년 6월까지 미군이 한국의 군대와 경찰을 지휘 통제했기 때문에 제주 섬에서 발생한 모든 학살극과 잔혹 행위에 대해 미국은 윤리적인 책임 뿐 아니라 실제적이고도 법적인 책임이 있다”라고 했다. p 160

먹고 사는게 전부였던 삶, 공권력은 글도 배우지 못한 자신을 ‘빨갱이’라고 매도해 재판을 했다. p 216

국가보안법과 연좌제를 들고 나온 군사정권은 제주 사람들을 반공의 이름 아래 족쇄를 채웠고, 4.3을 남로당 세력이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기 위하여 일으킨 폭동 사건으로 왜곡, 국정교과서에 그렇게 가르치도록 했다. p 229

제주 4.3사건의 희생자 중에는 분명 무장대의 손에 죽은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전체 희생자 중 10%정도밖에 안되었고, 이 희생자들 중 대부분은 토벌대의 학살에 대한 보복살해가 많았다. 그러니까 무장대가 살해한 사람들중 대게는 우익세력이나, 그들의 가족들이 많았다는 말이다. 물론 우익세력이라고 하더라도 무차별 학살은 잘못된 일이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무장대가 살해한 10%의 희생자를 제외한 90%, 제주 4.3사건 희생자의 대부분은 누가 죽였는가? 바로 국가 공권력인 군인, 경찰, 서청, 토벌대가 죽였다.

모름지가 국가는 국민을 보호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하지만 이 때, 국민을 보호해야할 국가는 어디에 있었나? 남한의 치안을 책임진다던 미군정은 정말 우리의 치안을 책임진게 맞는건가? 과연 제주 4.3의 책임은 어디에 있고, 누구에게 있는가. 정말 미군정은 이 사건에서 자유로울수 있는건가?

그 미군정을 뒷배로 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또 어떤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던 독립운동가의 모습은 어디로 버렸을까. 권력이 그렇게나 달콤했을까? 어째서 자신의 권력유지, 독재를 위해 일제보다 더 잔혹하게 국민을 탄압하는 괴물이 되었을까.

이승만 이후의 군사정권은 또 어떠한가. 그들 역시 제주 4.3을 빨갱이, 폭도로 몰아갔고, 연좌제로 그들의 자녀들은 공직에 나아갈 수도 없었다. 아주 나중에, 故노무현 대통령이 제주 4.3사건에 대해 국가를 대표하여 사과하기 전까지, 제주 4.3은 그저 빨갱이가 일으킨 사건에 불과했다. 이게 바로 국민을 지켜야할 국가가 한 짓이었다.

노대통령이 사과를 한 이후로도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렇다면 우리는 제주 4.3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고,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 답은 각자 마음속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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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수업 (리커버) -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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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문학 서적 중 베스트 오브 베스트, 유명하다 못해 스테디셀러가 된 『라틴어수업』.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다가, 이제서야 읽었다. 개인적으로는 라틴어에는 단 1도 흥미가 없다. 랄까, 서양언어만 보면 알러지증상이 미친듯이 올라오는 전형적인 한국인이랄까. 아마 그래서 이 책을 볼까말까 간만 본 것 같기도. 진짜 제목 그대로 라틴어에 대한 내용만 나오면, 내 흥미를 끌지 못할테니 말이다. 허나, 이 책은 외국어 책이 아닌 인문학 책이니, ‘뭐, 라틴어가 얼마나 나오겠어?’ 라는 생각이 책을 펼친 것 같다.


책을 펼쳐보니, 역시나! 스테디셀러인 이유가 있었다. 물론 ‘라틴어’라는 외국어에 대한 내용도 분명히 있었지만, 그 지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의 라틴어 문장을 보고, 그 문장에 대한 어원, 역사, 문화, 사회 전반에 관련된 그야말로 ‘인문학’ 강의였다. 난 서양언어는 싫어해도, 서양의 역사나 문화에는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 그런지, 이런 내용이 많아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하지만 제일 좋았던 부분은 저런 역사, 문화관련 내용이 아니었다. 그 뒤에 덧붙여진, 문자로 남겨진 저자 한동일님의 생각들이 내 마음속에 콕콕 들어왔다. 그 생각들로 하여금 자연스레 지금 내 모습은 어떤지, 내가 사는 사회는 어떤 모습인지, 앞으로 내가 살 세상은 어떻게 될지를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저는 소통의 도구로서의 언어는 배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배가 항구에 정박되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항구를 떠나 먼 바다로 나가면 크고 작은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해요. 어쩌면 그것은 배가 지나간 자리에 생기는 물거품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배와 배가 나아가는 방향을 보아야 하는데 물거품을 보는 데서 생기는 문제라는 것이죠. 이는 정작 메시지를 읽지 않고 그 파장에 집중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오해가 쌓이고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p 046

가끔 저는 라틴어를 연구하다 보면 우리 언어도 이런 수평적 성격이 발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언어의 수평적 성격이 발달하면 회의나 모임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사고나 사회구조도 좀 더 유연해질 수 있지 않을까요? p176

우리는 세계에서 제일 우수한 언어, 한글을 쓰고 있다. 누구나 쉽게 글을 읽고, 쓰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제대로 된 소통을 할 수 없을까? 왜 우리는 단절된 삶을 살고, 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이렇게 쉬운 언어를 쓰고 있는데도 말이다. 내 짧은 생각으로는, 사용하기 쉬운,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바로 그 언어로 인해 파생된 문제가 아닐까?

언어는 그 나라의 문화를 담고 있다. 즉 우리가 쓰는 한글에는, 옛부터 내려온 우리의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이야기다. 그럼 우리의 문화란 무엇인가? 바로 ‘수직적’인 문화다. 옛부터 양반, 상놈을 나누었던 문화, 고귀한 신분, 천한 신분을 나누었던 그 문화 말이다. 흔히 존댓말, 존칭어, 높잎말 등이라고 말하는 그것. 우리의 수직적인 문화를 담은 그것 말이다. 물론 우리가 쓰는 언어가 만들어진 시기는, 신분제가 엄격했던 왕조국가였기에, 그런 수직적인 문화가 담겨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신분제가 폐지된지가 한참이고, 왕조국가가 아닌 시민사회로 나아간 지금까지도 우리는 수직적인 문화가 담겨있는 언어를 쓰고 있다.

본디 언어라는게 사용을 하지 않으면 사어가 되거나, 새로운 언어가 발생하는 등 문화의 변화에 따라 달라져왔다. 우리의 한글 역시, 시민사회에 들어서면서 그 흐름에 따라 변화했어야 하지만, 슬프게도 그러지 못했다. 너무 급격하게 시민사회로 바뀌어서 그런건지, 서양의 다른 나라처럼 국민들의 힘으로 쟁취하지 못해서 그런건지, 아니면 시민사회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군부독재가 이어져서 그런건지, 그것도 아니면 그 옛날 신분제 속 양반네들의 삶이 부러웠던건지. 뭐 이것도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을수도 있다.

확실한건 우리는 수직적인 언어를 계속 사용하며, 사라진 신분제를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다만 그 신분제는 눈에 보이지 않고, 신분증에 기재되지도 않는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신분제가 만들어 졌다. 그 신분제를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흙수저, 은수저, 금수저, 다이어수저. 어떤 지역에 사느냐, 어떤 직업을 가졌느냐, 부모가 얼마나 돈이 많으냐 등등 나열하자면 끝도 없을 정도의 많은 신분 구분방법을 써, 수저로 칭하는 것이다. 이 수저들은 본인들이 속하는 계층, 본인이 사는 환경에서 소통을 한다. 서로가 사는 문화가 다르기에, 흙수저와 금수저가 소통이 안되고, 은수저와 다이아수저가 소통이 안된다. 당연한 일인 것이다.

오로지 계층간의 소통이 안되는 이유에 대한 생각만 썼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끊없이 생각이 늘어지는데, 계층이 아닌 지역간 소통의 부재, 세대간 소통의 부재는 어떠할까. 서로 대화에서 ‘본질’을 보지 못하기 있기 때문에, 소통이 안된다는 건 이제 변명조차 될 수 없다. 시민사회로 들어선 이후, 우리나라는 변할 수 있는 상황을 여러번 마주했음에도, 스스로 변하는 것을 거부했으니 말이다.

이제는 정말 공부해서 남을 줘야 할 시대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더 힘든 것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의 철학이 빈곤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한 공부를 나눌 줄 모르고 사회를 위해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소위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 주머니를 불리는 일에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착취당하며 사회구조적으로 계속 가난할 수 밖에 없는 시스템에는 무신경해요. p 056

지금 내가 사는 사회에는 분명 공부해서 남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흔히 말하는 ‘사’짜 돌린 직업군들 말이다. 열씸히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고, 간호사가 되어 사람들의 건강을 책임지기도 하고, 법학을 공부해서 변호사가 되어 누명을 쓴 사람들을 변호해주기도 한다. 물론 자기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게는 공부해서 남에게 주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간과하면 안되는 점은, 이런 ‘사’짜 돌림 직업군이 아니라하여도, 공부해서 남을 준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거다. 내 스스로 힘겹게 공부한 걸 남을 주고 싶지 않다면, 적어도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한다. 그건 당연한 상식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주변에는 공부해서 남을 주기는 커녕, 자기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요즘 뉴스를 한창 달구고 있는 ‘LH 땅투기 사태’.

본인들이 공부하여 토지공사에 입사하고, 주택공사에 입사한 건 충분히 박수받을 일이다. 그렇게 박수받고 공사에 입사를 했으면, 말그대로 공적인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본인의 지식을 쓰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지 않고, 사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 땅투기를 해왔다. 그것도 오랫동안. 심지어는 그들은 익명 웹을 빌어, 자기들의 땅 투기는 LH의 복지이고, 그렇게 아니꼬우면 공부해서 LH에 들어오라며 조롱까지 했다.

비단 LH공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토지개발 등의 공적인 업무를 진행하는 유관부서, 시의원, 국회의원 아주 줄줄이 사탕이다. 분명 국가를 위해, 국민들을 위해, 공적인 업무를 위해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인데 말이다. 여기서 내가 더 화가 나는건, 그들의 땅 투기로 내가 사는 지역이, 매일매일 뉴스에 나오고, 내 손으로 투표해서 뽑았던 시의원이 그런 짓을 벌이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 누구보다 공부해서 남을 줘야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이럴진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저는 인간이기에 욕망합니다. 그러나 만족합니다. 아니 만족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만족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찾고 싶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청년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마음껏 욕망하는 것조차 주제넘다고 생각할 정도로 빠르게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것 같습니다. 이건 그들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뒷받침되어 있지 않고, 과거처럼 노력하면 될 거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현실이 문제입니다. 그러한 현실에 가슴이 아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욕망하기를 멈출 수 없습니다. 그게 인간으로서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p 223

우리는 모두 욕망이 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싶고, 좋은 직장에 들어아고 싶고, 내 집을 마련하고 싶은 그런 욕망 말이다. 하지만 이런 욕망 앞에서 우리는 계속 좌절하게 된다. 대입을 준비생 눈 앞에 나타난 ‘대입, 학사비리’, 취업준비생 눈 앞에 나타난 ‘취업비리’, 집을 구입하려는 사회 초년생 눈 앞에 나타난건 ‘대출규제’ 등등등,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탑 앞에서 말이다.

우리가 욕망하는 이 모든 것들을, 누군가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아주 손 쉽게 얻어내고, 그를 과시하며 이를 욕망하는 모두를 비웃는다. 쉽게 말하면 돈과 권력이 있는 자는 불법적인 방법을 이용해서라도 그 자리를 유지하고 대대손손 물려주려 한다. 그걸 보는 나와 같은 일반적인 사람들은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일년동안 쌔빠지게 일해도, 내 집 마련하기가 하늘에 별따는 것 만큼이 어려워, 은행에 빚내서라도 내 집을 사려고 하니, 나라는 그것조차 못하게 한다. 무분별한 대출규제라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대출규제가 비교적 적은, 내 직장과 아주 멀리 떨어진 지방 한적한 곳으로 가야하는데, 그럼 다니던 직장을 잃을 수 밖에 없다. 직장을 잃으면 또 대출이 힘들어져, 집을 못구한다. 아니면 직장과 가까운 곳에 집을 구해야하는데, 대출이 규제가 되서, 내 스스로 돈을 일정금액 이상을 가지고 있어야한다. 서울에 직장이 있는 사람이라면, 억대 수준은 가지고 있어야 하는 셈이다. 이런 규제를 만든 사람들은 이미 온갖 방법으로 다 저질러서 지금의 부를 쌓아놓고 말이다. 예를 들어, 위에서 말했던 ‘LH사태’같은 토지개발 비리랄까?

아마 위에 말한 대입, 취업, 토지개발 비리 말고도, 그들 속에는 더 많은 비리들이 숨어있을 거다. 그렇게 그들은 부를 축적하고, 그 부를 나누지 않기 위해, 여러 방법을 고심한다. 그리고 그런 방법들이 한번씩 뉴스에 보도 될때마다, 우리는 알게 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욕망이 정말 헛된 욕망이고, 욕망해봤자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비정상의 정상화’

정권이 바뀌면 달라질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았다.

얘나 쟤나 다를게 하나 없었고,

더 슬픈건,

얘나 쟤보다 더 나은 제3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게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아, 한없이 우울해져버린 리뷰. 하지만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이 책 「라틴어수업」이 몇 년간 베스트셀러를 넘어서, 스테디셀러 자리를 지킨 것을 보면 말이다. 그말은 즉,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고, 그들 중 누군가는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을 했다는 이야기며, 내가 사는 사회에 대해 성찰을 했을 거란 말이다. 그리고 그 중 누군가는 한발 더 나아가 비정상의 고리를 끊을 방법을 찾아 나서지 않을까라는 기대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점은, 무엇보다도 이 책 「라틴어수업」을 읽은 사람들이라면 ‘비정상의 정상화’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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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잡사 - ‘사농’ 말고 ‘공상’으로 보는 조선 시대 직업의 모든 것
강문종 외 지음 / 민음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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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잡사」, 말그대로 조선의 job(직업)을 소개하는 책이다.


우리는 사극이나 책을 보면서, 조선의 여러 직업들을 보았다. 궁궐 안에서 “즈은하, 아니되옵니다~~~”라고 하는 문무백관, 어진을 그리는 화원,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는 유생, 활인서에서 환자를 돌보는 의녀, 수랏간에서 음식을 만드는 숙수, 기방에서 일하는 기생 등등등. 이런 직업들은 사극에서 단골로 나오는 직업군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선에는 이보다 더 다양한 직업들이 있었다. 조선의 일반 백성들이 먹고 살기 위해 했던 일들이지만, 당시 신분제 상에선 하찮은 백성들이 하는 일이기에 기억속에서 사라진, 그 누구도 중요하게 보지 않았던, 사극속에서는 만날수조차 없는 그런 직업군을 조명한게 바로 이 책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책에서 알려주는 직업군들을 보다보면, 이상하게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의 문제들의 해결점이 보이기도 하고,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문제들이 생겨났다는 점도 보인다.

관청 소속 여종과 기생은 본연의 업무가 있으므로 사적인 일을 시키면 안된다. 바느질감이 있거든 ‘침비’나 ‘침가’에 맡겨야 한다. p 013

이 구절을 읽으며 문득 한 사건이 떠올랐다. 유퀴즈에 최연소 공무원 합격으로 출연했었던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최연소로 서울시 7급 공무원이 되었으나, 그녀는 스스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대체 왜 그랬을까? 궁금했던 찰나에, 그녀의 업무분장이 인터넷에 떠돌았다. 그 업무분장은 가짜뉴스가 아니었고, 그녀가 몸담고 있던 기관의 홈페이지에 아주 당당하게 쓰여있었던 그녀의 업무분장이었다. 같은 곳에서 일하는 다른 공무원들과는 월등히 다른 업무분장. 심지어 젤 마지막에 있던 업무는 ‘기타 타직원에 속하지 않는 잡무’ 였다.

또 다른 사건도 있었다. 인천의 한 보건소에서는 44세 미만의 여성들에게만, 보건소장의 사무실을 돌아가면서 청소를 하게 하였다. 굳이 44세 미만 여성에게만 시킨 이유가 무엇이냐 물어보니, ‘여성’이 더 깔끔하게 청소를 할 거라 생각해서 그랬다고 한다. 그 보건소에서 일하던 여성 보건소 직원들의 업무는, 지자체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건강에 대한 각종 일을 하는 것일텐데, 전혀 다른 보건소장 사무실 청소라. 이 역시 기타 잡무를 시키고 있었던거다.

오백년전 조선은 관청 소속 여종에게 분담된 외의 일은 시키지 않았는데, 오백년 후 현재의 관공서는 직원들을 대함에 있어 조선보다 나은게 무엇인가?

망나니의 행패는 이뿐이 아니었다. 명절이 다가오면 떼 지어 시장에 나타나 물건을 빼앗고 돈을 갈취했다. 쌀가게에 들어가서 큰 바가지로 쌀을 마구 퍼갔다. 주인은 감히 막지 못하고 손님은 더럽다며 가버렸다. 원성이 높아지자 보다 못한 원님이 나섰다. p 045

우리는 흔히 패악질을 하는 사람들을 빗대어 ‘망나니’라고 칭한다. 하지만 망나니라는 이름은, 과거 사형수의 사형을 집행하던 직업군의 이름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모두가 기피하는 일인데, 그 일을 대신 처리해주는 망나니라는 직업이, 왜 지금은 불량한 사람들을 빗대어서 말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을까 싶었는데, 이거 참. 이게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부 망나니들은 사형을 집행하기 전, 사형수 가족들이 뇌물을 주면, 사형수가 단칼에(고통없이!!) 갈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지만, 뇌물을 주지 않는 사형수들은 일부러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가게끔 한다고 한다. 음, 여기서부터 음.... 뭐, 지금도 LH사태다 뭐다 하면서, 공공기관에서조차 뇌물, 비리가 판치는데, 망나니의 저 정도 비리 쯤이야. 지금에 비하면 새발의 피가 아닌가 싶은 생각에 넘어가려 하였으나, 이거 참. 망나니들은 사형집행이 아닌 일반적인 상황에서, 시장에 나타나 패악질을 부리는 경우가 많았나보다. 얼마나 패악질을 많이 부렸으면, 지금에 와서까지 ‘망나니’라는 말이, 패악질을 부리는 사람들을 빗대어 말하는 용어로 남아겠는가.

망나니라는 직업은 사라졌으나, 패악질을 부리는 그들의 행태만은 예나지금이나 똑같아서 ‘망나니’라는 단어가 살아남았으니, 참 신기할 일이다.

월천꾼은 섭수꾼이라고도 한다. 길손을 등에 업거나 목말을 태우고 시내를 건네준 뒤 품삯을 받았다. p 070

월천꾼은 조선과 중국, 일본에서도 널리 활용된 서민들의 발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고객이 물에 빠지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 한 기록에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종을 부리는 이들은 종에게 업혔으며, 위낙 흔한 일꾼을 특별히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p 073

가마꾼도 알고 뱃사공도 알고 인력거꾼도 아는데, ‘월천꾼’은 정말 초면이다.

손님을 목이나 등에 태우고 냇가를 건너는 사람들을 월천꾼이라 한다. 심지어 월천을 그대로 한자로 옮겨보면 ‘越川 : 냇가를 건너다’ 이니, 그들은 조선 사람들의 발을 대신 했던것이다. 근데 정말 아무리봐도 새로운 직업이다. 왜 나는 이런 직업군을 처음 들어봤을까? 싶었는데, 책에 그 답이 있었다.

월천꾼들에게는 특별한 사고가 있지 않는 한 기록에 남을 일이 없었다고.

기록이 없다는 건 그만큼 사고가 없다는 이야기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하지만 그럼에도 기록에 없다는 건, 그런 직업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조차도 알수 없게 하니 안타깝기도 하다. 분명 그 시공간에, 그들은 조선 사람들의 발이 되어가며, 냇가를 건넜을텐데도 말이다.

산삼이 많은 곳은 평안도와 함경도의 국경지대다. 국경을 넘으면 더 많지만 발각되면 사형이다. 몰래 잠입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중국 심마니다. 선단을 이루어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와 산삼을 캤는데 그 수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총과 활로 무장하고 수십 명씩 떼 지어 다녔다. 사냥을 겸한다는 핑계였지만 조선군과 전투를 벌이거나 민가를 약탈하는 일도 서슴치 않았으니 산적이나 다름없었다. p 076

조선의 삼이 유명하고, 조선의 삼이 중국에서 비싸게 팔렸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었다. 다만, 내가 배운건 산삼이 아니라 인삼, 그리고 인삼을 파는 ‘개성인삼 상인’ 정도 였다. 산삼이나 산삼을 캐는 심마니에 대해서는 뭐 크게 배운적도 없고, 생각해본적도 없었다. 그렇게 잊혀질뻔한 심마니이 삶이 이 책에서 되살아났다. 그런데! 그 내용에 우리가 사는 동 시대에, 우리가 보는 뉴스에서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내용들이 있는게 아닌가.

매해 봄이나 가을철이 되면 꼭 뉴스를 장식하는 사건들이 있다. 중국 어선들이 우리나라 서해안에 나타나, 무차별적으로 어업을 하고, 심지어는 그것을 제지하는 우리나라 해경들에게 작살질까지 하는 그런 사건 말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조선시대에도 일어났었다는 것, 차이점이 있다면 현재 사건의 주 무대가 바다라면, 조선시대의 사건은 산이라는 것 정도?

매년 우리나라 어장을 침범하는 것도 그렇고, 매년 미세먼지를 미친들이 보내는 것도 그렇고, 심지어 코로나19로 전 세계를 초토화 만든 것도 그렇고. 진짜 중국놈들은 얘나지금이나 ‘짱깨’라고 불릴짓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구나. 좋게 볼래야 좋게 볼 수가 없네.

매골승의 업무가 급증하는 시기는 기근과 역병, 전쟁이 일어날 때다. 기근과 역병은 늘 함께 오는 친구였다. 기근이 발생하면 굶주린 이들은 희멀건 죽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는 도성으로 몰려든다. 그러나 오랫동안 굶어 약해진 데다 먼 길을 걷느라 힘이 빠져 죽은 사람이 많은 탓에 도성과 그 근방에 시신이 쌓인다. 이들은 십중팔구 병을 앓았으니, 그로 인하여 역병도 창궐했던 것이다. p 084

세종 때 창설된 금화도감은 성문의 관리 업무를 추가로 맡아 수성금화사로 개편된다. 그러나 얼마 못 가 필요 없는 비용과 인원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혁파되고 소방 업무는 한성부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1467년에 발생한 화재로 금화군을 50인으로 늘렸고, 1481년에 다시 대규모 화재가 발생하자 금화도감의 재설치를 논의했지만 후속조치는 없었다. p 095

이 책에서 내가 제일 놀랐던 직업은 바로 ‘매골승’이다.

간혹 TV 사극을 보면 이런 장면들이 나온다. 외세가 침략하여 백성들이 죽어나가거나, 이미 죽어있는 모습. 역병이 돌아 백성들이 죽어나가거나, 죽어있는 모습. 대 기근이 돌아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나가거나, 죽어있는 모습. 이런 장면들의 공통점은 카메라가 비추는 마을, 거리마다 시체들이 즐비해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신기한 사실은 그 시신을 치우는 사람들이 하나 없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이후다. 왕실에서 외세를 물리쳤다던지, 구휼미를 풀었다던지, 역병을 고치기 위해 의원들이 나타난다던지 뭐 이런 해결방법들이 나오고, 어느 순간 시신으로 가득찼던 마을에선, 시신은 온데간데 없고 마을이 그렇게 깨끗해질 수가 없다. 정말 신기하지 않은가? 유교가 판치는 그 시절에, 도사가 나와서 도술을 부렸을리는 없을테고. 시신을 치우는 사람들은 없었는데, 어느 순간에 시신들은 싹 사라지고 깨끗한 마을이 나온다는 사실이.

전쟁, 역병, 기근등을 이유로 갑작스레 죽어가는 사람들이 급증했을때, 그 시신을 치우는 사람들. 그들은 분명히 있었다. 다만, 그들에 대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에 TV 사극에서 비춰지지 않았던 것이고, TV 사극에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몰랐을 뿐이다. 시신을 치우는 사람들, 그들은 ‘매골승’이었다. ‘매골승’, 그들은 승려였다.

왜 이들은 알려지지 않았을까? 그들이 시신들을 치우는 행위는, 땅을 정화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공기를 정화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행적은 그 누구도 보여주지 않았으며, 알려주지 않았고, 밝혀주지도 않았다. 그들이 하는 일이, 양반네들 입장에서는 더러운 일이라 치부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유교사상이 팽배한 조선에서,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불교를 믿는 승려였기 때문일까? 이유가 어떠하든, 매골승이 하던 일은 아무나 할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했던 일은 누가 뭐래도 숭고한 일이 틀림없다. 어쩌면 승려였기에 가능했을 일일지도 모른다.

이 책으로 하여금 매골승을 비롯하여, 우리가 몰랐던 하지만, 일상에 꼭 필요했던 수 많은 직업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거기다 더 슬픈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사람들이 직업에 귀천을 따지는 이유는 이미 옛날부터 그런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런 인식 때문에 이렇게 많은 직업들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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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도시 에도의 탄생 - 도쿠가와 가문은 어떻게 원예로 한 시대를 지배했는가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조홍민 옮김 / 글항아리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식물에 빠져, 키우고 죽이고 한지 벌써 반년. 난 아직도 ‘초보’ 식집사다. 언제고 초보 딱지를 떼보나, 하는 생각에 심심하면 하나 둘 읽은 식물관련 책. 오늘 읽은 책은 식물 가드닝이라기보단, 식물의 ‘역사’에 대한 책이다. 정확히는 일본의 가드닝 역사라고나 할까?


「식물도시 에도의 탄생」.

제목만으로도 이 책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에도시대, 그러니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이 된 그때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도쿄(에도)는 식물 친화적인 도시로 구성되었다는 뭐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내 이런 추측은 한 90%정도 맞았다. 이유인 즉, 이 책은 에도시대만 이야기 하는게 아니라, 에도시대 바로 전 센고쿠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까지 아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략하게 보는 일본사 흐름

센고쿠 시대(전국 다이묘들이 들고 일어남) → 아즈치(오다 노부나가)/모모야마 시대(도요토미 히데요시) → 에도시대(도쿠가와 이에야스)

지금의 번화한 도시 도쿄, 그 시작은 ‘쌀’ 수확량을 높이기 위해 조성된 에도평야가 시작이었다.

센고쿠 시대의 무장들은 왜 이렇게 열심히 논 만들기를 장려했던 것일가. 이는 결코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쌀’은 ‘화폐’나 마찬가지였다. 센고쿠 시대 다이묘에게 영지 내에 논이 있다는 것은 경제력을 갖춘 것을 의미하며, 이는 군사력으로 직결되었다. 지금으로치면, 쌀 생산이 가능한 논을 만드는 것은 ‘돈’을 찍어내는 것과 마찬거지 였기 때문에(중략). p 041

작금의 도쿄는 드넓은 도쿄 평야를 가지고 있다. 그 평야 위에 지금과같은 번화한 도시 도쿄가 생겨났고, 그 평야 위에서 넓디 넓은 논농사가 행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 평야가 옛날부터 생겨난게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일본사를 공부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많이들 모르는 사실이다.

과거 일본의 수도는 일왕이 살던 교토였고, 제일 번화한 도시 역시 교토였다. 이후 군사정권인 막부가 들어섰을 때에도 주요 도시는 역시나 교토였다. 반면 교토와 반대편에 있는 에도(도쿄)는, 교토와 멀리 떨어진 만큼 번화하지 못하였고, 틈만나면 수해가 일어나는, 사람이 살기 어려운 척박한 땅이었다. 그런 땅을 지금의 광활한 평야로 만든 사람이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당대에 ‘쌀’은 화폐와 다름 없었다. 따라서 자신의 영지에 논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다이묘의 위치가 달라졌다. 하지만 에도에는 논다운 논이 없었다. 하지만 그 곳에 터를 잡을 수 밖에 없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로써는, 에도 개발이 어쩔수 없는 숙명과 같았다. 그렇게 에도 개발에 착수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결국엔 에도땅에 일본에서 제일가는 평야를 만들었다. 얼마나 제대로 만들어놨으면, 본인이 정권을 잡은 뒤에 교토로 이주하지 않고 계속 에도에 남아있었을까(도쿠가와 이전까지는 교토에서 정치를 하는게 당연했다).

거기다 도쿠가와가 정권을 다스린 후 부터는 일본 내에 전투가 사라져서, 더더욱 논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에도에는 계속 논이 늘어나고, 논이 늘어났다는건 평야가 늘어났다는 이야기고, 그렇게 에도는 돈이 돌고도는 부자도시가 되고, 그 부와 평야를 기반으로 현재의 도쿄 도심이 탄생되었다는 이야기!

뭐, 여기까지가 현재 도쿄가 번화할 수 있게된 역사적인 흐름이라고나 할까?

일본 성 내에 소나무가 많이 심긴 이유는?

소나무는 수지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소나무 껍질을 벗기면 속에 하얗고 얇은 껍질이 있다. 이 얇은 껍질은 지방분과 단백질을 함유하고 있다. 이 껍질을 절구로 찧은 뒤 물에 담가 쓴맛을 빼고, 말려서 가루로 만든다. 이것에 쌀을 더해서 떡으로 만드니, 바로 송기떡이다. p 057

일본 성을 볼때마다 항상 궁금했던 사실 하나, 왜 일본 성에는 소나무가 많을까? 였다. 직접 가서 본 것도 그렇고, 일본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에서도 그렇고 꼭 일본 성 내에는 소나무가 즐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왠걸? 소나무가 군사용 비상식량이었다고 한다.

일본은 전투가 시작되면 성 하나를 둘러싸고 공성전이 벌어진다(뭐 어느 나라든 그렇지만). 공성전을 하게 되면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밖의 보급물자가 차단되기 때문에 식량의 유무가 전투의 승패를 좌우한다고도 할 수 있다. 보통은 성 내에 전투를 대비한 비상식량을 구비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지 몰라서, 정말 완전 비상사태를 위해 준비한 비상식량이 바로 소나무였던 것이다.

근데 더 놀라운 사실은 소나무를 식량으로 쓴 나라는 일본만이 아니라는 점!

이 책에 있는 내용은 아니나, 과거 우리나라 사람들도 임진/정유재란 당시 굶주린 백성들이 송기떡을 해먹었다고 한다. 어라, 가만히 보니 시기가 임진/정유재란?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을 그 때다. 그러니까 도요토미가 정권을 잡고 있던 시절이다. 음... 그럼 송기떡은 조선을 침략한 일본 병사들을 통해 건너온건가? 왠지 시기를 보니, 그런 느낌이 아주 강하게 든다......

닌자가 쓰는 화약의 정체는 쑥?

(생략) 그렇다면 닌자는 어떻게 화약을 만들었을까. 사실은 식물 쑥을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석은 질산칼륨의 결정이다. 그래서 닌자는 쑥에 오줌을 뿌려 흙 속에 묻었다. 그렇게 비생물을 발효시킨다. 오줌 속의 암모니아와 쑥에 많이 함유되어 있는 칼륨을 반응시켜 질산칼륨을 만들었던 것이다. p 075

닌자가 사용한 화약이 쑥이라니!!!!!

적잖은 쇼크를 받은 부분이다. 뭔가 화약이 아니라 쑥을 사용한다는 대목에서, 범접할 수 없던 닌자가 친숙한 존재가 되었다. 아니 뭐 생각해보면 그렇다. 당시 일본은 화약을 만들 수 있는 초석이 없었고, 화약을 쓰려면 외국에서 수입을 했어야했으며, 수입한 화약은 부르는게 돈이었다. 거기다 화약에 일본에 수입된 건 끽해야 오다 노부나가 즈음의 시기인데, 닌자의 활동은 훨씬 전 부터 있었을 테니.

고로 닌자는 화약을 직접 만들어야 했고, 그 화약의 재료는 일본땅에서 나는 재료여만 했다. 아니 근데 성분들을 어떻게 알고, 저렇게 조합했을까. 닌자들은 진면모는 닌자가 아니라, 화학자였을까?

오다 노부나가가 사랑했던 꽃

뜻밖에도 노부나가가 사랑했던 것은 옥수수 꽃이었다고 한다. (중략) 옥수수 꽃은 어떤 꽃일까. 그나저나 옥수수에 꽃이 피기나 할까. p 112

우선 옥수수에 꽃이 있다는 사실에 1차 놀랐다. 아니 근데 생각해보면, 우리가 먹는 옥수수라는 열매가 맺힐려면, 먼저 꽃이 피어야하긴 할테니, 꽃이 있는게 당연한건데도, 옥수수꽃을 본적이 없어서 ...그래서 놀랐다.

알고보니 옥수수에는 암꽃과 수꽃이 따로 핀다고 한다. 옥수수 암꽃은 꽃잎이 달려있지는 않으나, 긴 암술을 늘어뜨린다. 흔히들 말하는 옥수수 수염이 바로 옥수수 암꽃이라 보면 된다. 이 암꽃의 암술에 수꽃의 꽃가루가 날라와 부비부비하면, 그제서야 우리가 아는 옥수수가 생긴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암술의 수염 하나하나가 옥수수 한 알 한 알과 이어져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2차 놀랐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일본에 옥수수가 들어왔을 때, 옥수수는 식용이 아니라 관상용(!!!) 작물이었다고 한다(옥수수의 맛을 몰랐던 과거의 일본인들, 가엾구려).

난 처음에 오다가 옥수수꽃을 좋아했다길래, 옥수수수염 각각이 옥수수 한알과 이어져있어서, 백성들의 굶주림을 달래주는 작황식물이라 좋아한 줄 알았는데 하하하. 옥수수가 관상용이었다니, 하 정말 충격적이다. 대체 왜 관상용이었을까 싶었는데, 옥수수수염이 갈색의 비단실과 같아서, 그래서 관상용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다는 화려한 비단실을 품은 옥수수꽃을 좋아했다는 것. 허허허. 그럼 그렇지.

일본인은 왜 벚꽃을 좋아할까?

‘사쿠라’의 ‘쿠라’는 ‘신령이 나타날 때 그 매게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벚나무는 밭의 신이 내려오는 나무다. 즉 논농사가 시작되는 봄이 되면 밭의 신이 산에서 내려와 아름다운 벚꽃을 피운다고 생각한 것이다. p 151

농민에게 멎꽃은 농업의 시작을 알리는 나무이지만 산에 피는 산벚나무는 나무에 따라 개화시기가 다르다. 그 때문에 벚꽃은 ‘씨 뿌릴 때’를 알리는 벚꽃으로 불리며 마을의 특별한 상징이 되었다. p 159

일본어를 꽤 하는 나이지만, ‘쿠라’라는 단어에 저런 뜻이 있는지 처음 알았다. 심지어 일본 신화 관련해서도 다큐나 책을 꽤 봤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처음 듣는 의미의 단어였다. 이렇게 또 하나의 일본어를 습득. 하, 역시 배움엔 끝이 없군!

그러니까 결국 일본은 옛날부터, 농사의 신이 벗나무에 깃들어 꽃을 피우기 때문에, 그 벚꽃이 필때가 ‘씨 뿌릴 때’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벚꽃을 좋아했다는 이야기. 역시 농사를 짓는 나라는 이렇게 관련된 이야기가 없을 리가 없다. 우리나라만 해도 세시풍속의 대부분이, 농사와 관련되어 만들어진 날이기도 하니 말이다.

에도(도쿄) 강가에 벚꽃이 많은 이유는?

습지를 매워 만든 도시 에도에는 많은 하천이 흘러, 하천 범람으로 인한 수해가 자주 일어났다. 수해를 막기 위해서는 튼튼한 호인을 만들어야 했는데, 벚나무를 심으면 그 뿌리가 자라 둑이 튼튼해진다. 게다가 벚꽃놀이를 위해 강가를 찾는 사람들이 흙을 밟음으로써 둑은 더 탄탄해진다. 이렇게 사람을 모으기 위해 제방에 벚나무를 심은 것이다. p 160

그렇게 논농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벚나무가, 뿌리도 탄탄해서 수해까지 막아준다. 거기다 꽃이 이쁘니, 사람들이 와서 구경도 한다. 즉 일본에서 벚꽃은 농사를 도와주고, 수해도 막아주고, 관광객도 불러와 관광수익까지 불러오는 1석 3조의 친구인셈!

이러니 일본 사람들이 벚꽃을 좋아할 수 밖에.... 이정도면 벚꽃사랑이 DNA에 각인되어 있을지도?

벚꽃의 퇴색

‘꽃은 벚꽃, 사람은 무사’란 말이 유행했던 무사의 시대에 벚꽃은 이렇듯 아름답게 지지는 않았다. 질 때가 너무나도 선연한 왕벚나무의 이미지는 비참한 군국주의 시대의 와중에 ‘죽음의 미학’을 필요 이상으로 조장해버렸다.

“피는 꽃이라면 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 멋지게 지자, 나라를 위해.”

이 군가의 가사처럼 깨끗하게 죽는 것을 미화한 가치관은 일제히 피고 한꺼번에 지는 왕벚나무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p 165

그런데.. 그렇게 사랑받던 벚꽃을, 일본인 스스로 그 의미를 퇴색시켜 버렸다.

한때 제국을 표방하며,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아시아 주변국가를 침략한 일본은 자국민들이 사랑하는 ‘벚꽃’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병사들을 벚꽃에 빗대어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어가는 것를 미화시켰다. 그렇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되었다. 지네나라 국민들도 그랬겠지만, 강제 징병된 가엾은 우리나라 사람들도 희생양이 되었다는 건 두말하면 입아프다.

내가 언급한 부분은 이 책의 빙산의 일각일 뿐. 실로 방대한 내용이 책이 실려있다. 오다 노부나가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개인의 약초원이 있었다던가. 전투가 사라진 뒤, 할 일이 사라진 무사들이 찾아낸 또 다른 직업이 원예사라던가 뭐. 그런거? 이렇게 읽고 보니, 새삼 우리나라 관련된 식물 역사책은 왜 없는가 싶어지기도 하고.....아니면 있는데 내가 모르는건가 싶고 ㅠㅠㅠ

뭐 여튼! 간만에 읽은 꽤 흥미로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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