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허영선 지음 / 서해문집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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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그곳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 하나 없는 우리나라 남단에 있는 섬이다. 한때는 신혼여행지로 각광받았었고, 또 한때는 수학여행지로 각광받았으며, 지금은 언제 어느때든 힐링을 위해 훌쩍 떠날 수 있는 여행지이기도 하다. 본토와는 다른, 이국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는 제주도.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그 제주도가 70년 전, 경찰 눈에 띄었다 하면 그저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섬 전체가 피비릿내 나는 학살터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난 제주여행을 계획할 때마다, 제주 4.3 사건 유적지를 꼭 찾아다닌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건 아니었다. 시작은 그저 역사여행이었다. 원래 내 모든 여행의 목적은 역사여행이었기에, 역사유적지를 즐겨 찾아다녔던거다. 다만 내가 찾아다니는 시기의 역사는 대게 고대에서 중세까지. 근/현대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나라 근/현대 역사는 어둡고 아프기만 한 역사였으니까. 근/현대 역사는 문자로만 봐도 분노에 치미는데, 그 장소를 찾아가게 된다면, 내 감정이 어떨지 두렵기도 했다.

그러다가 한 3년전쯤인가? 본격적으로 마음을 다잡고 근/현대 역사유적지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중 크게 나눈다면 일제강점기 관련 유적지, 광주 5.18 유적지, 제주 4.3 유적지 정도랄까. 그래서 그때부터 제주를 방문할 때마다 4.3 유적지를 찾아다녔다. 어떤 곳은 정비가 잘 되어있는 곳도 있었고, 또 어떤 곳은 차로는 진입하기가 어려운 곳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찾아다녔다. 나 한사람이라도 그 장소를 기억하고, 그 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한다면, 그 곳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지는 않을까 싶어서다.

뭐,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제주 4.3과 관련된 책을 읽어 보았다. 관련 역사 유적지에서 나눠준 책자나 안내판으로 짤막하게 읽었던 제주 4.3을, 보다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마음이었달까?

제주 4.3 속으로

※책 속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제주 4.3의 역사는 본토의 역사와도 연결됩니다. 해방 후, 미군정이 다스리던 시기의 미곡수집령은 제주와 본토가 동일했고, 남한 단독선거 반대를 했던 사람들은 제주 뿐만 아니라 본토에도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전후로 이승만이 실시한 예비검속 역시 제주 뿐만 아니라 본토에서도 자행되었습니다(본토 곳곳에도 예비검속 당시 학살터가 남아있습니다). 다만 제주는 고립된 섬이었기에, 본토보다 더 제제가 강했고, 그 결과과 섬 전반에 걸친 대 학살이었습니다.

제주 4.3의 시작

“쌀과 자유를 달라!” 식량 부족으로 위협을 받고 있는, 생존의 늪에 빠진 도민들의 거친 숨결이 흘러나온다. 1946년이 저물고, 해가 바뀌어도 도민들의 삶은 무겁기만 하였다. 어떤 때는 배급 받은 밀가루가 질이 좋지 않는 데다 비료나 석유, 석탄분 등이 섞여 있어 이것을 식량으로 먹은 주민들이 구토를 하여 배급을 중지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고개넘어 또다시 보릿고개, 밀기울까지도 구하기 힘들었다. 제주도는 이제 거의 빈사상태, 실오라기만 한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p 040

1945년 해방이 찾아왔다. 일본에 끌려갔던 수많은 사람들이 대거 조선땅으로 귀환했다. 제주도도 그랬다. 일본에 끌려갔던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제주도로 돌아왔다. 드디어 일제가 물러간, 우리 땅에서 살아보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일제가 물러간 자리에는 미군정이 들어앉았다. 그래, 미군정이라고 하더라도, 일제처럼만 아니라면, 사람대우 해주고 먹고살길 마련해준다면 상관없었다. 하지만, 미군정은 그러지 않았다.

미군정은 불안한 정국을 안정시킨다는 이유로 경찰, 행정 그 모든 자리에, 일제시대에 일본에 충성했던 친일파들을 그대로 앉혔다. 거기다 미군정은 미곡수집령을 시작했다. 일제의 쌀 공출과 다름없는 행태였다. 당시 제주는 일본에서 돌아온 도민들이 급증하여, 쌀 소모량이 급등하였는데, 업친데 덥친격으로 미군정은 쌀, 보리를 공출하기 시작한 것이다(본토포함). 그렇게 제주에는 대기근이 돌았다. 제주도민들은 살기 위해 고구마를 먹고, 돼지사료를 먹었다.

※미곡수집령

미군정은 일제시대를 청산하지 못한 모리꾼들이 쌀을 쟁여두는 바람에 식량난이 발생하자 이를 해결한다며 1946년 봄 ‘미곡수집령’을 발표했다. 더구나 1946년 7,8월엔 보리와 밀처럼 여름에 거두는 곡식까지 내라는, 일제 때도 없던 ‘하곡수집령’까지 내렸다. 이는 농촌의 쌀을 강제로 징수하기 위한것이었고, 헐값으로 사들이는 것이어서 민중의 불만이 컸다. 더구나 일제 시기 공출을 경험했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농민의 원성은 드높았다. p067

그렇게 제주도민들은 대기근속에서 근근히 버텼다. 지금은 미군정이 우리나라를 다스리고 있지만, 얼마 안있으면 제대로된 우리나라 정부가 들어설거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때부터 독립운동을 하고, 해방이후로는 제대로된 우리나라 정부를 만들기 위해 힘쓴 김구가 있었고, 여운형이 있었다. 그렇기에 버틸수 있었다.

하지만..

드디어 1947년 3월 1일 오전 11시,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역사적인 3.1절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 기념식에서 안세훈은 “3.1혁명 정신을 계승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의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자”고 외쳤다. 이어 각계 대표들이 나와 발언을 하면서 대회는 후끈 달아올랐다. 그도 그럴것이 이날 행사는 서울처럼 좌,우익 진영 두개로 나눠 진행되지 않고, 하나로 이뤄졌지. p 049

그때였다. 말을 탄 경관의 말발굽에 한 어린아이가 채어 쓰러진 것은. 그런데도 기마 경관은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유유히 가려했다. 성난 군중은 “저놈 잡아라” 쫒아갔고, 당황간 경관은 군중에 쫓기며 관덕정 옆 경찰서 쪽으로 말을 몰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관덕정이 날아갈 듯한 총성과 함께 구경하던 6명의 주민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자리에 쓰러졌고, 8명은 중상을 입었다. 이들은 제주 4.3의 첫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p 050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한반도는 그 기쁨도 만끽할 틈도 없이 좌,우익이 나뉘어 대립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오죽하면 3.1만세운동 기념행사를 좌,우익 진영이 각기 따로 진행을 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제주도는 달랐다. 섬 주민이라는 공동체의식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제주도는 1947년 3.1 만세운동 기념행사도 좌,우익이 함께 진행한 것이다. 누가봐도 평화로운 그 행사장에 미군정은 경찰들을 배치했다. 이유는, 제주도민들이 외치는 한 목소리가 “외세타도” 였기 때문에.

미군정은 어디까지나 외세였고, 그들 스스로도 그걸 잘 알았나보다. 행여나 제주도민들이 봉기라도 할까, 지레 겁먹고 대규모의 경찰들을 그 곳에 배치했다. 뭐든지 과하면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미군정이 배치한 대규모의 경찰들, 그들이 그곳에서 대형사고를 일으킨다. 그 곳에 있던 기마경찰이 기념행사를 잘 보고 있던 한 어린아이를 말발굽으로 치고, 그대로 뺑소니를 친 것이다. 이를 목격한 제주도민들이 항의하니, 오히려 그대로 경찰서로 도주. 방귀뀐 놈이 성낸다고, 미군정은 그 자리에서 제주도민들을 향해 총을 쏴댔고, 그자리에서 제주도민 5명이 죽었다. 그 중에는 초등학생도 있었다.

미군정과 경찰들은 이 날의 사건을 본인들의 과실이 아니라했다. 제주도민들은 분노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굳게 입을 닫았다. 진상규명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군정은 이 날의 사건을 제주도가 빨갱이 섬이라서, 폭도들이 일으킨 사태라고 규정해버렸다. 그날 이후부터 제주도는 빨갱이 섬이 되었다.

3.1사건 직후부터 제주도에 내려오기 시작한 서북청년회. ‘서북’이라 쓰인 완장을 찬 이들은 자금 모금을 한다는 구실로 태극기나 이승만 사진 등을 주민들에게 강매하기도 햇다. 1947년 말부터는 경찰과 행정기관, 교육계에 근무하는 서청 단원이 늘어났고, ‘좌익 척결’이란 이름 아래 서청에 의한 테러가 곳곳에서 발생했다. p 061

제주를 빨갱이 섬이라 규정한 미군정. 그들은 본토에서 수 많은 인력들을 제주로 보냈다. 그 중에는 ‘서북청년단(이하 서청)’이라는 단체도 있었다. 이들은 이승만을 지지하는, 우익단체였다. 그들 뒤에는 당연히 이승만이 있었다. 이승만은 이들을 이용해 좌익세력들을 탄압했는데, 제주 역시 그 좌익세력에 포함된 빨갱이 섬이었던 것이다. 다만, 여기서 문제가 있다면, 미군정 및 이승만 세력은 서청을 좌익세력 탄압에 이용했으나, 그들에게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지는 않았다. 해서, 제주에 온 서청은 말 그대로 좌익세력을 탄압하면서, 그에 응당하는 댓가를 얻기 위해, 본인들의 생활비를 얻어내기 위해 약탈을 자행했다.

그렇게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는 서청단원들은 어느새 제주에서 하나, 둘 씩 요직을 차지하게 된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이 불을 켜고 있었다. 어미 같은 한라가 품고 있었던 오름들, 볼록볼록 꾸물거리는 듯한 그 봉우리마다 일제히 벌건 불이 올라왔다. 타오르든 불들은 한참 후에야 서서히 사라졌다. 그들은 밤새 그 시간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것은 소위 산으로 간 무장대가 피워 올리는 불, 봉화였다. 남로당 제주도 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었다. 봉화신호가 떨어지자 무장대는 공격을 시작했다. 도내 24개 경찰 지서 가운데 12개 지서, 서북청년회 숙소 등 우익 단체 요인의 집과 사무실이 표적이었다. p 074

“탄압이면 항쟁이다!”,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을 결사적으로 반대한다!”, “반미구국투쟁에 나서자!” 이 것이 두 성명의 요지였다. ‘반쪽 조국은 안된다’는, 통일조국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깔고 있었다. 그러니까 통일 정부로 가야한다는 것이 4.3의 구호였다. 셋째는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미군정에 댛나 저항, ‘반미투쟁’이라는 정치적인 색채를 분명히 표출하고 있었다. p 076

제주4.3사건이라는 명칭을 얻게된, 바로 그날.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 있던 남로당 세력들이 한라산에 봉화를 피웠다. 서청이 극우세력이라면, 남로당은 좌익세력이었다. 이 소수의 ‘남로당’, 그들은 분명 우리가 혹은 책에서 흔히 말하는 빨갱이라 말하는 그런 세력이 맞다. 하지만, 잘 알아야 한다. 해방이전까지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좌익사상을 가진 분들도 있었고, 우익사상을 가진 분들도 있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좌익은, 지금의 북한 같은 독재공산주의가 아니라는 점이다.

당시 한반도 남쪽은 미국이 차지하고, 북쪽은 소련이 차지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라는 사상을 내세운 반면, 소련은 사회주의 사상을 내세웠다. 양 국가 모두 한반도에 자기들 입맛에 맞는 정부가 세워지길 바랐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저 남과 북이 통일된 정부를 원했을 뿐이다. 이건 남로당 뿐만이 아니었다. 미국의 뒷배를 믿는 이승만을 비롯한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김구 선생이나 김규식, 여운형 선생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국민들이 통일 정부를 원했다. 하지만 그 바람이 무색하게,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두고 저울질을 했고, 그렇게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수순에 들어갔다.

본토와 제주 모두에서 단독정부를 반대했지만, 제주도는 유독 극명하게 단독정부를 반대했다. 그래서 5월 10일에 치뤄질 단독선거도 역시나 반대했다.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움직이던 미군정은 이런 제주도를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그래서 마련한 대책이 바로 ‘오라리 방화사건’이다. 무장대가 제주도의 한 마을을 방화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경찰의 자작극이었던 그 사건 말이다. 이 자작극으로 미군정 이하 경찰들은 제주에 대한 탄압에 박차를 가한다.

아무튼 이 ‘오라리 방화사건(1948년 5월 1일)’에 대해 김익렬 연대장은 경찰의 후원아래 일어난 서청, 대청 등 우익청년 단체들이 저지른 방화라고 미군정에 보고했지. 그러나 김익렬의 보고는 철저히 묵살당한다. 경찰측에서는 무장대의 행위라고 주장했다. p 080

나중에 이 괴한들은 경찰서 소속이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경찰에선 이 사건을 경찰을 가장한 무장대의 기습 사건이라고 주장했지. 끝내 이날 미군이 경비대에게 총공격을 명령하면서 협상은 깨졌다. 이후 제주도는 걷잡을 수 없는 유혈사태로 치닫게 된다. p 081

그렇게 무자비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는 5.10단독선거를 거부했다. 제주도는 전국 유일하게 단독선거를 거부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았다. 선거를 거부한 모든 제주도민들은 분단되지 않은 조국을 원했을 뿐이었고, 그걸 실행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미군정은 단독선거를 거부한 제주도를 향하여 더 심한 탄압으로 맞섰다. 물론 그 이유는 어디까지나 단 하나, 무장대&빨갱이 색출.

5.6월 보리농사를 짓던 조천리 한 여인은 토벌대가 올라오는 것에 겁이 나 보리밭에 숨다가 경찰에 들켜 총을 맞아 죽었고, 짚신 삼던 어떤 농부는 총소리와 함께 군인들이 집으로 들이닥치자 도망가려다 붙잡혀 희상당하는 등 까닭 없이 애꿎은 죽음이 이어졌다. p 092

제주는 단독선거를 거부한 대가로 더 잔혹한 탄압, 학살을 당했다. 그저 밭에 일하러 나갔을 뿐인데, 어린 아이를 데리러 갔을 뿐인데, 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을 뿐인데…. 모두 경찰과 군인, 토벌대의 손에 죽었다. 빨갱이라고 죽였고, 무장대를 도와줄 것 같다고 죽였고, 그저 거슬린다고 죽였다. 쉽게 말하면 그냥 아무 이유없이 죽인 것이다.

이 기간에 정부는 보도 금지, 언론의 입을 막아버렸다. 군인과 경찰에 의한 학살을 절대 보도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공보부는 언론사에 무장대의 행위에 대한 논평이나 민간인 무차별 학살에 대한 동정어린 표현도 쓸수 없도록 했다. p 124

하지만 본토에서는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중요한 5.10 총선거를 앞두고, 이런 대 학살극이 본토에 알려지면 안되었다. 본토는 그렇게 보지도, 듣지도 못한채 단독선거가 진행되었고, 대한민국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렇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남과 북이 분단되었다. 그렇게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뭐, 분단이든 뭐든 말그대로 우리나라 정부가 들어섰으니, 제주도에는 평화가 찾아왔을까?

1948년 10월 경비대총사령부는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신설, 토벌작전을더욱 강화했다. 사령관에는 제5여단장인 김상겸 대령.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이 붙들려 갔고, 사람들이 사라졌다. 섬은 학살터, 비명의 공간으로 휘청대고 있었다. p 098

낮에는 토벌대 세상, 밤엔 무장대 세상, 무장대가 습격했다 가면, 토벌대가 들이닥치고, 토벌대가 가고 난 마을에 무장대가 들이닥쳤으니 오도 가도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이제나저제나 죽고 죽임의 사태가 끝나기만을 가슴졸이며 기다렸던 사람들이었다. 어느 마을에서는 어머니가 토벌대에게 죽음을 당한 사흘 후 아들이 무장대에게 희생당하는 비극도 생겨났다. 어느 마을에서는 아버지가 토벌대에게, 아들은 무장대에게 희생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희생을 가져온 때는 1948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약 6개월간. 군경 토벌대는 무장대의 피난처와 물자 공급원을 제거한다는 구실로 중산간 마을을 모두 불바다로 만들어버렸다. p 111

중산간 마을인 중문면 영남마을. 땅이 좋아 조 이삭이 어린아이 팔뚝만 하고, 고구마를 심어도 사람 머리만큼 자란다던 이 마을엔 16가구에 90여 명이 살았으나 미처 피신하지 못한 50여 명이 희생당했다. 마을은 사라졌다. p 115

대한민국 정부는 수립되었지만, 제주에는 여전히 학살이 지속되고 있었다. 더 강하게, 더 잔혹하게. 제주도는 대한민국에 속한 땅이며, 제주도민들은 대한민국이 지켜야할 국민들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게 제주는 빨갱이 섬이었다. 제주에는 학살 광풍이 계속 계속 불어닥치고 있었다.

※1948년 10월 17일, 전과에 열을 올리던 송요찬의 포고문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탕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죵료 기간 중 전도 해안선부터 5킬로미터 이외의 지점 및 산악 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해안선으로부터 5킬로 미터 이외의 지역 통제. 즉 해안 마을을 제외한 대부분의 중산간마을이 해당된다. 이 때부터 제주 중산간 마을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었다. 그들이 전개한 초토화 작전 방법은 ‘불태워 없애고, 죽여 없애고, 굶겨 없애는’ 이른바 삼진 작전.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중국을 상대로 써먹던 그 작전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해야할까.

모든 중산간 마을이 불탔다. 그럼 해안가 마을은 안전할까?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제주 해안가 마을 중 곤을동이라는 곳이 있었다. 그 곳은 제주4.3사건때 유일하게 사라진 해안가 마을이다. 한 군인이 무장대가 곤을동으로 숨어들은 것을 보았다고 하여, 곤을동을 불태워버린 것이다. 곤을동의 흔적은, 제주 북쪽 화북동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렇다. 제주 사람들에게 미군정이나 이승만 정부는 일제강점기 보다 더 악독하고 지독하고 참혹한 짐승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제주 초토화 작전을 앞두고 제9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제주로 출동 명령을 받은 제 14연대가 돌연 여수에서 총부리를 돌려 제주도 출병을 거부한 것이다. 이른바 10월 19일의 여순사건 이다. p 100

초대 대통령이라던 사람, 이승만. 그는 제주 초토화 작전을 위해 더더더 군대를 제주에 보낸다. 그렇제 제주로 보내지던 군인들중, 제주 학살에 반대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바로 여수 제14연대. 군인들이 지켜야할 사람들은 자국민인데, 그 자국민에게 총부리를 들이댄다는 것은 그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바로 여순사건.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

4.3진압을 명령받았으나, 그 명령을 거부한 여수 제 14연대 군인들. 그들은 여수와 순천, 광양, 구례 등 남부 지역을 잇달아 장악하며, 주요 정부기관 및 건물을 접수했다. 하지만 정부의 진압작전이 본격화되었고, 이승만은 이른바 공산분자, 불순분자를 철저히 숙청할 것을 지시한다. 이후 사회 각계 모든 분야에서 불순분차 색출 및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되었다. 이후 약 2개월 뒤 이승만은 국가보안법을 제정한다.

이승만은 명령을 거역한 여수 제14연대를 악랄하게 진압하였다. 이후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그 유명한 ‘국가보안법’을 제정한다. 이승만은 이 국가보안법이라는 칼을 휘두르며, 본인만의 독재정권을 만들어갔다. 이승만 사후에도 이 법은 군사정권의 칼이 된다.

1948년 12월, 제주읍에 살던 이**은 집에 있다가 “도망치려고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발이 묶인 채 돼지처럼 매달렸다. 등뼈가 튀어나올정도로 고문이 가해졌다. 그렇게 닷새를 살고 나오자 살아남기 위해 1949년 일본으로 도피했다. 2005년 고향에 돌아와 정착한 그는 그때 고문으로 튀어나온 척추뼈 때문에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리며 산다. 그때의 일을 말하면 고향의 친족에게 누가 미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아예 입을 닫고 유족 신고를 하지 않은 이도 부지기수다. p 128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끌려갔던 수 많은 제주도민들. 해방 후 내 나라 내 땅, 제주로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이들의 눈 앞에 나타난건, 일제강점기보다 더 지독하게 내 이웃을 고문하고 살해하는 대한민국의 군인과 경찰들이었다. 그렇게 제주도민들은 꿈에서조차 치를 떨던 일본으로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언제 어떻게 죽을 지 모르는 제주가 아닌, 적어도 내 한 목숨은 부지할 수 있는 일본으로 말이다. 그렇게 일본으로 밀항하는 제주도민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밀항도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밀항하다 걸리면, 수용소로 끌려가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

일본에 정착하여 살다가, 잠시 가족을 만나러 제주도에 들렀던 사람들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심지어는 일본인이었으나, 일본으로 건너온 제주도 사람과 결혼하여, 시댁을 방문하기 위에 제주도에 왔을 뿐인, 조선어 조차 못하는 일본인 여성도 있었다. 누구는 행방불명 되었고, 누구는 빨갱이 낙인이 찍혀 죽었다.

1949년 1월경 해변 마을 주민들과 중산간 마을에서 해변 마을로 소개당해 온 사람들은 토벌대의 명령에 따라 마을을 빙 둘러가면서 성담 쌓는 일에 나가야 했다. 청년들이 없는 마을, 성담 샇는 일엔 고사리손부터 여인들, 노인들의 주름진 손까지 동원되었다. 제주 읍내 어떤 여인은 성담을 쌓다가 남편의 시체를 보고 놀랐으나 비명조차 삼켜버려야 했다. 눈물을 흘릴 자유란 없었다. p 122

토벌대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토벌대에 감시하에 생활을 해야했다. 토벌대는 그들에게 무장대 침입을 막기 위한 성곽을 쌓게 했고, 그 성곽안에서 가건물(함바집)을 지어, 모두 그 곳에서 살게 했다. 난 그 성곽(낙선동)과 함바집을 직접 가서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이 공간은 이름없는 또 다른 수용소였다는 것을.

토벌대, 그들이 저지른 짓은 학살 뿐만 아니라, 성폭력도 자행했다.

허벅 지고 물 길러 갔다 오다가 붙잡혀 강제 결혼당하기도 했다. 도피자 가족으로 몰린 경우, ‘순경각시’가 되어야 가족과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여인들도 있었다. 남편이 없다는 이유로 지독한 고문이 이어졌고, 임산부에 대한 고문도 무차별적으로 이어졌다. 법이 없던 시절, 여인들은 위험했다. 어떤 마을에서는 때때로 술자리에 불려나갔고, 겁간을 당하기도 했다. p 196

(생략) 남편은 거리에서 붙잡혔고, 산파 대신 와다닥 집으로 들이닥친건 4며의 순경. 다짜고짜 온갖 발길질이 가해졌다.그 피범벅 속에서 아이는 세상에 나왔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끝내 후유증을 앓는다. p 199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면 제일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은 여성이라고 했던가. 제주 4.3사건 때도 여성들은 죽임보다 더 한 고통을 받았다. 토벌대를 만났을 때 그 자리에서 총살을 당해 죽으면 오히려 다행이었다. 토벌대들은 수시로 여성들을 유린했다. 옷을 다 벗게 하는 건 기본이고, 그 상태에서 고문을 가하거나, 강간, 죽음에 달하는 폭행을 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어떤 마을에선 주민들을 전부 모은 뒤 굳이 젊고 이쁜 처자들만 빨갱이라고 대려가기도 했다. 그렇게 끌려간 여성들은 지금까지 행방불명이다. 임산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만삭인 임산부를 죽기 직전까지 폭행하기도 하고, 배를 과녁으로 총질을 하기도 했다.

이게 바로 토벌대가 제주 여성들을 향해 한 짓이다. 일제는 대놓고 ‘위안소’와 ‘위안부’를 만들어 대외적으로 활용했다면, 제주 토벌대는 겉으로 들어내지만 않았을뿐, 일제와 하는 짓이 다를 바가 없었다.

제주 4.3사건 피해자 및 유족들 중에는 이상하리만치 한국전쟁 유공자가 많다.

제주 청년들의 (한국전쟁)군 입대는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양태병은 한국전쟁이 나자 입대를 자원했으나 신체가 약하다고 세 번이나 떨어지자 애원하다시피 해 겨우 군대에 갔다 올 수 있었다. 한국전쟁 때 자원입대했던 한 주민은 “어느 날 갑자기 불려가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죽는 것 보다 전쟁터가 훨씬 안전했다”고 회고했다. p 146

이로써 4.3은 끝난는가. 그랬으면 했다. 그런데도 4.3의 유혈 광풍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유족들에겐 또 다른 아픔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사상을 묻는 죄, ‘연좌제’라는 그물이었다. p 210

제주도에 있는 제주 4.3 평화공원, 그 안에는 기념관이 있다. 그 기념관을 보면서 놀랐던 점 하나가 바로 이거였다. 유독 제주4.3 유족들 중엔 한국전쟁 유공자가 많다는 점. 대체 왜 그랬을까? 자국민을 보호하지 않은 정부였는데, 왜 그정부를 위해서 전쟁터로 자원해서 나섰던걸까? 하고 말이다. 알고보니 그들이 자원해서 전쟁터러 나갔던 이유도, 단 하나였다. 제주라는 섬에 있으면 언제 토벌대에게 학살당할지 모르니, 차라리 전쟁터에 나가서 나라를 지키며 죽는게 낫겠다고. 혹은 이미 빨갱이라는 도장이 찍혀있는 가족들, 내 자식들이라도 거기서 벗어나게 해주기 빨갱이와 싸우는 전쟁터로 나선것이었다.

누군가는 전쟁터로 가는 것이 또 다른 죽음으로 가는 길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제주도민들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였다. 제주 4.3으로 인해 죽는다면 그 집안은 영원히 빨갱이 집안이지만, 한국전쟁에서 전사한다면 그 집안은 원수 빨갱이와 싸우다 죽은 국가유공자 집안이 될 수 있다. 제주에서 한국전쟁은 빨갱이 딱지를 땔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제주 4.3 학살은

제주도 전체에서 일어났다.

제주도의 유명 관광지, 그 곳은 제주 4.3사건 당시 학살터였다.

1948년 12월 18일, 무차별 학살극을 피해 중산간에 은신해 있던 사람들이 대거 희생당한 날이다. (생략) 웅장한 물소리를 내며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국민 관광지 서귀포 정방폭포, 동굴 속에서 숨어 지내던 동광리 마을 주민 등 많은 사람이 굴비 엮이듯 손 묶인 채 아득한 폭포 아래로 갔다. 폭포는 비명을 삼켜버렸다. p 176

1949년 1월, 성산포에 주둔하던 서청특별중대에 성산포 지역 주민들이 고문당하고 취조를 당하다 희생당한다. 성산일출봉 앞 터진목은 성산면 온평, 난산, 수산, 고성 등 인근 망르 주민 수백명이 집단 학살당해 흘린 피로 흘러넘쳤다. p 177

이승만 정권은 인민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자의적인 판단 아래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사람들을 전국적으로 예비검속이란 이름으로 잡아들였다.(생략) 예비검속, 그 회오리 바람은 너무나 큰 학살을 불러왔다. 1950년 7월 말부터 8월 말, 예비검속자에 대한 군 당국의 집단학살이 대대적으로 이뤄진 것이다. 예비검속자들은 정뜨르비행장(現제주국제공항)과 알뜨르비행장(모슬포비행장) 등지에서 처형되거나 바다에 수장당하기도 했다. p 147

지난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제주국제공항 남북 활주로 동/서쪽에서 있었던 유해 발굴 작업. 여기서는 385구의 유해를 발굴 할 수 있었다. 유해는 커다란 구덩이 속에서 조각난 뼈와 뼈끼리 뒤엉키고, 팔과 다리가 뒤섞인 채 겹겹 하나의 산을 이루고 있었다. p 225

제주도 여행 필수 코스 제주국제공항, 꼭 한번 씩은 방문하는 성산일출봉, 정방폭포, 그리고 수 많은 오름들. 지금은 그저 아름다운 제주 풍광을 보여주는 장소지만, 70여년 전만해도 그 곳은 수십, 수백, 수천명의 제주도민들이 비명에 죽어간 학살터였다. 제주에 처음 갔을 땐 이 모든 곳이 나에겐 아름다운 관광지였다. 하지만 그 다음에 갔을 때, 이 아름다운 곳들은 내 눈엔 그저 ‘학살터‘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뜨르비행장이 국제공항으로 변하고

하루에도 수만의 인파가 시조새를 타고 내리는 지금

‘저 시커먼 활주로 밑에 수백의 억울한 주검이 있다!’

‘저 주검을 이제는 살려내야 한다!’라고

외치는 사람 그 어디에도 없는데

샛노랗게 질려 파르르 떨고 있는 유채꽃 사월

활주로 및 어둠에 갇혀

몸 뒤척일 때마다 들려오는 뼈들의 아우성이 들린다

빠직 빠직 빠지지직

빠직 빠직 빠지지직

김수열, 정뜨르비행장 中

제주를 방문하는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그 곳엔 아직도 수백, 수천의 실종자의 유해가 묻혀있다. 폭포수가 아름다운 정방폭포 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성산일출봉을 시작으로 터진목 해안까지 많은 사람들이 끌려와 사살당했다. 탁트인 풍광이 보이는 서우봉에서도 수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제주 수 많은 오름들에서도 동네 주민들이 총살당했다.

제주의 대부분 해안이 학살터였고, 제주의 대부분의 오름이 매장지였으며, 제주에는 학살터가 아닌 곳이 없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저 제주를 관광지로 볼 뿐이다. 그렇게 제주 4.3은 계속 잊혀져간다.

제주 4.3 사건의 책임자는 누구인가.

희생자의 80퍼센트 이상이 토벌대의 손에 희생되었다. 이것은 1949년 미군 정보 보고서가 80퍼센트가 토벌군에 사살됐다는 기록과 상통한다. 그렇다면 무장대에 의한 살상 행위는 얼마나 되는가. 4.3 무장봉기 초기, 무장대는 경찰, 서북청년회나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원, 그리고 군경에 협조하는 우익 인사와 그들의 가족을 지목해 살해했다. 보복살해였다. 이런저런 형태로 무장대에게 희생된 사람은 전체 사망자의 약 10분의 1에 해당된다. p 140

미국의 세계적인 석학이자 사상가 노암 촘스키도 “1945년부터 1949년 6월까지 미군이 한국의 군대와 경찰을 지휘 통제했기 때문에 제주 섬에서 발생한 모든 학살극과 잔혹 행위에 대해 미국은 윤리적인 책임 뿐 아니라 실제적이고도 법적인 책임이 있다”라고 했다. p 160

먹고 사는게 전부였던 삶, 공권력은 글도 배우지 못한 자신을 ‘빨갱이’라고 매도해 재판을 했다. p 216

국가보안법과 연좌제를 들고 나온 군사정권은 제주 사람들을 반공의 이름 아래 족쇄를 채웠고, 4.3을 남로당 세력이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기 위하여 일으킨 폭동 사건으로 왜곡, 국정교과서에 그렇게 가르치도록 했다. p 229

제주 4.3사건의 희생자 중에는 분명 무장대의 손에 죽은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전체 희생자 중 10%정도밖에 안되었고, 이 희생자들 중 대부분은 토벌대의 학살에 대한 보복살해가 많았다. 그러니까 무장대가 살해한 사람들중 대게는 우익세력이나, 그들의 가족들이 많았다는 말이다. 물론 우익세력이라고 하더라도 무차별 학살은 잘못된 일이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무장대가 살해한 10%의 희생자를 제외한 90%, 제주 4.3사건 희생자의 대부분은 누가 죽였는가? 바로 국가 공권력인 군인, 경찰, 서청, 토벌대가 죽였다.

모름지가 국가는 국민을 보호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하지만 이 때, 국민을 보호해야할 국가는 어디에 있었나? 남한의 치안을 책임진다던 미군정은 정말 우리의 치안을 책임진게 맞는건가? 과연 제주 4.3의 책임은 어디에 있고, 누구에게 있는가. 정말 미군정은 이 사건에서 자유로울수 있는건가?

그 미군정을 뒷배로 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또 어떤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던 독립운동가의 모습은 어디로 버렸을까. 권력이 그렇게나 달콤했을까? 어째서 자신의 권력유지, 독재를 위해 일제보다 더 잔혹하게 국민을 탄압하는 괴물이 되었을까.

이승만 이후의 군사정권은 또 어떠한가. 그들 역시 제주 4.3을 빨갱이, 폭도로 몰아갔고, 연좌제로 그들의 자녀들은 공직에 나아갈 수도 없었다. 아주 나중에, 故노무현 대통령이 제주 4.3사건에 대해 국가를 대표하여 사과하기 전까지, 제주 4.3은 그저 빨갱이가 일으킨 사건에 불과했다. 이게 바로 국민을 지켜야할 국가가 한 짓이었다.

노대통령이 사과를 한 이후로도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렇다면 우리는 제주 4.3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고,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 답은 각자 마음속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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