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서점의 오월 - 80년 광주, 항쟁의 기억
김상윤.정현애.김상집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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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계뉴스에서 화두가 되는 사건이 있으니, 바로 ‘미얀마 군부 쿠테타’다. 미얀마 군부가 민주화를 열망하는 미안먀 국민을 탄압하며 학살하는 행동, 왠지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사건과 매우 오버랩된다. 한때는 광주사태로 매도되었던 바로 그 사건.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났던 5.18 민주화운동 말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직후)당시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 세력은 전국에 계엄을 선포하고, 광주를 고립시킨 뒤, 민주화를 열망한 광주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이러한 광주의 비극과 신군부의 행태를 미얀마 군부가 그대로 답습한 것이, 바로 작금의 미얀마 군부 쿠테타라고 할까?



각설하고, 이제 곧 광주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지 41주년이 된다. 이 때 죽어간 수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41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만, 죽어갔던 그들이 열망한 ‘민주화’가 늦게나마 이루어졌다는 점으로 보자면, 이 날은 민주화를 기념할 ‘41주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신군부세력의 수장이었던 전두환씨를 비롯한 학살자들이 사죄를 하지 않는 이상, 이 기념일은 계속 반쪽자리 기념일이겠지만(물론 사죄한 분들도 콩나듯 있습니다만).



서론을 이렇게 길게 쓴 이유는, 오늘 서평의 주인공인 책 「녹두서점의 오월」 때문이다. 이 책의 집필자들은 모두 5.18 유공자다. 이 책의 집필자들의 가족 역시도 5.18 유공자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 나오는 수 많은 이름들 모두 5.18 항쟁 당시 죽었거나, 혹은 실종되었거나, 혹은 살았으나 고문 후유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 혹은 5.18 피해자의 유족들이다. 



뉴스에서 5.18에 대해 가타부타 떠들어댄들, 당시의 피해자들 증언만큼 사실을 그대로 담아낼 수 있을까? 내가 아무리 5.18 관련 현장을 답사한다 한들, 당시의 피해자들이 겪었던 참상을 1%라도 제대로 느껴볼 수 있을까? 아마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을것이다. 그래서 난 이 책을 읽기로 마음먹었다. 이 책을 집필한 공동집필자들의 상황일지를 하나로 모으면, 광주 5.18 민주화운동 당시 상황이 어땠었는지, 그야말로 카메라로 쭉 찍은 것 마냥 이어진다.





5.18 민주화운동은 왜 일어났나


광주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선, 왜 그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1979년 10월 26일 밤, 궁정동 중정 안가에서 군사독재를 이어가던 대통령 박정희가 살해되었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은, 이제 제대로된 민주국가가 들어설 것이라 희망하였지만, 그 희망은 전두환을 필두로한 신군부 세력에 의해 산산히 짓밟혔다. 전두환은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며, 하나회 출신 장교들과 함께 쿠테타를 일으켰으니 그게 바로 12.12.사태다.



1980년, 전국의 대학생들은 계엄해제와 유신잔당의 퇴진, 민주화를 요구하며 학생운동을 전개한다. 특히 5월에 들어서 이 학생운동은 더욱 거세졌고 서울, 대구 , 광주, 부산, 인천, 목포 등 모든 도시의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바로 여기서부터 광주 5.18이 시작된다.


1980년 5월 13일, 전국의 대학생들의 민주화를 위한 가두시위를 진행하였다. 하지만, 이틀 뒤인 5월 15일, 서울역에 모였던 대학생들은 시위를 중단한다(서울역 회군). 본인들의 시위가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에게 빌미를 줄까 걱정되서였다. 그러나 광주에 있는 전남대는 시위를 중단하지 않았다. 전남대가 시위를 중단하지 않은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서울의 대학생들처럼 민주화를 위한 걱정 때문이었다. 다만 그 결과가 달랐을뿐. 서울 대학생들이 신군부 세력에게 빌미를 줄까 걱정되서 시위를 멈췄다면, 전남대생들은 신군부가 민주화의 열기를 무시하고 쿠테타를 일으켜, 빨갱이 사냥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여 시위를 진행한 것 뿐이었다.



광주에 있던 녹두서점은  당시로 말하자면 이른바 금서를 유통하는 것은 물론,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고, 민주화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녹두서점 주인 김상윤과 그의 아내 정현애는 정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본인들이 위험할 것을 알면서도, 녹두서점을 민주화운동의 상황실로 사용한다.



하지만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광주에 7공수여단 33대대와 55대대를 투입한다. 동시에 신군부는 예비검속을 진행하였고, 녹두서점의 주인 김상윤도 5월 17일 예비검속되어 505 보안대로 잡혀들어갔다. 하여 5월 18일 당시부터 이후의 사건 진행사항은 김상윤을 제외한 그의 아내 정현애, 남동생 김상집, 처제 정현주, 여동생 김현주, 김현주와 결혼한 엄태주 등이 민주화운동 중심에 서게된다.




※예비검속: 빨갱이(간첩)이 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것을 말함. 이승만 정권 당시 예비검속이라는 미명하에 수 많은 민간인 학살이 자행됨(제주43, 거창학살 등).



그 날의 증언


5월 18일 자정(정현애)


생각해보니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을 잡아갈 것 같았다. 또 남편이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알려 주어야 다른 사람들도 신속히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p 051



5월 18일(김상집)


나는 본능적으로 바닥에 몸을 숙였다. 바로 내 뒤에서 “윽”하는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비명과 공수부대원들의 욕설이 들렸다. 그들은 무조건 총검으로 찌르고 곤봉을 휘둘렀다. 총검을 찌르고 곤봉을 훅훅 휘두르는 그들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풍겼다. 정신없이 청운학원 뒷골목에 도착해 잠시 숨을 돌리려고 돌아섰는데, 도망쳐 온 일행 중 바로 내 뒷사람이 숨을 헐떡거리며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 찔렸어” 그러고는 순간 ‘푹’하고 고꾸라졌다. p 157



나는 시위대 본대에 합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상황을 안내하면서 소식이 닿는 주변인들에게 호주머니에 칼을 가지고 다니라고 말했다. 공수들이 길에서는 물론 집 안까지 쳐들어와 젊은 사람들을 무조건 곤봉으로 머리를 두들겨 패서 실신시킨 다음 짐짝처럼 차에 던져 실었기 때문이다. 공수들과 정면으로 맞닥뜨려 곤봉에 맞아 기절하면 어디론가 끌려가 암매장될 수 있으니까. p 159



5월 18일, 공수부대는 전남대 교문앞을 막으며, 학생들에게 “휴교령이 내렸으니 귀가하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돌아가지 않고 하나, 둘 모이더니 300명 정도로 불어났다. 그러자 공수부대는 고함을 지르며 학생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5월 19일(정현애)


방금 9시 뉴스에서 ‘광주에서 폭도들이 날뛰고 있다. 군인들의 희생이 많다. 민간인 부상자는 두 명 정도 났다’고 보도했다는 것이다. 기가 막혔다. 여차하면 죽을 수도 있는 폭력 앞에서 살기 위해 항의하는 시민들을 폭도라고 하다니! 수없이 차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고, 곤봉에 맞아 쓰러진 그 많은 사람들을 보고도 부상자가 고작 두 명이라니! 주택가의 함성은 이 어처구니없는 보도에 기가 막힌 시민들이 터뜨린 분노의 탄식이었다. p 077



5월 19일, 신군부는 광주에 11공수여단을 추가로 증파한다. 이로써 광주에는 7공수여단 33대대, 55대대와 11공수여단 61대대, 62대대, 63대대가 들어왔다. 이 모습만 보자면, 광주에 대테러가 일어난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자국민을 학살하기 위한 학살부대였다. 이들은 광주를 고립시키고, 대외적으로는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고 보도한다.



5월 20일(정현애)


나중에 이름을 전옥주로 바꾼 전춘심은 시위에 참여한 이유가 동생 때문이 아니라 조카 옷을 사기 위해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시민들의 참상을 보고 시위 차량에 올라 방송을 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후일 마이크를 잡았던 전춘심은 계엄사에서 간첩으로 몰려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p 084



5월 20일(김상집)


갑자기 MBC 방송국 건물 뒤쪽 1층에서부터 4층까지 불길이 확 솟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화염병의 화력만으로는 그렇게 한거번에 불길이 솟을 수가 없었다. 분명 군인들이 MBC방송국에서 철수하면서 방화한 것이라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다. (생략) 그동안 잔인한 공수들만 봤던 시민들은 ‘우리를 도와주러 왔을까’하는 마음에 그들이 끌고 온 장갑차와 탱크가 지나가도록 길을 터주었다. 그런데 도청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며 장갑차로 시위대를 밀어붙였다. 



5월 20일, 신군부는 또 한번 11공수여단 11대대, 12대대, 13대대, 15대대, 16대대, 직할대를 추가로 증파한다. 이로써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총 3,400여명. 광주시민들은 너나할 것없이 모두 금남로로 나왔고,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폭력 진압에 저항하는 시민들도 시시각각 불어났다. 특히 이 날은 택시운전사들도 시민 투쟁대열에 동참하여, 그 유명한 자동차 시위행렬을 진행한다. 



광주시민들은 군인들이 설마 자국민에게 발포를 하지는 않을 거라며, 믿고 있었지만. 이날 군인들은 광주 세무서, 조선대 앞에서 광주 시민들을 향해 총을들어 발포하였다. 


5월 21일(김상집)


나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집단 발포 후 군용트럭이 시내에 진입하고 있다는 소식에 운동권이 겁을 먹고 도망치기로 작정하고 있는 동안, 시민들은 어느새 지원동 탄약고와 화순탄광의 무기고를 털어 단단히 무장하고 나타난 것이다. 무장한 시민들이 공수들을 응징하기 위해 광주 시내로 진입한 것이다. p178



5월 21일, 신군부는 처음으로 ‘광주사태 담화문’을 발표했다. “광주사태는 불순분자 및 간첩들의 파괴, 방화, 선동에 기인한 것이다.” 라는 내용이었다. 오후 1시경에는 전남도청 건물 옥상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지자, 공수부대는 일제히 총을 들고 무차별 발포를 시작한다. 이런 공수부대에 맞서 광주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시민군을 꾸리기 시작했다.



5월 22일(가두 방송:김상집 with 윤상원, 김광섭)



광주시민 여러분!


살인마 전두환 일당은 국민투표로 대통령을 뽑겠다는 민주일정의 약속을 어기고 5월 18일 자정을 기해 제주 일원까지 비상계엄을 확대했습니다. 그리고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 인사들을 예비검속했습니다. 


전두환 일당은 이미 5월 17일 밤에 전남대, 조선대, 교육대에 공수들을 투입하여 학생들을 무차별 구타하고 연행했습니다. 대검으로 찌르고 총을 쏘아 죽였습니다. 어제는 대낮에 수만 명의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하여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학살당했습니다.


공수들은 집집마다 난입하여 젊은 사람들은 무조건 구타하여 초주검으로 만들고, 팬티만 입힌 채 끌어가고 있습니다. 총으로 쏘아 죽이고 대검으로 찔러 죽인 사람들을 군용차에 싣고 어딘가에 암매장하고 있습니다.


광주시민 여러분!


광주시민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민주인사들이 예비검속당하고 학생들이 대검에 찔리고 총에 맞아 죽어가고 있습니다. 살인마 전두환 일당과 공수들에 대항하여 총을 들고 싸웁시다. 그리하여 공수들을 광주 밖으로 몰아냅시다.



계엄군이 물러난 22일, 광주의 치안은 ‘시민군’이 맡았으며, 그 흔한 도둑질조차 없었다. 오히려 추후에 있을 계엄군의 반격에 대비하며 ‘시민군’과 광주 시민들은 많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동 시간대에 외곽으로 물러난 계엄군은 외부에서 광주시내로 들어오는 진입로 7개를 원천봉쇄하며, 이 곳을 통과하려고 하는 시민군을 보면 무차별 사격을 하고 있었다.



5월 23일(정현애)


나는 시민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북한을 경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자고 제안하고 성명서 문안을 작성했다. 광주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오판하여 북한이 휴전선을 넘어온다면 광주 시민들이 앞장서 북한의 침략을 막아내곘다는 내용이었다. p 111



5월 25일(김상집)


당시 수습대책위원회는 광주시민들의 요구와 상관없이 강제로 총기를 회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장을 해제하면 곧바로 계엄군의 공격을 받을 것이고, 광주에는 또다시 피바람이 몰아칠 것이 분명했다. 시민들은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총기 회수 결사반대’를 외치며 궐기대회에 참여했다. <투사회보>에 실은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글은 시민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고, 궐기대회에서 낭독할 때마다 열화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기대했던 민주 인사들이 총을 드는 것을 막무가내로 반대했다. p 200



5월 25일까지 계엄군들은 계속 광주 외곽에 있었다. 계엄군이 물러 난, 광주는 공식적으로는 무정부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래없이 평화로웠고, 질서정연한 시민의 모습을 보였다. 식량공급이나 전기, 수도등은 시 자체에서 해결하고, 병원에서 혈액부족 사태가 발생하자 시민들이 몰려와 헌혈을 앞다투어 하는 등 혈액원마다 피가 남아돌기까지 했다.



하루가 지난 5월 26일, 새벽 5시. 농성동에서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한다. 도청안에 있던 시민군은 계엄군 진입이 임박했다는 것을 예상하고 많은 사람들을 내보냈다. 



학생과 여성 여러분은 살아나가서


역사의 증인이 되십시오


시민군 윤상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도청 밖으로 내보내고, 끝까지 도청을 지킨 시민군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장엄하게 산화하였다.



5월 27일(정현애)


어떻게든 ‘간첩’으로 몰려서는 안된다는 마음으로 용기를 내서 필사적으로 대답했다. ‘간첩으로 몰린 사람들은 죽는 것보다 더 어렵게 산다’는 것을 알고 있엇던 터라, 나뿐만 아니라 광주시민들이 빨갱이로 몰리는 상황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새벽에 YWCA에서 서점으로 돌아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이것으로 북한 방송을 들었구먼”


방을 뒤지던 군인이 라디오를 가지고 나왔다. 그것은 윤상원이 서울에서 사용했던 고물라디오 였다. p 143



5월 27일, 계엄군은 광주와 전남 일원 사이의 전화을 차단했다. 항쟁 지도부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사실을 광주 시민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결정한 뒤, 도청 방송실에서 최후의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계엄군은 도청진압작전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계엄군이 작전을 개시 한 지 약 1시간 30여 분만에 도청은 진압되었고, 광주 시내는 초토화가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주 5.18에 대해서, 바로 여기까지만 알고 있을 확율이 높다. 광주 5.18을 주제로한 각종 매체들이 대부분 여기까지만 그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어야 한다. 그 뒷이야기를 알기 위해서.




5월 27일, 계엄군의 도청진압작전 그 후.


대한민국 군인이 자국민을 학살하던 그 날,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은 군인들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예비검속당하여 사전에 끌려간 사람들을 비롯해서 말이다. 녹두서점의 주인 김상윤의 죄명은 내란주동자, 김상윤의 아내 정현애의 죄명은 폭도였다. 그렇게 그들은 살아남았지만, 살아남은게 아니었다.



-내란주동자 김상윤


잡혀 들어온 이양현이 얼마 되지 않아 내가 있는 방으로 오게 되어 여러소식을 들었다. 윤상원이 죽게 된 과정도 자세히 들었다. 5월 27일 새벽, 윤상원과 이양현은 민원실에 함께 있었다고 한다. 계엄군이 도청 뒷담을 넘어 습격하는 바람에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 윤상원은 총을 맞은 채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바로 솜이불을 펴 그 위에 윤상원을 엎드리게 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섬광이 번쩍하며 불꽃이 퍼진 것으로 보아 화염방사기를 쏜 것 같다고 했다. p 228



내가 3과로 옮길 무렵 신군부는 소위 광주사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고심하고 있었다. 김대중의 배후 조종에 의한 내란으로 몰 것인지, 아니면 아예 북한의 지령에 의한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으로 할 것인지.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서울 보안대 본부에서 특수공작 총괄임무를 맡고 내려온 홍성률 내령이 ‘광주를 빨갛게 색칠하면 영원히 화해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폈고, 이를 신군부가 받아들여 광주사태를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으로 날조하려는 시도가 철회되었다고 한다. p 229



이제 각본은 명확히 드러났다. 광주사태는 김재둥의 배후 조종으로 일어난 일이고, 정동년은 김대중의 뜻에 따라 그에게 받은 자금을 활용해 윤한봉, 김상윤, 김운기를 포섭해 광주사태를 일으킨 것이다. 정동년은 이미 5월 17일 김대중에게 자금 500만원을 수령한 사실을 자백헀고, 양강섭의 자백으로 선거자금 53만원을 김상윤에게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니, 김대중-정동년-윤한봉-김상윤-김운기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확보된 셈이다. p 239



신군부는 광주항쟁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그리려고 했던 원래 그림은 ‘빨갱이’였다. 광주에 있던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그림은 철회되었다. 대신 차선책으로 당시 민주인사 중 한명이자, 전두환의 눈엣가시였던 김대중(15대 대통령)과 엮어서 ‘내란죄’라는 그림을 덧칠하였다.



-폭도 정현애


유치장에 잡혀 온 여성들이 한 일들은 매우 다양했다. 시위에 참여한 여학생들, 시민군에게 김밥을 나누어 준 아주머니, 수배자를 숨겨주다가 들어온 여성들도 있었다. 충청도가 고향이라는 여성 선교사도 있었다. 강진에서 잡혀 온 여성은 여관에서 “광주에서 군인들이 사람을 많이 죽였다더라”고 말했다가 ‘유언비어죄’로 잡혀왔다. p 263



수사관들은 “사형수가 다섯 명 정도는 돼야 한다”는 전두환의 수사방침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일이 잘못되어 남편이 사형당하는 것은 아닐까. p 265



군인들은 우리에게 ‘여기에서 일어난 일은 일절 발설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게 한 후, 우리를 상무대 강당으로 데려갔다. 강당에는 그날 석방될 사람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군인들의 일장 연설을 듣고 상무대를 나섰다. 연행된 지 꼭 100일 만이었다. 나를 마중 나온 시부모님과 친정어머니는 “일단 한 사람이라도 살아야 한다”며 위로해주셨다. p 270



서점은 이제 구속자 석방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모인 사람들 대부분 구속된 사람들의 아내이거나 누나들이었다. p 272



그러나 군사법정은 증거물을 모두 기각시켜 버렸고, 증인들을 재판 3일 전에 모두 정보기관에 강제로 끌려간 분들도 모두 수모를 겪으며 마음고생이 많았다고 들었다. 또한 신군부는 증인으로 채택된 극소수의 증인들도 회유하거나 크게 위협을 가한 후 법정에 세웠다. 법정에 나온 증인들이 오히려 우리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여 구속자들과 가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당시는 너무 황당하여 증인들에게 몹시 화가 났으나, 나중에 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p 276



군인들에게 잡혀갔던 많은 사람들이 비밀유지 각서를 쓰고 나서야 풀려났다. 풀려나지 못한 사람들은 내란 주동자라는 낙인이 찍혀 군사재판에서 사형, 무기징형등의 형을 받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대한민국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로 발돋움한 뒤 많은 이들이 풀려났다. 그들은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자유롭지 못했다. 평생 참혹했던 고문의 후유증을 안고 살아야 하고, 평생 눈 앞에서 참혹하게 죽어간 동료들의 잔상을 안고 살아야 한다. 그들을 이렇게 만든 전두환은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다. 전두환을 비롯하여 그 측근들은 아직도 떵떵거리며, 권력을 쥐고 5.18을 왜곡하고 있다. 




“이 기록유산들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참혹한 죽음을 조사하고 묘사하기조자 어려울 정도의 잔혹한 인권 침해에 대하여 설명하며 극도의 역경과 박해를 넘어선 인간승리에 대한 기록물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절대로 잊혀져서는 안됩니다. 인류의 양심과 기억의 일부분으로 영원히 남아있어야 합니다.”



5.18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당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장 로슬린 러셀이 한 말이다. 과연 나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내가 기억하는 5.18에는 잊힌 부분은 없는걸까, 왜곡된 부분은 없는걸까. 이제 스스로에게 답을 구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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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드너 다이어리 - 사계절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는 실전 노하우
국립수목원 지음 / 지오북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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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사버렸다. 가드닝 책. ..하하..하하하.


시중에는 가드닝 관련 책이 정말 너무나도 많다. 그래서 대체 뭘 사서 읽어야 할지 고민이 정말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애초에 내가 책을 읽는 취향과는 동떨어져 있던 장르이기도 하다보니, 어떻게 책을 골라야할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가드닝 책을 고르는데 두 가지 방법을 선택했다.



① 식집사들 사이에서 호평되는 가드닝 책(식물카페에서 대거 서평의뢰가 들어간 책 제외!)


② 누가봐도 식물 키우기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쓴 책



이 책은 후자다. 누가봐도 식물 키우기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쓴 책! 음 정확히는 단체가 쓴 책이라고 해야하나? 무려  국립수목원에서 발행한 책이니까 말이다. 무엇보다도 포천에 있는 국립수목원(광릉숲)은 1999년에 설립된 국내 최고의 산림생물종 연구기관이니, 이 책에 대한 신뢰도는 천장을 뚫고 올라갈 수 밖에.



이 책을 구입하기 전에, 국립수목원(광릉숲)을 가려고 사전예약을 한 상황이었는데. 크 ㅋㅋㅋㅋ 이것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





내가 식집사의 길로 뛰어들었을 땐, 식물카페의 모든 글을 보며 용어들을 익히고, 식물을 키울때 주의사항 등을 익히고 그랬다. 그럼에도 알기 어려운 내용들이 있었으니, 그 중 하나가 T/R률이다.



분갈이를 위해 검색을 하다보면, 식물의 뿌리를 잘라내면, T/R률을 고려하여 식물의 가지도 일부 쳐내야한다는 말을 들어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난 대충 뿌리가 잘린만큼 영양분을 흡수하는 양도 줄어드니, 그만큼 줄기도 잘라내야 한다고 인지했었다. 어휴, 근데 이건 너무 쉬운 생각이었다. 이래서 책을 읽어야해!



T/R률이란 Top/root ratio. 나무 지상부와 지하부의 비율을 말한다. 나무 지하부의 뿌리와 지상부의 가지가 비례하지 않으면, 뿌리가 흡수할 수 있는 물의 양보다 지상부에서 더 많은 수분을 증산하기 때문에 잎이 말라버리거나, 나무 전체가 고사할수도 있다고! 만약 T/R률 조절을 했는데도 잎이 계속 말라간다면, 가지를 더 솎어내거나, 전체적으로 잎사귀를 따야한다고 한다.



얼마전 수 많은 꽃송이를 비웠던 토종동백이 분갈이를 하였는데, 화분에서 꺼내보니 동백이 가지에 비해 뿌리가 조금 부실했었다. 하지만 난 아무생각 없이 동백이 집만 키워줬을 뿐이고. 허허허허. 하지만 아랫잎부터 자꾸 노래져서 떨어지고 허허허허. 혹시 몰라서, 지면에서 나무의 중반부까지 잎을 다 떼어냈더니, 그재서야 동백이가 안정적으로 새순 펑펑내고 순항중이다. 크흡. 어디까지나 소 뒷걸음치다 얻어걸린거긴 하지만, 진작에 알았다면, 더 빨리 동백이를 보살펴줄 수 있었는데. 전문지식의 중요성이란 이런건가!!






 



식집사 생활에서 중요한 건 또 있다. 바로 가지치기!!! 초본류를 키우는 사람들이라면 크게 상관없겠으나, 목본류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관심을 집중해야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내 관심도 집중!! 뭐, 가지치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대해선 프로개님 블로그에서 어깨넘어로 배우긴 했었지만 말이다.



가지치기를 조금 더 전문적으로 하고 싶다면, 이 책의 51p ‘전정하기’ 파트를 보면 된다. 가지가 나무에서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구분할 수 있고, 그 부분 위주로 가지치기를 진행하면 된다. 위 사진의 A ~ F 가 가지치기 할 때, 쳐내야하는 가지이다. 



개인적으로 저 흡지는 회사 화단에서 정말 많이 봤다(흡지: 땅속에 있는 뿌리에서 부정아가 생겨 땅위로 나타난 것). 이 책을 읽기 전까진 이 흡지들을, 그저 나무들이 새끼친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요게 정확한 이름이 있었구나 싶었달까? 뭐, 각설하고. 회사 화단에 있는 벚나무, 은행나무, 매화나무 등등 대부분의 나무가 흡지를 엄청나게 만들어내고(공단이 식물들 살기에 더 좋은 환경인건가ㅋㅋㅋ), 매번 제초작업때 마다 잘려나갔다. 올 봄도 어김없이 흡지들이 엄청 올라왔는데, 유독 내 눈에 띄는 흡지가 있으니 바로 매화나무 흡지!!! 매화나무 흡지는 제초작업으로 잘려나가기 전에, 미리 구출하여 집에서 키워보려고 생각중은 안비밀이랄까(회사 드루이드님이 캐주기로했!)!



삽목하려고 가지고 왔던 매화가지(역시나 회사 드루이드님께 겟)들은 하나 빼고 다 죽었기에 흑 ㅠㅠ, 하나만 살아남은걸 감사히 여겨야할지 뭐라해야할지 흑흑. 여튼 매화가지 삽목의 대참패에 충격을 받아, 조금은 안정적인 흡지를 묘목삼아 키우기로 노선 변경을....!








위에 목본류를 위한 가지치기라면, 초본류를 위한 순따기도 있다. 아 물론 율마도 순따기가 필요한 아이긴 하지만 ㅋㅋㅋㅋ. 순따기야 율마를 키우면서 나름대로 경험하긴 했는데, 정말 순따기는 언제봐도 신기하다. 하나의 순을 따면 두 갈래로 순이 나오고, 또 하나의 순을 따면 두 갈래의 순이 나오고. 오랫동안 아무생각없이 율마 순따기를 하면, 정말 풍성하고 이쁜 율마를 만날 수 있다는데. 내 율마는 언제 풍성해지려나.....율마야 힘을내...ㅜㅜ







꺾꽂이 방법도 있다. 뿐만아니라 휘묻이, 포기나누기, 접목 등 각종 번식방법이 이 책 속에 있다. 하 이 책도 많은 사람이 봐야될 거 같은데 ㅋㅋㅋ


진짜 초록이들 온갖 번식방법이 이 책 한 권에 다 있는데, 이걸 어떻게 말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좋은 건 혼자알고 있지 말라고 했는데.....!





 




이 책이 좋은 건 각종 식물 키우기 방법만 있는게 아니라는 점이다. 국립수목원에서 발행한 책이라서 그런지, 일종의 식물도감도 있다. 식물별로 파종, 이식, 개화시기도 있고, 거기다 월별 캘린더도 있다. 수많은 가드닝 책들을 제치고, 8쇄 인쇄한 비결이 바로 이것인가....ㄷ.ㄷㄷㄷ




아유, 이 책을 읽고나니 빨리 국립수목원 가고 싶어지고. 왜 난 5월에 예약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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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세종 더 그레이트 킹 세종 더 그레이트
조 메노스키 지음, 정윤희, 정다솜, Stella Cho 외 옮김 / 핏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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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눈의 외국인, 그 유명한 《스타트렉》의 작가가 세종대왕에 대한 역사소설을 썼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것도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이야기를 말이다. 한국인이 썼다면야 그려러니 했겠는데, 외국인이 썼다지 않은가. 심지어 그 유명한 스타트렉 작가가, 그것도 국문과 영문 동시출판이라니. 얼마나 잘 썼는지, 이건 꼭 읽어봐야겠다 싶었다.



그리고 와, 뚜껑을 열어보니... 이건 생각보다 수작이었다. 예컨데 역사소설 ‘뿌리깊은 나무’ 만큼, 아니 그보다 더한 충격을 받았다. 첫번째 외국인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쓸 수 있는지, 외국인이 조선 궁중문화를 이렇게 자세히 알고있는지(예를들어 왕실 어른이 돌아가셨을때, 궁 기와에 올라가 ‘상위복’을 외치는 것이라던가), 훈민정음 창제의 바탕이 어떤 것인지 등. 와 이건 정말 한국을 사랑하고, 세종대왕을 사랑하고, 한글을 사랑하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쓸 수 없는 내용이었다. 거기다가, 내가 보았던 세종 관련 매채는 대게 그 시각이 ‘국내’에 한정되어 있었는데, 이 책은 조선이라는 땅을 벗어나, 명나라, 몽고, 왜(일본)까지 시각을 동아시아로 확장시켰다.



※이 리뷰에는 스토리 진행에 절대 중요하지 않은(ㅋㅋㅋ) 아주아주 의미없는 곁가지 스포일러가 아주 조금 있습니다. 거기다 이 소설과는 아무 상관없는 감상도 포함되어있습니다. 이런 책은 스포일러 당하면 절대 안되는 책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책 꼭 읽어보세요. 강추강추!





세종이 바라는 세상은 언제나 백성들이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삶이었다. 그래서 그는 생의 모든 순간을 백성들을 위해 쏟아부었다. 해서 백성들이 글을 읽고, 쓸 줄 알기를 바랐다. 그저 말하지 못하여 당하지 않도록, 억울한걸 억울하다 말할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문자는 지배층의 점유물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던 왕조시대에, 한자를 쓰며, 한자를 발명한 중국에 사대를 하는 유학자들이 정치를 하는 그 시대에, 세종의 이러한 발상은 한 나라를 망국으로 일으킬수도 있는 그런 위험한 생각이었다.



세종은 물시계를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여겼다. 너무도 익숙한 옛 동료나 오랜 친구인 양 이름까지 붙여주었다. 장영실은 왜 그렇게 서둘러 떠난 것인가? 왕은 물시계를 발명한 사람을 그리워했다. p 108



그래서 이 책속의 세종은 언제나 자기 뜻을 이해하고, 어떻게든 실행시키려고 하던 친구 ‘장영실’을 그리워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바탕으로하는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에서는 왠만하면 나오지 않는 인물 ‘장영실’. 그 장영실이 이 책속에선 왕왕 등장한다. 



소설속의 세종의 침전 건너방, 그곳에는 물시계가 있다. 시간을 다스릴 수 있도록, 그 시간으로 백성들이 더 잘 살 수 있도록, 그런 세종의 바람을 담아 장영실이 만든 물시계. 바로 그 물시계가 그 방에 있었다. 세종은 신료들의 반대에 부딪히고, 풀지 못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원할때, 심적으로 지칠때 이 물시계를 보러 왔다. 오랜 친구 장영실을 만나기 위해.



세종이 그렇게나 아꼈던 장영실. 유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도 등용했던 장영실. 그런 장영실을 왕의 가마를 망쳤다는 이유로 곤장을 내렸다는 기록 이후엔 기록속에서 사라진 장영실. 만약 역사의 타임머신이 있다면, 세종에게가서 “장영실은 어떻게 되었나요?”라고 꼭 묻고 싶었다. 역사속에서 사라졌기에, 장영실은 세종 후반기 이야기에서도 사라졌고, 많은 사람들도 그를 잊었다. 심지어 그가 만들었던 발명품들은 조선중기 이후에는 그 조작법조차 모를 정도가 되었다.



백성을 위했던 세종, 그런 세종을 위해 각종 발명품을 만든 장영실. 하지만 그 보다 더 백성에게 중요했던 문자. 하지만 반상이 유별하고, 유학의 나라였던 조선에서는 이 모든걸 다 가져갈 수 없었다. 그래서 세종은 장영실을 버리고, 백성을 위한 문자를 지킨게 아닐까. 뭐 그런생각을 많이 했더랬다.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진 장영실을 저자는 물 위로 끌어내었다. 물론 이미 장영실이 죽었다는 가정 하에, 죽은 장영실을 그리워하는 세종이었지만 그게 어디인가. 그리고 진짜 그렇게 곤장을 맞았다면, 세종이 뒤로나마 구출하지 못했다면, 진짜로 그날 이후로 장영실은 생을 달리했을테니 말이다. 이렇든 저렇든 시기의 세종을 그린 각종 매체에선, 장영실의 'ㅈ'짜도 없었는데, 이렇게나마 세종이 계속 장영실을 그리워했다는 이 모습이 나는 너무 좋았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이 소설을 쓴 외국 작가에게 너무 고마울 뿐이다.



“그자에게 진 빚을 내가 어찌 갚을 수 있겠소? 아직 살아 있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민초들에게 진 빚을 내가 어찌 갚을 수 있단말이오? 그들이 자기 목소리를 세상에 알릴 방법은 말하는 것이 유일할 게요. 하지만 죽은 뒤에는? 그들의 목소리를 그들이 죽고 난 뒤에도, 우리 조선인이 모두 죽고 난 뒤에도 길이길이 알릴 수 있는 방법이 과연 무엇이겠소?” p 146



문자는 귀족들의 권력이었다. 해서 일개 백성들, 사람취급 받지 못한 천민들, 그들은 억울해도 억울하다 할 수 없었다. 문자를 모르기 때문에. 기천년간 이어져온 왕조시대, 수 많은 나라에서 수 많은 왕이 나왔지만, 이러한 생각을 한 왕은 몇 없고, 몇 없는 왕중에서도 이를 고쳐보고자 실행한 이는 적어도 공인된 역사속에서는 조선의 4대왕, 세종대왕 이도 한 사람 뿐이다.



“지금 우리 조선에서 사용하는 소리는 중국의 소리와 달라 한자로 표현할 수 없다. 그 결과 한자를 배우지 못한 일반 백성들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 사연을 글로써 전달할 방법이 없다.” p 182



재위기간 내내 백성을 위해, 백성에게 좋은 것만 생각하던 세종대왕이 말년에 만든 우리글, 훈민정음. 이 훈민정음은 한글이 되어, 오백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우리가 사용하고 있다. 



훈민정음을 반포하던 그 날, 조정에 있던 대다수의 유학자들이 반대하였다. 심지어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최만리는 훈민정음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반대하는 제일 큰 이유로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 큰 나라를 모시는 작은 나라가, 감히 큰 나라의 문자를 버리고 일개 ‘기예’에 불과한 문자를 쓰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거기다 일반 백성과 천한 것들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다면,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는 모든 예의범절이 파괴될 것이라 하였다. 최만리의 상소를 통해 조선이란 나라가 사대주의가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알 수 있고, 있는 자들의 권력욕구가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본디 글을 안다는 것은 권력을 가진 것과 같다. 하여 조선은 차지하고 고려, 그 전까지도 우리 역사상에서 한낱 백성들이 글을 배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글을 아는 사람은 권력을 독점한, 소수의 지배층뿐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쇄혁명이라 일컫는 금속활자가 최초 발명된 곳은 바로 우리 땅이었다. ‘직지심체요절’이 바로 그 증거이다. 심지어 서양의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보다 2백년 앞선다. 그러나 금속활자가 나온 이후의 세상은 서양과 동양이 극명하게 달랐다. 우리는 금속활자를 꽁꽁 숨겨두었다. 왕실을 비롯하여 공자왈 맹자왈 하는 돈있는 양반네들, 그리고 사찰에서만 통용되었다. 해서 모든 정보는 왕실, 양반, 사찰에서만 독점하였고, 이러한 정보 독점은 권력으로 이어졌다. 금속활자인쇄가 발명된 이때도 이럴진데, 목판으로 인쇄했을 시기는 정보 독점은 오죽했을까.



반면에 서양은 금속활자는 성서 인쇄를 비롯하여 수 천권의 책들이 금속활자에 찍혀, 대폭적으로 전 계층에 퍼져나갔다. 왕실, 귀족, 서민 관계없이 누구나 손쉽게 책에 접근 할 수 있었다. 기존에는 왕실에서만 독점하던 정보를 일반 서민들까지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되면서, 이 시기를 기점으로 서양의 각종 학문의 발전이 급속도로 이루어졌고, 여러 개혁들이 잇달아 발생하였다. 그렇게 서양은 동양과는 다르게, 아주 빠르게 시민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고, 근대 국가로 나아갈 수 있었다.



동양은 소수의 지배층이 인쇄술을 독점하고, 문자를 독점하여 권력을 유지했고, 서양은 누구나 인쇄물에 접근할 수 있었고, 인쇄물에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문자를 배웠고, 문자를 배움으로써 옳고 그름을 깨우치게 되었다.



자, 이쯤에서 다시 보자. 최만리가 훈민정음을 반대하는 상소문에 썼던 ‘예의범절이 파괴’, 이 말이 과연 적중했는가? 서양은 예의범절이 파괴되어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시민혁명이 일어났고, 산업혁명이 일어났는가? 서양은 예의범절이 파괴되어 세계의 패권을 잡았던 것인가? 반면에 지배층이 끝까지 한자를 쓰고, 문자를 독점한 조선은 예의범절이 살아있어서 삼정의 문란이 일어났고, 예의범절이 살아있어서 백성들을 쥐잡듯이 잡았고, 예의범절이 살아있어서 외세에 나라를 팔았는가?



세종이 만들었던 훈민정음은 유학자들의 격렬한 반대로 조선의 정식문자로 채택되지 못하였다. 여성들이 쓰는 문자로 전락하고, 천민들이 쓰는 문자로 전락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훈민정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백여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한글이 된 훈민정음을 쓰고 읽는다. 



많은 사람들이 한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모습을 세종대왕이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라는 가정을 많이들 하는데, 난 그 반대의 가정을 하곤 한다. 그렇게 대국의 문자라고 한자를 극찬하던 유학자들이, 지금의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그렇게 대국의 문자라던 칭송하던 한자는 저 멀리 내팽개쳐져, 한국에서 사장된거나 다름없어진 이 모습을 보면 최만리를 비롯한 유학자들이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정말 궁금하다.



그것은 왕이 받은 첫 번째 편지였다. 왕 자신이 창제한 훈민정음으로 쓰인 첫번째 편지!


세종은 큰 소리로 쪽지에 적힌 내용을 읽었다.


“황씨부인은 읽고 쓸 수 있사옵니다. 전하, 감사하옵니다.” p 227



내가 조선조에 태어나, 훈민정음을 처음 접했다면, 나는 가장 처음으로 어떤 글을 썼을까? 아마, 황씨부인처럼 글을 알고, 쓸수 있게해준 세종에 대한 ‘감사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의미에서 황씨부인의 저 쪽지는, 훈민정음을 배우게 될, 세종에게 감사함을 갖게 될, 과거와 먼 미래인 오늘날 모든 백성들의 편지와 다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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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여기까지!!!!!!!!!!!!!!!!!! 최대한 책속의 내용은 피하고,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ㅋㅋㅋ) 내용에 대해서만 내 생각을 덧붙여보았다. 그러니까, 이 리뷰를 읽은다 한들 이 책의 내용은 알 수 없단 이야기.




뭐라고 해야할까? 이 책은 흡입력이 최고조에 달한다. 책을 쓴 저자가 스타트렉 작가여서 그런건지, 책을 읽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아주 잘 만들어진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은 기분이다. 소설이자 드라마로 방영되었던 《뿌리깊은 나무》가 그저 국내판이라면, 이 책은 세계판으로 상위호환한 느낌이랄까?



읽으면서 국뽕이 넘쳐흐르는 구간도 있었고(특히 반포할 때), 슬퍼서 눈물이 찔끔한 구간도 있었으며(희생된 사람들이..하...ㅜㅜ), 욕지꺼리가 나온 구간도 있었다(최만리가 한 작태라던가 뭐 그런..... 상소문에서 멈췄어야지 이 양반아!!). 거기다 어디까지나 ‘역사판타지 장편소설’임을 감안하였음에도, 사실과 허구가 너무 조화롭게 배치되어서 그런지, 만약 이 책을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하면 그대로 믿을 사람들도 많을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런 의미에서 영화로 제작된다면, 극장을 잘 안가는 나지만 이것만큼은 영화 보러 갈 수 있을 것 같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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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선정에서 들리는 공부를 권하는 노래 - 겸산 홍치유 선생 권학가, 2020년 지역출판활성화 사업 선정 도서
홍치유 지음, 전병수 옮김 / 수류화개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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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고택에서 오래된 고문서나 두루마리가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볼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고문서나 두루마리는 대부분 세상에 공개되지 않는다. 국사책에 나올 법한 아주아주 유명한 위인의 글이 아니고서야, 대부분 박물관 수장고나 고택에서 계속 보관할 뿐이다. 이 책 역시 그럴뻔 했던 고문서중 하나였다. 




이 책의 저자 겸산 홍치유 선생은 조선 말을 살아가던 유학자였다. 그러다 남헌 선정훈의 권유로, 관선정서숙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관선정서숙은 남헌 선정훈이 건립한 교육기관이다. 물론 현재 관선정은 남아있지 않다.  관선정을 세웠던 남헌 선정훈의 고택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관선정은 당시 일제의 식민교육에 맞서 전통한학을 가르치며 민족정신을 이은 곳으로서, 1944년 일제의 탄압으로 강제 철거되기까지 약 200여명의 학생이 관선정을 거쳐갔다. 이후 1945년 경북 문경 농암면 서령으로 옮기고, 또 경북 상주군 화북면 동관리로 옮겨 1951년까지 명맥을 유지하였다고 한다. p 010




이 책을 엮은이는 남헌 선정훈의 고택을 방문하여, 그 집의 며느리로 있는 겸산 홍치유 선생의 후손을 만났고, 그 곳에서 겸산이 쓴 두루마리를 발견하였다. 그게 바로 이 책의 시작이다. 어쩌면 광에 묻힐 뻔 했던 겸산의 글이, 선생의 후손과 그 글에 관심을 가진 엮은이를 통해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 두루마리에는 겸산 홍치유 선생의 후진들을 가르치기 위한 글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글이기도 하면서 가사(歌詞)이기도 하였다.



“대체로 초학자에게 글만 읽으라고 하면 싫증을 내고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지만, 노래를 부르게 하면 쉽게 떨치고 일어나 분발한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반드시 이것(노래)으로 그들을 가르쳤다” p 012



딱딱한 글은 배우기 어렵고 따라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가사(歌詞;노래)로 된 글은 배우기 쉽고, 따라하기도 쉽다. 해서 겸산 홍치유 선생은 딱딱한 글이 아닌, 가사문학의 형식을 취해 가르침을 남겼다. 그가 후진 양성에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겸산의 글이 담긴 이 책은 유학자가 쓴 글이기에 유학이 무엇인지를 쉽게 접할 수 있고, 그가 유학자였기 때문에 공부한 우리의 역사를 알 수 있으며, 한자와 한글이 같이 적혀있기에, 한자 공부에도 매우 적합하다. 무엇보다, 겸산의 글은 조선 말기에 쓰인 글이지만, 현대를 사는 사람이 썼다고 해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에 대해 깊게 생각할 기회를 준다. 




※책에 실려있는 가사에는 전부 역주가 달려있지만, 본문만 옮겨적습니다.


人道가 不明하면(사람의 도리가 밝지 않으면)


天地도 長夜로다(하늘과 땅도 깜깜한 긴 밤이로다)


人身이 不修하면(사람이 수양되지 않으면)


家國이 어이되랴(집안과 나라가 어찌 되랴?)


관선정에서 들리는 공부를 권하는 노래  p 91~92



사람의 도리가 밝게 드러나지 않으면 하늘과 땅의 도리도 밝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늘과 땅, 그러니까 세상이 깜깜해지면, 집안과 나라가 어지러워지니, 사람은 항시 수양을 해야한다. 어찌보면 공자왈, 맹자왈 - 죽은 자의 이야기만 읊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생각이 짧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수양을 한다는 것은 내 몸과 마음을 갈고 닦는다는 의미이다. 학문적으로 갈고닦는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도적적으로 갈고 닦는 의미도 내포되어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나의 ‘됨됨이’를 갈고 닦는 것이다. 세상은 나 혼자 살아가는게 아니며, 부모/형제/친구/동료 등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그렇기에 나를 갈고 닦는 일은 중요한 것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헌데 이를 행하지 않게되면, 그런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수양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 많큼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이야기고, 그러다보면 범죄자가 판치는 세상이 될 것이며, 결국 내 인생, 내 자식들 인생까지도 망치는 세상이 되어간다는 이야기다.



萬券詩書 다 읽어도(만 권의 시서를 다 읽어도)


無一善行 可稱하면(일컬을 만한 선행이 하나 없다면)


이 내 몸에 무삼有益(이 내 몸에 무슨 보탬이 있으랴)


不學無識 다름없다(배우지 않아 무식한 것과 다름이 없다)



위와 이어지는 내용이라 볼 수 있다. 아무래 학문적으로 높은 위치를 이루었다 한들, 그 학문적 지식을 엄한데 쓴다면 무식쟁이와 다름없다는 이야기다. 예컨데 공부 열씸히 해서 LH공사 같은 곳에 들어가도, 오로지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그 지식을 쓴다면, 그들은 무식한 것과 다름 없다는 이야기다.  조선조 말을 살아간 사람이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1백년이 훌쩍 넘는 지금에 큰 울림을 준다.



이렇게 자신의 수양을 위한 글도 있는 반면, 우리의 역사에 대한 글도 쓰여져있다. 이는 겸산이 유학자이기에 쓸 수 있는 글이다. 단군 조선부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까지에 대한 내용이 이렇게 가사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世宗의 文武大業(세종의 문덕과 무략의 큰 업적)


天縱하신 聖知시고(하늘이 내린 성지시고)


輯賢殿 雪夜貂衾(<문종이> 집현전 <학사에게>눈 내린 밤 담비가죽 이불을 덮어주고)


待士恩禮 特殊터니(학사를 대우하는 은총과 예우가 특별하였는데)


淸泠蒲 自規소리(청령포 두견새 소리)


千古怨恨 그지없다(천고의 억울한 한 끝이 없네)


관선정에서 들리는 공부를 권하는 노래  p 194~199


세종과 문종의 업적을 칭송한 반면, 세조의 왕위찬탈과 단종의 비극을 이야기한 가사다. 조선 말의 유학자가 세조를 보는 시각과, 현대를 살아가는 내가 세조를 보는 시각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아래 2문장에 담겨있다. 결국 세조는 왕이였던 어린 조카를 끌어내리고, 심지어 죽여버린 비정한 삼촌으로 역사책에 남았다. 거기서 더 들어간다면, 조선 개국 이후 신하들에게 권력을 넘길 수 있는 첫 단추를 꾀어버린 사람이 되었달까.



이 외에도...


조선조 오백 년 동안 학문을 높이고 <어진 정치로 백성을> 다스려 교화하여


여러 현인이 무리 지어 나오니


예의를 아는 동방의 조선국이 세계에 빛났는데


종남산 큰나무 수령이 오래되어 속이 썩네.


당쟁이 일어나자 공론은 없어지고


사장학의 폐단인 형식에만 치중하여


과거시험을 거쳐야만 현량이 되고,


지체와 문벌이 잇어야만 재상이 되는 세상이로다. p 236~244



바다 건너온 도적이 빈틈을 타고 들어와


을사년에 늑약을 감행하였다.


정미년 6월에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서


의사 이준이 피를 뿌리며 억울함을 외쳤고,


하얼빈역에 울려 퍼진 벼락소리는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간신배가 나라를 팔아먹었으니


경술국치가 비통하고 분노가 치민다. p 250~254​



선조 이후 붕당정치를 비판하고, 바다 건너온 도적 왜놈들을 비판하고, 그런 왜놈들에게 빌붙은 간신배를 비판하였다. 조선 말을 살아간 유학자 겸산 홍치유는 비뚤어진 세상에 순응하지 않았으며, 비뚤어진 세상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눈을 가졌다. 



살아오며 비뚤어진 세상을 보아 온, 그 세상을 비판해온 나이든 유학자 겸산 홍치유. 그는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四千餘年(우리도 사천여 년)


歷史가 있는 나라이니(역사가 있는 나라니)


亂極思治 此時機에(어지러움이 극도에 달하여 태평한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 시기에)


老夫一言 省念하소(늙은이의 한마디 말을 돌이켜 생각해보시오)


관선정에서 들리는 공부를 권하는 노래  p 278



겸산이 살던 시대는 어지러움이 극도에 달했던 시기였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는 그 성격은 다를지언정, 어지러움이 극에 달한 시대라는 사실은 그때와 다를 바가 없다. 나는 나이든 유학자, 겸산 홍치유의 글을 읽고 곰곰히 생각을 해보았다. 난 비뚤어진 이 세상에 순응하며 사는 건 아닌가 하고.



난 그동안 공자왈, 맹자왈 - 죽은 자의 말만 읊으며 조선을 쇠락하게 하고, 외세가 침략할 빌미를 주었던 유학자들을 좋게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이렇게 제대로 된 사상을 가진 이가 있었으며, 삐뚤어진 세상을 비판할 줄 아는 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이 글을 쓴 겸산의 글을 읽고서야 알았다.




언젠가 지금은 사라진 관선정 터를 찾아가, 이런 겸산의 마음을 돌아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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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 스톡홀름신드롬의 이면을 추적하는 세 여성의 이야기
롤라 라퐁 지음, 이재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2월
평점 :
절판


일종의 장르소설이자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 「17일」.


장르소설을 좋아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저 표지! 저 표지 속에 있는 눈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건지 참으로 궁금하였다. 해서 읽기 시작했다. 물론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실화, ‘퍼트리샤 허스트’사건에 대해선 1도 아는 바가 없었기에, 해당 사건에 대한 배경지식을 위해서 잠시 인터넷 검색을 해본건 안비밀.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쓰여진 소설이기에, 그 사건에 대한 결말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이 사건에 대해선 이미 스포일러가 넘쳐나고, 심지어 그 사건의 중심인 퍼트리샤 허스트는 지금까지도 멀쩡히 살아있는 인물이다. 장르소설의 백미는 결말로 치닫는 과정과 반전인데, 이미 사건에 대한 내용이 다 알려진 상황에서 어떻게 소설을 집필한것일까? 그게 참으로 궁금했다.



소설 속 주인공 진 네베바. 미국인이었던 그녀는 퍼트리샤 허스트의 변호를 위해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인물이었다. SLA에게 납치되었던 그녀가, 왜 SLA의 멤버가 되어 돌아왔는지, 은행테러 주동자가 되었는지, 그녀가 SLA에게 납치된 후 세뇌되었던게 아닌지, 혹은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으로 인해 SLA멤버가 된 것은 아닌지. 이러한 내용을 잘 정리하여 ‘그녀는 SLA에 세뇌되었었기 때문에 테러를 한 것이니 그녀는 무죄다’ 라는 보고서를 만들어야만 했다. 그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각종 자료 수집을 위해 직원 프랑스인 비올렌을 고용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음,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한데…… 내가 생각하기에 네 해석은 좀 편협한 것 같아. 너는 실제 결과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있어. 이 사건들이 왜 일어났을까라는 생각은 안해 보았니?" p 042 



그저 순수하고, 맑게, 큰 문제 없이 살아온 여학생 비올렌. 그런 비올렌이 ‘퍼트리샤 허스트 납치 사건’에 관한 각종 기록과 기사를 스크랩하고 정리하는 일은, 진 네베바의 성미에는 너무나 맞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속에서 그려진 진 네베바는 일종의 아나키스트 처럼 보였기 때문이다(처음엔 페미니스트처럼 보였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모두 까는 진 네베바를 보면서 페미니스트보단 아나키스트 쪽에 가까워보였다).



진에 비올렌에게 1968년 봄에 대해 물어봤을 때, 비올렌은 자신이 어렸을 때 눈으로 본 사실만을 이야기 했을 뿐인데, 진은 그런 비올렌을 다그치며 ‘편협’하다고 했다. 물론 진의 말처럼 실제 결과가 아닌 ‘과정’에 대해 아는 것도 참 중요하지만, 비올렌이 왜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해선 생각치않고, 무작정 “너의 의견은 편협해”라고 대답하는건, 학생을 가르쳤던 교수로써도, 어른으로써도 문제가 있어보인다. 이건 내 가치관이 이러니, 너도 그렇게 생각해야한다고 강요를 하는 것 처럼 보인달까? 엄연히 살아온 세대가 다른 비올렌의 입장에선,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면 모를 수 있는 문제였다.



더군다나 이 책을 읽는 내내 비올렌에 대한 진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큰 고생없이 자라온 비올렌에게, 미국을 동경했던 비올렌에게 이런 진의 모습은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을것이고, 대단해보였을 것이다. 어린 여학생들이 커리어우먼을 보며 동경하는 뭐 그런거랄까? 그렇게 비올렌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진의 가치관에 물들며 진에게 ‘세뇌’를 당하게 된다.



퍼트리샤가 SLA에 납치된 후, 그들에게 ‘세뇌’를 당했다는 보고서를 써야할 진이, 정작 자신 스스로가 또 다른 사람을 세뇌시키고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사실이다. 참 아이러니 했다.



퍼트리샤의 아버지는 자기 딸을 구하려고 하지만, 우리는 모든 아이를 구하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할 것이다. 즉 은퇴자 카드나 실업자 카드, 퇴역 군인 카드, 장애인 카드, 전 재소자 카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질 좋은 육류와 채소, 유제품을 1인당 70달러어치씩 받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받아야 할 식량을 못 받게 될 경우 우리가 알 수 있게 길거리와 버스정류장, 영화관에서 불만을 토로하라. p 061 



프랑스인 비올렌은 미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아메리카 드림’같은 그런 동경이랄까? 그렇게 동경하는 미국에서 퍼트리샤 허스트라는 여성이 한 무장단체에 납치되었다. 그런데 퍼트리샤를 납치한 그 무장단체가 요구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에 있는 빈민들을 구호해달라는 거였다. 그렇게나 동경하던 미국은 극심한 빈부격차에 시달리고, 심지어 그 빈민을 정부에선 돌봐주지 않는 반면, 테러를 일으키는 무장단체가 오히려 빈민들을 돕자고 하다니! 이렇게 모순적인 미국의 모습은, 미국을 동경하던 비올렌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 뿐만인가? 진은 비올렌에게 1704년 아메리카 원주민 습격사건을 이야기 하며, 문명화된 미국이 원주민의 터전을 파괴하고 약탈한 사건을 들려주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에 분노한 원주민들이 미국 여성들을 납치하였다. 이후 풀려난 미국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자력으로 원주민들에게 탈출했던 여성들은 원주민에게 몸을 판건 아닌지 의심을 받았고, 협상으로 풀려난 여성들에겐 가문의 명예를 더렵혔다는 모욕만 남았다.



하지만 미국은 앞뒤를 자르고, 그저 원주민들이 문명화된 미국을 습격했다는 사실, 그런 원주민들이 미국의 여성들을 인질로 잡아갔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자, 이 사건은 비올렌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문명화된 미국이 원주민의 터전을 파괴하고 약탈하는 건 폭력이 아닌걸까? 풀려난 인질들에 대한 미국 여론은 또 다른 폭력이 아니었던걸까?



또 하나, 무장단체에 잡혀있던 언론재벌의 상속녀 퍼트리샤 허스트. 그녀는 어땠을까?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퍼트리샤 허스트는 그저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고 자랐을 것이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부모가 하라는 대로 행동하고, 약혼자가 성관계를 원할 때마다 그에 부응하며 살았다. 그런 그녀가 납치되었을 때,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자기를 납치한 사람들 중 자기 또래의 여자들도 있다는 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들이 미국의 빈민들을 이야기하며, 그들을 도와야한다고 했을때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SLA는 뒤집힌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충격을 안겨주었지요. 즉 백만장자인 허스트 부부는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해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었고, 빈민구호협회들은 한 무장투쟁단체의 주도적 행동에 쌍수를 들어 환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p 083



이제 그녀는 인정한다. 납치야말로 그녀에게는 하나의 구원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p 118



"젊은 미국인이라는 것은 곧 베트남에서 죽은 친구들의 수를 세는 것을, 만일 흑인이라면 경찰의 검문 때 미처 신분증을 내밀 겨를도 없이 머리에 총을 맞아 죽는 것을 의미하지. 또한 자기 부모가 현재의 상황을 변화시키거나 정부의 계속되는 실패를 막지도 못하고, 희망을 불어넣을 수 있는 정당이나 이념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해." p150



퍼트리샤 허스트의 부모는 SLA가 요구하는 대로 빈민구제를 했고, 미국 국민들은 환호했다. 오히려 SLA를  잡으려던 경찰들을 문전박대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SLA가 퍼트리샤 허스트를 납치하고, 빈민구호를 외치던 그 시기는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냉전시대. SLA처럼 급진적인 단체는 미국에겐 암덩어리였다. 물론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겠지만, 적어도 그때는 더욱 그랬다.



미국 정부가, 경찰이 타니아로 개명한 퍼트리샤 허스트와 SLA를  소탕하기위해 급습했던 그날은 또 어땠나. SLA가 숨어있다고, 곧 소탕을 하겠다며, 전국으로 생방송을 하던 그 모습. 그 건물안에 민간인이 있건 말건 총질을 하던 그 모습은 또 어땠나. 그 건물이 재벌들이 사는 건물이었다면, 과연 경찰들이 그렇게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소개작전을 펼쳤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SLA소탕작전은 미국이 그만큼 빈부격차가 심하고, 빈민들의 처우가 어떤지를 확연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저는 제 부모님의 신중한 삶을, 그들의 비겁함을 혐오했어요. 그들이 노숙인에게 동전 한 닢 던져줄 때의 그 인색한 호의를, 그들이 '우린 헛된 꿈 같은 건 일절 꾸지 않아'라고 뻐기듯 말할 때의 그(씩씩한 기상으로 위장된) 씁쓸한 체념을 혐오했어요. 저는 더 이상 지금의 나로 남아있지 않을 거에요. 저는 이런 이야기를 비올렌에게 털어놓았습니다. p 196



비올렌은 이러한 미국의 민낯을 보며, 더욱 진에게 빠져들었다. 비올렌은 또 다른 진 네베바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후 시간이 한참 지났다. 이미 중년이 된 비올렌은 동네 여자아이를 은연중에 자기처럼 세뇌시켜갔다. 진의 행동과 언사는 비올렌을 세뇌시켰고, 진의 모든것을 기록으로 남긴 비올렌은 그 노트를 한 소녀에게 보여줌으로써 그 소녀 역시 바뀌었다. 



진 네베바는 퍼트리샤 허스트의 무죄를 위해, 그녀가 무장단체에게 ‘세뇌’ 되었다고 증명하는 보고서를 쓰려 했으나, 은연중에 퍼트리샤에게 공감하게 되었고, 그녀의 보고서는 다른 방향으로 쓰여졌다. 아니 쓰여졌을 것이다. 퍼트리샤 허스트의 재판에 그녀의 보고서가 채용되지 않은 것을 보면 말이다. 아마도 진은 퍼트리샤가 SLA로 전향한 사실에 공감했을 것이고, 그녀가 SLA로 전향한 이유는 세뇌가 아니라, 다름아닌 미국의 문제라고 썼을 것이다.



그렇게 퍼트리샤에게 공감한 진의 영향은 비올렌과 어린 소녀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과연 비올렌과 그 어린 소녀는 정말 퍼트리샤에게 공감을 하고 싶었을까? 그녀들은 진 네베바같은 가치관을 원했을까? 그녀들이 원한건 정말 진 네베바 같은 가치관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다른 가치관을 갖고 성장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적어도 진 네베바는 그녀들의 성장기회를 박탈시킨 것이다. 



그렇게 진에게 세뇌아닌 세뇌를 당한 비올렌과 여자아이는 퍼트리샤 허스트의 재판을 어떻게 보았을까?



"퍼트리샤의 유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차고 넘치지요. 하지만 그녀는 부자였기 때문에 이번 재판에서 무거운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거에요. 허스트가는 퍼트리샤가 석방되도록 애썼고 1979년에는 캠페인까지 해서 성공을 거두었어요. 카터가 그녀를 특별 사면해주고, 클린턴이 복권시켰지요. 매우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죠. 미국에서 이런 특혜를 받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으니까.(중략) 퍼트리샤가 감옥에서 나오던 날, 100여명의 기자들이 몰려와서 어린아이처럼 어쩔줄 몰라 하는 그녀의 미소와 '용서해주세요'라고 쓰인 티셔츠를 사람들의 기억속에 영원히 남겼지요. 말하자면 퍼트리샤는 타니아를 땅에 묻는 데 동의한겅요. " p 307



SLA로 전향하며 타이아가 되었던 퍼트리샤 허스트는, 타니아를 버렸다. 그녀는 다시 언론재벌가 상속녀 퍼트리샤 허스트로 돌아갔다. 심지어 미국은 다른 SLA 단원들은 잔인에게 죽이기도 했지만, 퍼트리샤 허스트만은 달랐다. 당시 유력 정치인이었던 지미 카터가 구원을 요청했고, 클린턴이 복권시켰다.



극심한 빈부격차로 인해 생겨난 무장단체 SLA. 빈민을 구호하라며 총을 들었던 SLA. 물론 그들이 잘했다는 건 아니다. 민간인을  납치하고, 민간인을 살해한 그 순간부터 SLA는 그저 그럼 범죄자일뿐이니까. 다만 그들이 문제를 제기했던 극심한 양극화, 극심한 빈부격차. SLA이 소탕된 이후에도 이런 빈부격차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지금도 해결되지 않았다.



언론 재벌 상속녀였던 퍼트리샤 허스트는 유명인사들이 구원을 요청했고, 실제로 복권되었다. 심지어 그녀는 지금도 잘먹고 잘 살고 있다. 타니아로 개명하고, SLA로 전향했던 그 시절은 없었던 것 마냥.



이 소설은 분명 실화를 바탕으로한 장르소설이 맞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분명 이 소설은 ‘퍼트리샤 허스트’ 사건을 배경으로 쓰여진 소설이지만,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했던 건 그렇게 간단한 내용이 아니었다. 저자는 서로 다른 세대를 산 세 여성을 전면으로 내세웠다. 분명 같은 시간속에 살았고, 만날 수 있던 시간속에 살았던 세 여성이지만, 살아온 시간이 다르고, 살아온 나이대가 달랐기 때문에, 그녀들의 가치관은 다 달랐다. 그 세 여성이 이 실화 속 주인공인 ‘퍼트리샤 허스트’가 SLA로 전향하는 과정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된 각종 사회문제를 짚어내었다.




우리는 이런 사회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 저자는 독자로 하여금 우리 눈 앞에 있는 사회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한번쯤 깊이 생각해보라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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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5-16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 자서전도 있지 않나요?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걸로 기억되는데 이 책도 재미있겠어요. *^^*

피로 2021-05-17 10:24   좋아요 0 | URL
아마 그럴거에요 ㅎㅎ! 요즘도 가끔 해당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