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숨겨진 왕가 이야기 - 역사도 몰랐던 조선 왕실 가족사
이순자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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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둘러보다가 과거에 읽었던 역사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 제목은 『조선의 숨겨진 궁가 이야기』. 어려서부터 답사여행을 좋아했었던터라, 답사에 도움이 되는 역사책을 자주 사곤 했었다. 이 역사책을 구입한 이유도 답사였다. 특히 이 책을 구입할 즈음엔 조선 궁궐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던 바로 그 시기이기도 했다.




분명 조선의 궁궐은 5개(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인데, 왜 일반적으로 경희궁을 제외한 4대 궁으로 이야기하는지


종로에는 운현궁이, 강화도에는 용흥궁이 있는데 이 저택들도 내가 생각하는 ‘궁궐’이 맞는건지


역대 조선 왕들은 자신의 아들, 딸이 결혼하면 궁 밖에 저택을 하사했는데, 그럼 그 많던 저택은 다 어디로 갔는지 


예컨데 구로 궁동은 선조의 딸인 정선옹주가 살았던 곳이며, 그 저택이 궁궐과 같다하여 지명도 ‘궁동’으로 남았는데, 그럼 수많은 왕자군과 공주, 옹주 집들은 전부 궁궐같은 으리으리한 저택이었는지


기타 등등등!!



조선의 궁궐과 조선 왕실 가족들이 살던 곳에 대한 궁금증이 폭발하던 때였다. 그런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읽었던 책이었다. 물론 책을 읽은지가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기에^_T. 겸사겸사 이번에 다시 읽어보았다.



 





주의사항 ! 이 책은 조선 역대 왕들이 거주했던 5대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왕으로 즉위한 후 거주했던 5대 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보통 조선에서 왕이 되는 방법은 왕의 아들로 태어나 세자 시절을 거쳐, 부왕이 죽으면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게 일반적이다. 따라서 세자시절을 비롯해 왕위에 즉위해서도 경복궁 내지는 창덕궁에 거주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사를 통틀어서 정상적인 방식으로 왕위에 오른 왕들이 몇 없었다. 대다수의 조선 왕들은 세자가 아니었지만 반정을 일으켜 왕이 되거나, 선왕이 후사가 없어서 지명되어 왕이되거나, 세자였던 형님이 나가리(?) 되면서 왕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다. 고로 왕이 되기 전까지는 세자가 아닌, 그저 왕의 아들로 궁 밖에 나가서 살았던 것이다.



그렇게 궁 밖에 나가서 살던 왕자들이 갑자기 왕이 되었다. 자연스레 왕자시절에 살던 저택은 ‘왕이 살던 곳’이 되었고, 그렇게 ‘궁’이라는 글자가 붙게된다. 하지만 즉위한 왕이 사는 궁궐은 아니다. 대신 궁에 준하는 집, 집 가(家)라는 자를 붙여서 ‘궁가’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함정은 궁가가 왕이 살던 곳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왕이 대군 및 왕자군, 공주 및 옹주들에게 하사하는 저택들 역시 궁가라 불리었다. 뿐만아니라 왕을 낳은 후궁이라던가, 대원군 등의 신주를 모신 사당도 ‘궁’이다. 



고로 이 역사책은 ‘궁’이라 붙여진 저택에 살았던 조선 왕실 사람들의 이야기다. 왕이 되기 전이었던 대군들이나 왕자군 이야기도 당연히 포함이다. 예컨데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 영조가 연잉군 시절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조선 왕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이후 왕실 가족들이 떠난 궁가들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현재는 어떤 모습인지도 확인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조선의 궁가들은 한성, 지금의 ‘서울’에 포진되어 있으므로 서울 답사 여행 역사책으로 추천한다. 다만 이 책이 발간된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현재 내가 소장한 책은 절판되었다. 대신 2013년에 동일한 내용으로 개정판이 나온듯 하다.




어의궁은 한성부 서부 인달방에 있던 궁가로 인조가 반정을 일으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상어의궁은 한성부 중부 경행방에 있던 궁가로 효종이 태어난 곳이고, 하어의궁은 한성부 동부 숭교방에 있던 궁가로 인조와 효종이 살았던 곳이다. 상어의궁은 ‘잠룡지’ 라고도 부르고, 하어의궁은 ‘어의동궁’, ‘용흥궁’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어의궁이라고 하면 하어의궁을 말하는데, 이곳에서 인조 이후 14명의 왕비와 왕세자빈의 가례를 올렸다. p 048



하어의궁은 1638년(인조 16)부터 효종, 현종, 숙종 대를 거쳐 영조, 순조, 현종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실의 가례소로 중요시 되었다. 특히 숙종의 세 왕비는 모두 이곳에서 가례를 올렸고, 1757년 6월 영조는 15세의 정순왕후를 이곳에서 맞아들였다. 영조의 두 아들과 손자 정조 가례식도 이곳에서 올렸다. 조선 후기 왕비와 세자빈들의 가례소인 이곳에 오늘날 웨딩프라자가 들어섰으니 확실히 땅의 기운을 무시할 수 없는 것 같다. p 053



창의궁은 한성부 북부 순화방에 있던 궁가로 영조가 연잉군 시절에 살던 곳이다. 이곳은 원래 효종의 딸 숙휘공주와 부마 정제현이 살았는데, 숙종이 연잉군에게 하사했다. 경종이 후사 없이 죽자 왕세제 연잉군이 경종의 뒤를 이어 영조로 즉위했다. 그후 효장세자가 죽자 이곳에 효장묘를 세우고, 의소세손이 죽자 의소묘를 세웠다. 순조 때는 효명세자의 사당인 문효묘를 세우기도 했다. 1900년에는 의소묘와 문희묘(문효세자 묘)를 영회전으로 옮기면서 창의궁은 폐궁되었다. p 063



영조 즉위 4년 후인 1728년, 효장세자가 10세로 요절하자, 영조는 다음 해 11월 5일 “창의궁은 곧 사저로 동궁에 속한 것이니, 만일 지금 그 궁에다 사당을 세운다면 어찌 사세가 둘 다 편리하지 않겠는가?” 하며 세자가 어린 시절에 살던 창의궁에 사당인 ‘효장묘’를 세웠다. p 068



일제강점기에 비어 있던 창의궁은 1908년 동양척식회사가 소유하면서 2층 건물의 직원 사택이 들어섰다. 1912년 토지조사사업 당시 동양척식회사 소유의 1필지였는데 이후 최창학의 소유가 되었다. 광복 후 필지가 분할, 매각되어 2011년 현재 108개의 필지로 나뉘었다. 종로구 통의동 35번비 15호에는 ‘통의동 백송’이 있어 이곳에 고택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p 073




영조의 후손들이 줄줄이 요절했다. 정확히는 후계를 이을 후손들이. 아들 효장세자를 시작으로 손자 의소세손, 증손자 문효세자, 고손자 효명세자 까지. 왕위에 즉위하기 전까지 영조가 살았던 그 저택이, 요절한 영조의 후손을 모시는 사당이 되어버린 운명의 장난인걸까?




운현궁은 한성부 중부 정선방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집이자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명복이 태어나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살았던 궁가다. 이곳은 구름재, 즉 운현에 있어 ‘운현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고종이 명성황후와 가례를 치른 곳이고,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며 나랏일을 보던 곳이기도 하다. 한양 내의 궁가 중 유일하게 보존되어있고, 소규모 궁궐과 같이 4대문을 갖춘 곳으로 궁가의 원형을 살펴볼 수 있다. p 077



흥선군이 부친의 묘를 이장하느라 살고 있던 안동별궁을 정리했기 때문에, 남연군의 아들들은 운현 근처로 이사를 했다. 이때 흥완군 이정응은 계동에, 흥선군은 운현 아래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묘를 옮기고 나서 7년 후인 1852년(철종 3년) 드디어 운현 집에서 둘째 아들 명복이 태어났다. 풍수지리에서는 묘를 쓰고 얻은 자식이 그 묘의 발복을 얻는다고 하는데, 명복은 조상의 음덕으로 태어나 운현 언덕에서 뛰어놀며 큰 소나무를 타고 놀던 12세의 소년이 되었다. p 080



고종은 왕위에 오른 후 대원군 궁가의 면세 전결 1,000결에 대한 토지 값으로 은 2,000냥을 실어보내고, 궁장이 갖춰지기 전에는 국가에서 콩 100석과 선혜청에서 쌀 100석을 5년 동안만 실어보내라고 했다. 또한 호조에서 집을 수축하는 비용으로 1만 7,830냥을 보냈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살던 집을 수리하면서 신축을 하는데, 전국 일류의 목수들과 최상급의 자재들을 동원했다. 운현궁의 규모가 가장 컸을 때는 약 3만 3,058제곱미터(1만 평)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 규모와 화려함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p 085



일제강점기에 운현궁은 구황실 재산으로 압류되었으나 그 후손들이 거처하고 있었다. 1948년에는 미 군정청이 운현궁은 왕실 재산이 아닌 개인 재산이라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개인 소유로 등기되었다. 이때부터 개인 재정으로 운현궁을 유지했는데,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자 예식장도 운영하고, 땅을 분할해서 팔기도 하며, 도로변으로 상가를 지어 운영하기도 했다. p 092



종로구 운니동 114번지 7호는 덕성여자대학교 종로 캠퍼스다. 운현궁이 팔려나갈 때 이 터와 양관 건물은 덕성학원의 소유가 되었고, 현재 양관은 덕성학원 법인사무국으로 사용하고 있다. 종로구 운니동 114번지 8호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헌병초소가 있던 자리로 운현궁의 움직임을 감시했던 곳이다. 1968년 운현궁의 뒤뜰 약 3,074제곱미터를 일본대사관에 매각하려 했으나, 시민들의 반대로 취소한적이 있었다. 1975년 일본문화관이 입주하여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종로구 운니동 114번지 9호와 114번지 31호는 김승현의 소유로 9호는 서울빌딩이고, 31호는 운현궁의 별당인 영로당이다. 1948년 9월 4일 박찬주는 운현궁의 소유권을 이청에게 이전하고, 9월 7일 영로당 권혁을 김승현에게 팔았다. 현재는 김승현의 셋째 아들 김영무가 소유하고 있는데 그는 법무법인 김앤장의 대표 변호사다. p 094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궁가는 몇 개 없다. 운현궁, 용흥궁, 칠궁 정도다. 그 중에서도 운현궁에선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운현궁은 흥선군 이하응의 저택이다. 흥선군은 뛰어난 정치능력으로 자신의 차남을 왕으로 만들었다. 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다. 이미 망국 열차를 탔던 나라였고, 왕이된 고종마저도 백성을 생각하지 않았다. 뭐 고종에 대해선 할말이 많으나, 워낙 관련 포스팅을 많이 했으니 각설하고. 



운현궁의 역사만 봤을 때, 흥선대원군이 처음부터 운현궁에서 산 건 아니었다. 부친인 남연군 묘를 예산에 이장하는 과정에서 돈이 부족하여, 자신이 살던 곳들을 정리하고 이사 온곳이 바로 운현궁이다. 운현궁 역사의 시작점이 남연군 묘 이장이라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알았다. 약간 좀 새로운 느낌이랄까? 이 외에도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이 되는 과정에서 운현궁이 지금 모습이 되기까지도 흥미롭기 그지없다. 운현궁 역사의 끝에 김앤장이 나올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누동궁은 한성부 중부 경행방에 있던 궁가로 철종의 생부 전계대원군이 살았고, 철종이 태어난 곳이다. 철종은 왕위에 오르고나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형 영평군을 이곳에 살게 했다. 1869년에는 안동별궁에 있던 전계대원군의 사당을 이곳으로 옮기며 ‘누동궁’이라고 했다.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박영효의 혼례가 이곳에서 거행되기도 했다. p 115



1752년 사도세자의 승은을 입어 승휘에 오른 임씨는 은언군과 은신군을 낳은 후 양제가 되었다. 1762년 사도세자가 죽은 뒤에 임씨도 폐서인되어 두 아들과 함께 궁궐을 나와서 전동에 살게 되는데, ‘양제궁’이라 불렸다. 영조가 은언군의 행방을 탐지할 때 ‘전동의 집’을 언급했던 적이 있다. 영조는 죄책감에서인지 사조세자의 서자들에게 관대했다. 그러나 은언군과 은신군은 젊은 나이에 늙은 재상이 타는 남여를 타고 다니고, 시전 상인들에게 수백 냥의 빚을 지고 갚지 않는 등 방자한 행동을 하여 1771년 제주도 대정현에 안치되었다. 그해 은신군이 제주에서 사망하자, 이에 놀란 영조는 즉시 은언군을 석방하라는 명을 내리고, 은언군이 살 두어 칸의 집을 사서 지급하도록 하고 생모 임씨와 노복의 왕래를 허락했다. p 116



은언군은 정도 등극 후 홍록대부에까지 올라 세 아들 이담(상계군), 이당(풍계군), 이광(전계군)과 편안히 살았다. 그러나 1786년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이자 정조의 후궁인 원빈이 죽자, 은언군의 장자 상계군을 원빈의 양자로 삼았다. 그리고 상계군을 가동궁이라 하며 왕위를 잇게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홍국영이 쫓겨나 병사한 뒤로도 그 일당들은 계속 역모를 꾸몄고, 상계군은 자신이 역모에 연루되자 자살했다.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은언군도 연루되었다 하여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천주교인으로 순교하자, 향년 48세로 강화도 귀양지에서 사사되었다. 송씨와 신씨는 신유박해 때 유일한 왕실의 순교자가 되었다. p 117



은언군이 사약을 받아 죽고 난 후 풍계군과 전계군은 강화도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1822년(순조 22년) 순조는 사촌동생들이 살고 있는 강화도 집의 가시울타리를 철거하여 일반 백성처럼 살게끔 했다. 그리고 혼사 비용을 챙겨주고 종친부가 주관하여 혼사를 거행하게 했다. 전계군은 이 때 세 아들 원경, 경응(영평군), 원범(철종)을 낳았다. 이 때는 순조의 배려로 전계군이 누동궁과 강화도를 오갈 때인데, 철종은 누동궁에서 태어났고 이곳에서 자랐다. 그런데 1844년(헌종10년) 안동 김씨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하급 무사인 민진용 등이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려다 발각되었고, 이 일로 원경이 사사되었다. 따라서 경응과 원범은 또다시 강화도에 유배되었다.p 119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순조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19세의 강화도령 원범이 입궁하여 덕완군에 봉해지고 왕위에 올라 철종이 되었다. 따라서 원범이 살던 곳은 왕이 살던 잠저라 하여 ‘용흥궁’이라 불렸다. 본래 용흥궁은 ‘철종조잠저구기’라고 쓴 비석과 비각이 있는 초라한 초가집이었다. 이것을 1853년(철종 4년)에 강화도 유수 정기세가 기와집으로 개축하고, 1903년 전계대원군의 사손 청안군 이재순이 보수하여 오늘날 우리가 보는 규모의 ‘용흥궁’이 된 것이다. p 120




철종의 잠저는 누구나 다 알듯 강화도에 있는 용흥궁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왕 즉위 전, 전계군의 아들 이원범으로써 강화도 유배시절 살았전 잠저다. 철종은 즉위하기 전까지 한양에도 거주했다. 바로 철종의 부친, 전계대원군의 저택인 누동궁이다. 철종은 누동궁에서 태어났다.



개인적으로는 운현궁의 역사도 흥미로웠지만, 누동궁의 역사도 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흥미로웠다. 뭐랄까? 은언군이 사도세자의 서자라는 것도 알고있고, 정조 때 상계군 역모 사건도 알고 있고, 그로 인해 은언군과 은언군의 아들들이 강화도로 유배간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다 왕실 후사를 이을 사람이 없어서 은언군의 손자 원범이 철종으로 즉위했다라는 내용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내용만으로는 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강화도에서만 살았던 이원범이 진짜로 왕이 될 수 있는건가? 글자는 알고 있는건가? 뭐 이런 의문들 말이다. 



하지만 이 책 덕분에 그 의문이 풀렸다. 애초에 철종의 부친인 전계군은 순조의 배려아래 한양과 강화도를 자유로이 오갈수 있었다. 그 덕분에 원범이 한양 누동궁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자랐다. 이복형 원경의 역모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복형 원경의 역모사건으로 인해 강화도로 유배간 것일 뿐, 원범은 한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순진무구한 강화도령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담이긴 하지만, 왕위를 이어야할 영조의 후손들은 줄줄이 요절하고, 영조가 직접 죽인 아들 사조세자의 후손들은(정확히는 방계지만) 줄줄이 역모죄에 휩쓸려 죽어나갔다는게 참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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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호에 비친 내 얼굴 끝나지 않은 한국인 이야기 3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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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린 ‘끝나지 않은 한국인 시리즈’ 세번째 권 『바이칼 호에 비친 내 얼굴』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고 이어령 선생이 작고하기 전 집필했던 원고를, ‘끝나지 않은 한국인 시리즈‘로 엮은 인문학책이다. 이 시리즈야말로 진짜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며, 인문학책으로도 단연 돋보적이다. 개인적으로 한창 타올라야할 젊은 지성들, 20대 30대에게 추천하고 싶은 인문학책이기도 하다.


이 인문학책  『바이칼 호에 비친 내 얼굴』은 ‘사람’이 주제다. ‘한국인’을 찾는 여정이 담긴 책이다. 정확히는 한국인의 ‘얼굴’을 찾기 위한 여정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과 우리가 배워온 역사, 우리 몸 속을 이루고 있는 유전자 등 한국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요소를 아울러 한국인의 ‘얼굴’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고릴라, 침팬지, 오랑우탄 같은 유인원들을 포함한 영장류가 점차 진화 발전하여 현생의 인류에 이르렀다는 것이 우리가 가장 광범위하게 인류의 기원으로 믹도 있는 진화론이죠. 이 중에서 인류의 조상이 된 유인원은 다른 유인원들과 달리 정글과 숲의 나무에서 내려와 너른 평지에서 삶의 터전을 잡게 된 유인원들입니다.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탄자니아, 케냐는 사막지대도, 정글도 아닌 사바나 지역이에요. 즉 숲에서 나와 초원에서 생활하게 된 유인원들이 인류의 조상입니다. p 026



다시 말해 북방계를 대표하는 고대 악마문 동굴인과 현대 베트남 및 대만에 고립돼 살고 있는 원주민의 게놈(유전체)을 슈퍼컴퓨팅을 통해서 융합했더니 현대 한국인의 게놈과 아주 유사하더라는 겁니다. 또 남방계와 북방계 두 계열의 혼합 중에서도 실제 한국인은 남방계 아시아인과 유전적 구성이 가까웠다고 합니다. 특히 한국인과 일본인, 중국의 한족은 유전자의 동일성이 매우 높게 나타났습니다. p 054



인류 아프리카 기원설을 전제로 인간 진화생물학자들은 ‘아웃 오브 아프리카’ 경로가 두 개의 길로 나뉘었을거라고 추정한다. 하나는 유럽, 또 하나는 인도를 거쳐 아시아 남하하는 경로다. 이렇게 나뉜 인종을 코카소이드(백인), 몽골로이드(황인), 니그로이드(흑인)라 부른다. 이 중에서 코카소이드 및 몽골로이드가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택한 인종이다. 조금 아쉬운 점은 단어 자체에 피부색으로 구분한다는 차별적인 요소가 들어있다는 점이다. 애초에 캅카스 산맥을 넘은, 코카소이드(서양인)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대놓고 차별적인 단어라는 점에서 요즘은 이 단어들을 잘 쓰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인종은 ‘몽골로이드’로, 코카소이드보다 더 먼 길을 택한 인종이다. 몽골로이드는 한국인 조상이기도 히며, 세부적으로 북방계와 남방계로 나뉜다. 북방계는 시베리아로 북상하여 바이칼호까지 다다랐는데, 때마침 신빙하기가 도래하여 바이칼호에 갇혔다. 바이칼호 근처에서 영하 70도라는 극한의 추위를 견딘 그들이 바로 한국인의 직접적 조상이다. 남방계는 한국인이라면 무조건 골라낼 수 있는 얼굴을 지닌(!) 인종으로 대체로 중국을 거쳐 동남아, 일본(오키나와 등), 호주로 흘러간 인종이다.



세계인의 용모에 대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이 획득하고 있는 용모적인 특성이 있다고 해요. 해부학에 근거해 전 세계인의 표본을 대상으로 방대한 자료의 조사는 물론 엄격한 분석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통계인데, 한국인 만의 네 가지 특성이 있다고 합니다. p 057



눈이 세계 1등으로 작다. 

털이 없기로 세계 1등이다(털이 많은 서양인과 비교해 털이 적은 한국인이 더 진화했다는 이야기).

귀에서 머리까지 길이가 1등이다. 즉 두상이 크다(즉 뇌도 크다?).

한국인의 치아는 세계에서 제일 크다(우리의 발음 체계와, 식문화도 깊은 연관이 있다).



바이칼호에서 시작된 우리 조상들의 1만 km가 넘는 대장정이 지금의 우리 얼굴 모양과 무관하지 않아요. 신몽골로이드만이 바이칼호에서 영하70도의 추위를 견뎌낸 사람들입니다. 얼굴 중에서 추위에 가장 많이 노출될 수밖에 없는 부위가 코와 눈이에요. 혹독한 추위를 이기기 위해 코는 더 낮아지고, 눈두덩은 두꺼워지게 됩니다. 또 얼굴 광대뼈는 튀어나오게 되었어요. 쌍커풀 없이 두툼해진 눈, 튀어나온 광대뼈, 납작한 코, 이것은 그 어떤 인간도 겪어보지 못한 그 추위 속에서 살아남아 한 발 한 발 내디뎌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온, 그래서 결국 한반도에까지 이른 우리 선조들이 남겨준 얼굴입니다. 혹한이 만들어낸, 바이칼호가 만들어낸 조각이고 예술품이고 상징인 셈이지요. p 059



실제로 문무왕릉비에 보면 ‘투후제천지윤’이라는 구절이 있지요. 투후는 흉노 휴도왕의 태자인 김일제를 말합니다. 정말 신라 왕족의 직계 조상이 흉노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왜 이런 글을 남겼을까를 추론하면 이렇습니다. 고구려, 백제는 부여 계통의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북방계 사람들이었죠. 삼국통일을 완성한 신라 역시 그에 못지않은 북방계 혈통과 용맹을 내세우기 위해 다른 북방계 흉노의 후손임을 내세운 것은 아닐까 싶어요. p 065



본 책 내용에는 실려있지 않지만, 위 문무왕릉비에 적혀있는 ‘투후제천지윤’이라는 문구와 신라와 북방계 연관성에 대해 보충해보려 한다. 신라는 한반도계 고대국가 중 유일하게 문화가 다른 나라다. 한마디로 부여를 뿌리로 하는 고구려, 백제와 다르다는 이야기다. 



예컨데 신라는 다른 고대국가와는 달리 황금 문화 및 (나뭇가지 또는 사슴뿔 형태)금관 문화를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난생설화가 주류인 다른 고대 국가와 달리, 금궤짝 설화(김알지)가 있다. 물론 신라도 박혁거세의 난생설화가 있지만, 고대 신라부터 최정점에 이르고, 쇠락할 때까지 권력을 잡았던 것은 금궤짝 설화를 지닌 김알지의 후손들이다. 그 뿐만 아니라, 신라인들은 자작나무로 생필품, 공예품을 만들어 사용했다. 대표적인 유물이 천마총 말다래다. 



놀랍게도 이런 황금 문화, 금관 문화, 자작나무 생필품 등은 북방계 유목민족들에게서(흉노나 훈족 등) 보이는 대표적인 전통이다. 특히 신라에선 자작나무가 자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작나무 생필품이 널리 애용되었다는 것은 자작나무 공급처가 있다는 말이 된다. 모두가 알다시피 자작나무는 추운 지방에서 자라는 대표적인 수목이다. 한반도에서는 강원도, 그것도 인제 같은 북쪽 지역에서 자라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신라는 북방계 유목민과 동일한 문화를 지니고 있었으며, 북방에서 주기적으로 자작나무를 공급받고 있었고, 문무대왕릉비에 ‘투후제천지윤’이라는 문구를 새길 정도로 북방계와 친밀한 관계였다는 것이 합리적인 의심이다. 친밀한 관계라고 애둘러 말했지만, 사실상 북방 유목민계 후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신라가 한반도 남부를 통일하면서, 신라의 문화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물론 이후에 후삼국 시대를 지나, 고려가 다시 한반도를 통일했다고는 하나, 고려는 친신라 노선을 지향했다. 애초에 고려는 신라 호족들의 연합에서 시작한 나라였으니까. 결과적으로 한국인 조상 찾기 중 제일 가까운 조상을 고르라고 치면 신라인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부여를 뿌리로 하는 고구려 및 백제 역시 북방계이긴 하나, 신라를 필두로 하는 시베리아쪽 북방계와 문화나 그 결이 달랐을 뿐이다.



동북아시아에 있어 북방민족일 수록 얼굴이 수직팽창하고, 남방민족일수록 수평팽창한다는 설이 있다.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를 읽다 보니 이런 문장이 나오더군요. 수직팽창은 얼굴이 길쭉하거나 달걀모양이란 뜻이고, 수평팽창은 넓적하거나 넙대대한 얼굴을 말합니다. 한국인은, 북한을 빼고 남한에 사는 한국인은 남하 종족(북방계)과 북상 종족(남방계)이 절충된 얼굴로 보는게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과거만해도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예를 들어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6~7세기 경 백제 귀족 부부의 머리뼈를 복원해 점토로 얼굴을 재생한 것을 보면 수직팽창한 북방계임을 알 수가 있어요. 곧 고구려의 유민이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합니다. p 108



서양 사람들은 대체로 어릴 때부터 소프트한 유동식을 먹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딱딱한 걸 주로 먹죠. 딱딱한 걸 먹기 때문에 세계에서 치아가 가장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씹기보다는 갑니다. ‘그라인딩’입니다. 서양의 ‘츄잉’과 구분되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추위를 견뎌온 것 때문만이 아니라 이렇게 맷돌처럼 그라인딩하는 식문화 때문에도 턱이 발달하고 광대뼈가 튀어나오게 된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것 역시 하나의 설 입니다. p 109




위에서 한국인 얼굴을 찾기 위해 인류의 ‘시작점’을 찾아보았다면 이번엔 한국인의 ‘미소’다. TV를 키면 나오는, 요즘 한국인들의 미소가 아닌 천년, 이천년을 내려온 한국인의 미소다.



이번에는 한국인의 얼굴에서 미소를 찾아볼까 합니다. 미소야말로 한국 문화의 얼굴입니다. 멋쩍에 웃는 웃음을 ‘오리엔탈 스마일’이라고 하지만 꼭 그런것만은 아닙니다.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두루봉 동굴에서 출토된 ‘뼛조각 인물상’을 본 적이 있나요? 코는 없지만 눈과 입은 뚜렷합니다. 입을 벌려 아이가 밝게 웃는 모습 같기도 합니다. p 113


삼국시대 대표적인 작품인 국보 78호 미륵보살반가상을 떠올려 봅니다. 두 손가락으로 가볍게 볼을 짚고 사유에 잠긴 미륵보살의 눈웃음에는 중후한 기상이 서려있어요. 이런 미소를 염화미소라고 하지요. (…) 국보 80호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집상은 상투 모양의 머리에 콧날은 날카롭지만 분명 입가에 미소가 번져 있습니다. 무건가 넉넉하게 품에 안는 듯한 부처님의 자비로움이 느껴지면서도 왠지 장난기가 묻어나는 미소라는 생각도 들어요. p 116


 

사람 크기와 맞먹는 등신대로 제작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83호)은 미륵보살반가상(국보 78호)와 함께 국내에서는 가장 큰 금동반가사유상으로 높이가 93.5cm나 됩니다. 얼굴의 눈두덩과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풍기고 있어요. 알듯 모를 듯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도 같습니다. 해탈의 웃음일지도 모릅니다. (…) 국보 24호인 석굴암 본존불인 석가여재롸상의 미소도 빼놓을 수 없지요. 모든 얼굴의 부분들이 단 한 순간의 어긋남도 없이 원만한 완벽의 조화를 이루며 지극히 인자하고 고요한 웃음을 짓습니다. p 117



신라시대 유물인 얼굴무늬 수막새 또는 인면문 수막새에는 가장 한국적인 얼굴의 미소가 담겨 있습니다. 경상북도 경주시 탑정동 영묘사지에서 출토된 미소 막새는 ‘신라의 미소’ 혹은 ‘천년의 미소’로 불릴 만큼 신라를 상징하는 유물로 자리잡았습니다. 당대 신라인의 미소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겁니다. 아마도 신라인들은 나쁜 기운을 몰고 올 험상궂은 귀신이 미소 막새를 만나면 힘을 잃길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p 121



본 책을 포함하여 이어령 선생은 ‘천, 지, 인’ 3부작을 완성했다. 헌데, 이 시리즈는 총 6권까지 예정되어 있다. 가제로 붙여진 제목만 봤을 때 다음 3부작은 ‘의, 식, 주’로 추정된다. 한국인의 ‘의, 식, 주’, 다름 그 누구도 아닌 이어령 선생의 글인 만큼, 어떻게 풀어나갈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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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EOUT 유럽역사문명 - 지식 바리스타 하광용의 인문학 에스프레소 TAKEOUT 시리즈
하광용 지음 / 파람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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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테이크아웃 유럽예술문화』라는 인문학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음악, 미술, 건축 등 모든 카테고리를 총 망라한, 유럽 예술 문화에 대한 모든 내용이 정리된 인문교양 에세이였다. 내용이 쉽게 쓰여있었기에, 읽기도 편했다. 거기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예술 작품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많아서 질적인 면에서도 단연 최고였다. 예컨데 19세기 화가들이 수많은 르네상스 화가 중 굳이 ‘라파엘로’를 선택하여, ‘라파엘전파’라는 작품활동을 했는지등 말이다. 정말 인문학적으로 유럽 예술 문화를 알려주는데 있어서 이토록 추천할만한 책이 또 있을까 싶었다.






세상에나! 저자가 후속편을 썼다. 제목은 『테이크아웃 유럽역사문명』. 심지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역사’가 주제다. 그러다보니 리뷰를 쓰면서 키워드를 역사책이나 세계사책으로 해야하나 싶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접고, 이 책 『테이크아웃 유럽역사문명』 키워드를 전작처럼 인문학책으로 결정했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저자의 인문학적 학습과 경험을 토대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말마따나, 이 책은 역사전공자 시각이 아닌, 호기심 많은 광고인의 시각으로 쓰여졌다. 그래서 그런가? 확실히 쉽게 읽힌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책 『테이크아웃 유럽역사문명』이 역사를 주제로 하고 있음에도 인문학책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그 구성에 있다. 일반적인 역사책과는 구성이 확연히 다르다. 내용면에서도 일반 역사책에서 잘 알려주지 않는 내용들이 많다. 예컨데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을 보자. 나는 살면서 내가 보고 있는 달력이 그레고리력이라는 것을 이 책을 읽고나서야 알았다. 달력은 음력, 양력만 있는줄 알았지? 여기서 조금 덧붙이자면 우리나라 세시풍속, 24절기가 양력기준이다라는 정도? 그런데 ...뭐, 그레고리력? 거기다 그 전에는 율리우스력을 썼다고? 심지어 러시아는 크리스마스가 1월이라고?! 이야 진짜. 나름 이것저것 많이 보고 읽었던 터라 남들보다는 잡학다식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나는 우물안 개구리였다.




확실히 인문학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역사 이야기는 색다르다. 거기다 재밌어!! 원래도 역사는 재미있지만, 더 재밌어!!!!!





1.율리우스력과 동방정교회

위에서 살짝쿵 이야기한 달력 이야기다. 내 표정을 @.@ 로 만든 그레고리력과 율리우스력. 그레고리력은 무엇이고 율리우스력은 대체 무엇인가? 이 차이가 무엇이길래, 우리 기준으로는 11월에 일어났던 러시아 혁명을 왜 10월 혁명이라 부르는걸까? 대체 왜 러시아에서 크라스마스는 1월 7일인 걸까?? 




놀랍게도 이 이야기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수많은 명언을 남긴 기원전 로마 공화정 정치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시저) 까지 올라간다. 아니 대체 어째서?!


율리우스력은 말 그대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만든 달력입니다. 로마 정권을 잡은 카이사르는 많은 개혁을 하는데 달력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 율리우스가 제정한 율리우스력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달력과 차이가 없어보입니다. 아니 월력, 일력으론 똑같습니다. 그러니 러시아인이 불편함이 없기에 지금도 사용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과학성도 놀랍지만 또 하나 놀라운 것은 가위질을 엿장수 마음대로 하듯 로마인 마음대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2월은 동네북입니다. 새로운 7월과 8월은 본래의 6월과 7월 사이에 새치기해 들어갔습니다. 7월 줄라이와 8월 어거스트는 영어로는 쥴리어스 시이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어거스트인 아우구수투스가 태어난 달입니다. 샘 많은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전임자인 카이사르에 뒤질세라 그가 한 것이라면 본인도 똑같이 따라서 했습니다. 달의 순서와 날의 길이까지도 바꾸면서 말입니다. p 040




율리우스력은 말그대로 정권을 잡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만든 달력이었다. 달력을 손대는 과정에서 이것저것 넣고 쳐내고, 심지어 자기가 태어난 7월에 자기 이름을 넣었어!!! 7월 영어명 줄라이가 율리우스의 영어명이라니. 더 충격적인건 그 뒤에 로마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이를 따라서, 자기가 태어난 8월에 자기 이름을 넣었다는거. 이 외에도 여러 달을 줄이고, 늘리고. 이야 정말 대단한 로마인들. 이렇게 제정된 율리우스력은 16세기까지 사용되다가, 그레고리력으로 교체된다. 왜?



로마 카톨릭 교황 그레고리 13세가 또 한번 달력을 수정을 제안했으니까. 전반적으로는 율리우스력과 비슷하지만, 율리우스력보다는 훨씬 오차가 적고 더 정확한 달력을 사용하자고! 그렇게 탄생한게 그레고리력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이기도 하고. 아니, 그러면 그레고리력이 훨씬 더 디테일한 달력인데, 러시아는 율리우스력을 고집하지? 놀랍게도 여기엔 11세기에 있었던 동서교회 대 분열이라는 아주 커다란 원인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표준 달력은 그레고리력입니다. 1582년 그간 사용해오고 있던 율리우스력의 오차를 수정하여 만들어진 캘린더로 당시 이것을 제안한 교황 그레고리 13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구조와 표기되는 내용, 달력으로만 치면 율리우스력과 같습니다. 초력 계산에서 미세한 차이가 납니다. 한마디로 율리우스력이 128년마다 하루의 오차가 있다면 그레고리력은 3000년마다 하루의 오차로 정확해졌다는 것입니다. p 041




그런데 러시아와 동방정교회는 왜 다소 부정확한 율리우스력을 고집하고 있을까요? 사실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국가로서의 러시아는 혁명이 끝나자마자 바로 그레고리력으로 전환했으니까요. 하지만 러시아의 동방정교회는 여전히 교회력으로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정론이든 추론을 해봅니다. 하나는 교리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동방정교회는 이름에도 들어가 있듯 정통성을 굉장히 중시합니다. 그래서 과거 로마 시대부터 2천 년 넘게 교회력으로 채택되고 기록되어온 정통한 달력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레고리력이 서방교회의 수장인 교황이 발의해서 만들어진 교황의 달력이라는 점입니다. p 043




1054년에 교리 차이로 빚어진 동서교회가 분열되었다. 동쪽은 동로마 정교회, 서쪽은 서로마 카톨릭으로. 동로마 정교회 수장인 콘스탄티노플 총 대주교와 서로마 카톨릭 수장인 바티칸 교황이 서로를 파문하며(!!!) 완전히 결별했다고. 그래서 동방정교회를 믿는 러시아는(러시아정교회) 서방 교회 수장인 교황이 발의해서 만든, 교황의 달력은 거부(!)했다는 뭐 그런 초딩들 싸움같은 이야기랄까?




하지만 20~21세기에 들어서 동방정교회와 서방 카톨릭 수장들이 연이어 만나 서로 화해하며 파문을 철회했다. 아이러니한건 이 둘의 만남을 주선한 주선자가, 그 유명한 쿠바 독재자 카스트로. 수많은 사람을 억압하고 탄압한 독재자가 기독교의 두 수장의 만남을 주선하고, 그들에게 축복을 받았으니 그가 저지른 죄악은 사라진건가? 죽었으니 진짜 천당갔으려나. 흡사 21세기 면죄부 느낌이다. 아무리 죄악이 많아도 돈 많거나 권력이 있으면 장땡같은 느낌이라 별로다.




1965년 바티칸의 교황 바오르 6세와 이스탄불의 총대주교인 아티나고라스는 예루살렘에서 만나 천 년의 화해를 하였습니다. 1054년 동서 교회 대 분열 시 서로를 파문했던 로마의 교황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동시에 그 파문을 철회한 것입니다. 이어서 지난 2016년 2월엔 프란체스코 교황과 정교회의 실세인 러시아의 키릴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만나 또 화해의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화해를 주선한 인물은 쿠바의 독재자 카스트로였습니다. 이렇게 큰 일을 주선하고 카스트로는 그 해 11월 사망했는데 이 일로 그는 확실하게 천당을 갔을 것입니다. 지구상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두 분을 천 년 만에 만나게 했고, 서방카톨릭과 동방정교회의 수장인 그들에게 동시에 축복도 받았을 테니까요. p 060






2. ‘하느님’과 ‘하나님’, ‘여호와’와 ‘야훼’ 그리고 알라


위 율리우스력과 그레고리력에서 나온 기독교 동서교회 대분열. 자연스레 기독교가 궁금해진다. 이 책 저자는 참 똑똑하다! 이 책 속 여러 챕터 중에는 역사적으로 바라본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물론 유럽 종교!). 난 무교지만, 개인적으로 종교의 역사를 흥미롭게 보는 사람이다.




예컨데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를 떠올려보자. 불교는 윤회사상을 이야기하지만, 실상 부처는 윤회는 없다고 말했었다. 애초에 윤회사상을 이야기하며 계급사회를 중시했던 힌두교의 카스트제도에 대항하여 만들어진 종교였으니까. 거기다 부처는 죽기전에 자신을 신격화하지 말라고 했었고. 하지만 부처 사후 오랜시간이 지나며, 일부 권력자들이 국가 통치를 위해 불교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윤회사상이 덧입혀지고, 부처가 신격화되며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가 재탄생했다. 신학이 아닌, 역사적 관점으로 보는 종교는 꽤나 재미있다. 




불교를 역사적 시각으로 아주 간략하게만 봐도 이렇게 흥미진진한대, 전 세계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기독교는 어떨까. 아!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이 있다.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하면 일반적으로 개신교를 떠올린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독교는 서방 카톨릭(천주교), 동방 정교회, 개신교(프로테스탄트교) 3대 종파를 아우르는 이름이다. 거기다 오리지널 ‘기독교’를 이야기하자면, 어디까지나 카톨릭이 먼저다.




원래 기독교는 카톨릭(천주교) 하나 였다. 그러다 11세기에 교리 차이로 동,서 교회가 분열되면서 서방 카톨릭(천주교)와 동방 정교회로 나뉘어졌다. 그렇게 오백여년이 흘렀다. 16세기에 로마 카톨릭에서 면죄부를 판매하기 시작하자, 마틴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했다. 이게 기폭제가 되어 종교개혁이 이루어졌고, 그때 카톨릭에서 프로테스탄트교가 떨어져 나왔다. 바로 개신교다. 이렇게 기독교가 3대 종파로 나뉘어졌다.




기독교의 카톨릭, 정교회, 개신교는 모두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유일신으로 받들고 예수 그리수도를 그의 독생자로 믿는 종교입니다. 경전인 공히 성경입니다. 이 성경의 다른 해석으로 기독교가 크게 3개로도 나뉘었지만, 그 안에서 또 많은 종파나 교파로 분파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각각의 종교마다 교리와 예식에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성직자의 결혼 유무만 보더라도 카톨릭은 주지하다시피 신부는 미혼만 가능하여 사제서품을 받고서도 평생 미혼으로 살아야합니다. p 077




카톨릭, 동방정교회, 개신교는 서로 신을 섬기는 방법이나 교리 해석 등 많은 편에서 차이가 있다. 카톨릭은 교황이라는 종파를 아우르는 수장이 있는 반면, 동방 정교회나 개신교는 그런 수장이 없다. 다만 동방 정교회는 지역별 총대주교가 있어서, 각 국가의 종교대표 역할을 한다고 한다. 비교적 뒤늦게 파생된 개신교는 지역별 수장조차 없다. 처음부터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고 시작된 종교가 아니고, 종교개혁으로 탄생한 종파다보나 단일 조직 체계를 갖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개신교 내에서도 이후에도 여러 차이로 인해 교파가 생겨났다.




또 다른 차이점으로는 카톨릭 신부들은 사유재산이 없고 미혼만 가능하지만, 개신교는 사유재산을 소유할 수 있고 결혼도 자유다. 역시나 뒤늦게 만들어진 종교이기에 비교적 자유로운 면이 있는 듯 하다. 정교회는 서품을 받기 전에는 결혼이 자유지만, 서품 받은 이후에는 거기서 고정된다. 결혼한 상태에서 서품을 받았으면 평생 결혼을 유지해야하고, 미혼한 상태에서 서품을 받았으면 평생 미혼으로 살아야한다는 말이다.




하늘에 계신 유일신을 향한 믿음 외에는 많은 차이가 있는 각 종파. 근데 왜 유대교는 기독교가 아닐까? 유대교도 유일신을 믿고, 거기다 예수 그리수도는 유대지역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나? 


그런데 카톨릭, 정교회, 개신교 이외에 왠지 기독교일 것만 같은 종교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유대교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인 유대지역은 기독교의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곳이고, 그도 유대인이기에 그렇게 생각되기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이슬람교가 기독교가 아닌 것처럼 유대교는 기독교와는 다른 종교입니다. 일단 유대교는 기독교를 규정하는 중요한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p 082




놀랍게도 유대교는 다른 기독교 종파들과 달리 예수를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근데 더 놀라운 사실은 이슬람교는 예수를 선지자로 인정한다는 것. 뭐지? 여기서 다시한번 동공지진!!!! 이슬람교는 대체 어떤 종교인가 당최 가늠이 안된다. 근데 또 이슬람교의 탄생을 보면, 얼추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타고 올라가면 그 꼭대기엔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기독교와 유대교 모두에게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받는 인물입니다. 그 족보 중간쯤엔 유대 왕국을 통일한 다윗과 지혜의 왕 솔로몬도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뒤늦게 하느님의 은총으로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으로 인하여 이렇게 화려한 유대인의 가계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슬람교에도 아브라함이 등장하는데 그는 무슬림에겐 이브라힘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이슬람의 족보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으로 안내려가고 그의 다른 아들인 이스마엘 쪽으로 내려갑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전에 이집트 출신 이방인인 여종 하갈을 통해 먼저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p 087




책에선 정말 많은 내용이, 흥미진진하게 쓰여있지만! 여기서 간략하게 이야기하자면 예수의 선조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기독교와 유대교 모두에게 추앙받는 인물이라 한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한명은 적자인 이삭, 또 한명은 서자인 이스마엘. 아브라함은 적자에게 승계하기 위해 서자를 쫓아냈다. 아브라함은 적자인 이삭을 통해서 유대교가 이어나가는 반면, 쫓겨난 서자 이스마엘은 하늘에 계신 유일신이 굽어살피사(!) 그를 통해 이슬람교가 이어졌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이스마엘을 선조로 생각하는 이슬람교와 아브라함을 섬기는 기독교가 서로 배척하는데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도 한 몫 한다고나 할까.




여기까지가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서로 배척하는 역사적 배경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와 유대교가 서로 배척하는 이유도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을까? 




과거 로마제국이 영토를 넓힐 때 유대인들은 자신이 살던 나라에서 쫓겨나 기독교를 믿는 유럽 곳곳에 정착했다. 유럽인 입장에서는 뜬금없이 외지인이 자신들의 영토에 굴러들어와서 맘에 안드는데, 거기다 그 외지인이 자신들이 믿는 예수를 핍박한 유대인들이다? 누가봐도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반대로 유대인 입장에서는 유럽인들이 자신들을 상대로 텃세를 부린다고 생각할테고. 그렇게 서로가 배척하는 상황이 생겨난거다. 




위의 구약 창세기 내용은(창세기 21장 17~20절)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 3대 종교가 모두 공유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광야에서 생사를 오가던 이스마엘과 하갈을 살려주고 축복한 신은 기독교의 카톨릭과 정교회에선 우리말로 하느님으로 불리지만 개신교에선 하나님으로 불립니다. 위의 인용한 창세기는 개신교 성경이기에 하나님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하느님은 히브리 원어로는 여호화, 또는 야훼가 됩니다. 사실 여호화나 야훼든 이것이 불분명한 것은 하느님이 직접 내가 누구라고 밝힌 것을 들은 사람은 그로부터 십계명을 전달받은 모세가 유일하므로 모세만이 정확한 그분의 이름을 알 것입니다.p 090




또한 기독교와 유대교의 야훼 하느님은 이살람교에서는 알라가 됩니다. 영어 성서에선 가드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위의 창세기에 이스마엘 모자를 살린 같은 사건에 등장한 그 신은 다 다르게 불리지만 다 같은 신일 것입니다. 세상에 딱 한 분밖에 한계시는 유일신인데다가 사는 곳도 같고, 하는 일도 같은 그분이 종교마다 다르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모순일 것입니다. p 091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가 서로 배척하는 뿌리에는 이런 역사적인 배경이 있었다는 것! 내 개인적으로는 딱히 믿는 종교가 없어서 그런가? 역시 종교는 신학적인 관점보다 역사, 인문학적 관점으로 보는게 더 재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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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고쿠 닌자 이야기 - 60가지 주제로 알아보는
곽범신 옮김, 야마다 유지 감수 / 마나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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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리뷰하는 일본사 역사책은 애니 및 일드나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특히나 더쿠들이라면 더더욱 친숙할 주제다. 다름아닌 #닌자 이야기! 나만해도 소싯적 더쿠였기에, 피스메이커나 나루토같은 닌자물도 엄청 좋아했기에(ㅋㅋㅋ) 괜시리 ‘닌자’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랄까? 뭐 물론 지금은 탈덕한지...아아, 이제 언제적인지 기억도 안난다. 

근래에 접했던 닌자 이야기는 몇 년전 읽었던 『식물도시 에도의 탄생』이라는 책이었다. 나에게 덕질용어라 생각했던 ‘닌자’를 역사적 직업으로 탈바꿈해 준 바로 그 책이다. 이후 직장 특성상 약학(?) 관련 역사책을 종종 읽었는데, 그때도 닌자가 종종 등장했다. 전국시대까지만해도 겁나 바빴던 닌자들이, 평화시대인 에도시대에 이르러 할 일이 없어지자 자연스레 직종을 변경했는데, 그 직종들이 대체로 제약업과 화학업이었고 그렇게 그들의 지식이 이어진게 지금의 제약회사, 화학회사라는 뭐 그런 이야기랄까. 갑자기 닌자가 제약, 화학업을 한다니까 당황스러울 수 있겠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중세 일본에서 닌자만큼 식물과 화약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부류는 없었으니까. 뭐, 이건 오늘 포스팅 할 일본사 역사책 『센고쿠 닌자 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어디까지나 에도시대 이후 닌자 후손들(?)에 대한 이야기지만.


인술은 본래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입으로 전해졌지만, 천하가 태평안 에도시대로 접어들자 닌자가 활약할 장소는 줄어들었고, 도구의 사용법이나 지식 등의 기술도 더는 대물림되지 않을까 우려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기술을 정리해놓은 책이 바로 인술서다. 100권 이상의 인술서가 존재했다고 하나 가장 뛰어난 것은 『만센슈카이』(22권)로 이가닌자 후지바야시 야스타케가 남긴 책이다. 제목의 유래는 이가, 고가 및 모든 유파의 인술이 정리되어 있으므로 모든 인술을 하나로 정리했다는 의미다. 그 외에 기슈루 인술이 정리된 『쇼닌키』(3권), 저명한 닌자 핫토리 한조 가문에 전해지는 『시노비히덴』(4권)이 있는데, 여기에 『반센슈카이』를 더해 ‘3대 인술서’로 통한다. p 034

이제 본격적으로 『센고쿠 닌자 이야기』 책을 살펴보자. 이 책은 여기저기 전투가 발생했던, 활약상이 실로 대단했던 전국시대 닌자들을 이야기한다. 애니 속 닌자가 아닌, 현실에 살았던 ‘진짜’ 닌자를! 더군다나 이 책 참고도서는 현존하는 인술서다. 나는 이시점에서 이미 놀랐다. 현존하는 인술서라니. 인술서, 비기 이런건.... 애니 속에만 있는거 아니었어? 와. 진짜 일본은 정말! 뒷말은 생략한다.

이 책은 닌자는 어떻게 생활했고, 서로 어떻게 연락을 취하고, 어떻게 수련을 했고, 어떤 옷을 입었고, 어떤 무기를 썼고, 어떤 기술을 사용했는지 등등등 정말 닌자에 대한 사소한 내용부터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내용까지 전부를 담고 있다. 특히 닌자가 사용한 기술이나 무기에 대해선, 혹자는 애니에서 자주 보았던, 크고 화려한 인술을 사용하는 닌자를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예컨데 나루토가 외치는 “그림자분신술!!!!”이나, 오로치마루의 “목둔술” 같은 인술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을 보게 되면 아아, 닌자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던 당신에게 심심한 위로를....!

일단 소소하게 ‘닌자’의 역사부터 시작해보자.


과거 오토모노 사비토(사이뉴)라는 인물이 ‘시노비’로서 쇼토쿠 태자를 섬겼다는 내용이 16세기의 『닌주쓰히쇼오기덴』에 쓰여 있지만 역사적 사실로서의 신빙성은 낮다는 것이 최근 연구로 밝혀진 정설이다. 헤이안 시대에는 고가와 이가의 선조가 등장한다. 다이라 가문과 미나모토 가문의 전쟁에서는 닌자가 활약했다고 하는데, 이가닌자의 선조로 여겨지는 핫토리 헤이나자에몬 이에나가가 다이라 가문을 섬겼다.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 당시 활약한 모치즈키 사부로 가네이에는 고가닌자의 선조라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는다. 닌자의 존재를 역사적 사실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남북조 시대를 무대로한 군담소설인 『다이헤이카』로, 장원제 지배에 저항했던 무리를 가리키는 말인 아쿠토가 닌자의 기원으로 추정된다. 닌자가 가장 활발하게 활약했던 시기인 센고쿠 시대에 각지의 다이묘들은 상을 내려 닌자의 활동에 보답했다. p 004

이러한 조건들이 겹치며 이가와 고가는 발전해나갔는데, 이를 단숨에 유명하게 만든 사건은 1487년에 벌어진 ‘마가리의 진’이었다. 이가와 고가의 닌자들은 무로마치 막부에 적대하던 롯카쿠 가문에 협력해 막부군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 활약을 선보였다. 또 한가지, 닌자의 이름이 일본 전토에 널리 퍼진 전투로는 1579년에 벌어진 ‘덴쇼 이가의 난’이 손꼽힌다. 이 싸움에서는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인 노부가쓰가 이끄는 8천명의 군세에 맞서 이가슈는 불과 1,500명의 병력으로 큰 승리를 거뒀다. p 007

닌자 역사의 시작은 이가닌자과 고가(코가)닌자 되시겠다. 참고로 썰이 아닌, 기록에 남은 무려 정설이다. 소싯적 바람의나라(ㅋㅋ)를 해본 게이머라면, ‘이가닌자’라는 단어가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아아, 이렇게 또 연식이 슬쩍 드러난다.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를 봤던 사람이라면 ‘이가모노’, ‘고가모노’라는 말을 들어봤을텐데, 이 단어도 이가닌자와 고가닌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여튼 헤이안 시대부터 등장한 닌자는 가마쿠라 막부를 지나, 무로마치 막부를 훑고 전국시대였던 에즈치·모모야마 시대까지 활약한다.

책 본론으로 들어가면 정말 닌자에 대한 모든 것이 아주 낱낱히 파헤쳐진다. 내가 알고 있던 인술이!!! 환술이!!!!! 실제로는 이런 모습이었다니. 하. 소싯적 닌자물을 봐왔던 나조차도, 그 닌자물이 대다수 상상과 창의력이 가미되어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던 나조차도 하. 실제 닌자들이 사용한 인술과 환술은 그저 소소한 기술, 어떤 기술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닌자라는 직업군이 사용하는 기술이었다는 점에서 참....하 ㅋㅋㅋㅋㅋ

아래 내용부터는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인술과 환술이 사실이 아니었다는, 실제로는 이런 모습이었다!라는 점을 보여주는 책 내용을 발췌했다. 이 책을 읽고도 닌자에 대한 환상이 깨지지 않았다면, 정말 그 사람들은 진성 더쿠. 하하하.

닌자가 사용한 대표적인 인술로는 위장술인 둔주술이 있다. 둔주술은 활용하는 지형, 지물이나 형태에 따라 이름이 다르다. 쉽게는 ‘은신술’이 여기에 속하고, 우리가 애니에서 많이 접했던 ‘화둔’, ‘수둔’, ‘목둔’ 도 이에 속한다. 그리고 실제 둔주술은....... 애니 속의 그 모습과는 아주 많이 다르다. 정말 달라도 너어무 다르다. 

다시금 말하지만 나루토가 사용한 그림자분신술, 오로치마루가 사용한 목둔술을 생각했다면 정말 .. 배신감에 치를 떨지도!

적의 눈을 속이고 몸을 감추는 기술을 ‘은형술’이라고 부른다. 그중 하나가 ‘메추라기 은신’이다. 적에게 엉덩이를 향한 채 팔다리와 머리를 움츠려 웅크리는 것이다. 참고로 얼굴을 가려서 시야를 차단하는 데에는 공포심을 억누르는 효과도 있었다. ‘관음 은신’은 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벽이나 나무 뒤에 몸을 붙이고 서는 기술이다. 얼굴을 가린 것 외에는 그저 서 있을 뿐이지만 의외로 잘 들키지 않았다. ‘너구리 은신’이라 하여 나무 위로 숨는 기술도 있다. 이는 위쪽으로는 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심리를 노린 기술이다. p 049

‘화둔술’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불을 이용해 도망치거나 숨는 기술이다. 저택이나 진지 등에 불을 질러서 적이 동요한 틈에 도망치는 것이다. 때로는 화약을 터뜨릴 때 나는 큰 소리로 상대 전의를 꺾거나 풀밭을 불태워서 자신과 적 사이에 불의 장벽을 만들어 발을 묶기도 했다. 닌자는 화약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대대로 전수받았다. 화약의 주된 재료인 초석에 숯이나 황을 섞어서 만드는 화약 제조법은 닌자 마을에서는 비전 중의 비전이었다. p 050

‘수둔술’은 물을 이용한 둔주술이다. 성을 둘러싼 해자나 강, 연못 등에 몸을 숨기는 기술로 뛰어난 운동 능력을 지닌 닌자만의 도주 기술이라 할 수 있다. 물속을 이동할 때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소리나 물보라를 만들지 않는 ‘누키테’라는 수영법이 사용되었다. 다만 물속에 들어가는 경우는 매우 위급한 상황으로, 자주 사용된 ‘수둔술’은 큰 돌을 던져서 물속에 뛰어든 것처럼 착각하게 틈에 도망치는 기술이 아니었을까. p 050

‘천둔십법’은 날씨를 이용한 기술이다. 해를 등져서 적이 시력을 잃었을 때 도망치는 ‘일둔’, 달이 구름에 가려져서 주변이 어두컴컴해진 틈에 도망치는 ‘월둔’, 돌풍에 일어난 모래먼지에 몸을 숨기는 ‘풍둔’, 비나 번개를 이용하는 ‘우둔’과 ‘뇌둔’ 등 자연현상에 편승에 도주하는 방식이다. 우연히 일어나는 자연현상에 의지하다니 괜찮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닌자들은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해도 냉정하게 주변을 관찰해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p 052

‘지둔십법’은 지상의 자연물을 이용하는 기술이다. 모래나 흙을 뿌려서 상대의 시야를 빼앗는 ‘토둔’, 세워져 있는 목재를 무너뜨려 상대방의 진로를 차단하는 ‘목둔’, 풀을 엮어서 발을 붙잡는 ‘초둔’, 끓는 물이 든 가마솥 따위를 뒤집어서 상대방이 당황한 사이에 도망치는 ‘탕둔’ 등이 있다. p 052

‘인둔십법’은 사람이나 동물을 이용해 도망치는 방법이다. 도망치는 도중 추격자로 변장해서 “수상한 자는 저쪽으로 도망쳤다!”고 소리쳐서 적의 주의가 다른 곳으로 항했을 때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는 기술 외에도 노인이나 어린아이, 여성으로 변장하는 기술도 있었다. p 052



분신술의 원리에 대해서는 몇 가지 가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잔상에 따른 눈의 착각을 이용했다는 설이다. 빠르게 달리다 아주 잠시 움직임을 멈춘 뒤 다시 이동한다. 이를 반복하면 움직임을 멈춘 지점에 잔상이 남아 마치 분신이 생겨난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또한 대역을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닌자는 ‘당’이라 불리는 혈연관계로 맺어진 동족으로 조직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용모가 비슷한 사람이 있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p 056

환술이란 대체 무엇일까. 이는 인간의 착각이나 믿음을 이용한 기술로, 지금으로 따지면 마술에 가까운 기술이었다고 한다. 인술과 환술은 전혀 다르지만 닌자의 변신술인 ‘시치호데’ 중 하나로 마술이나 곡예를 선보이는 호카시가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마술에 정통한 닌자가 있으리란 것도 쉽게 상상이 가능하다. 진실이 무엇이든 분신술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지 않아 진위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p 056

만화 등에도 등장하는 ‘임병투자개진열재전’이라는 주문이 있다. ‘구자신호법’이라는 주문으로, 닌자가 정신을 통일하기 위해, 혹은 재앙을 쫓기 위해 읊었다. 인술의 기원 중 하나는 수험도라는 산악신앙으로, 이 수험도에서 도입한 주문이 바로 구자신호법이다. ‘임병투자개진열재진’을 해석하면 ‘싸움에 임하는 투사는 모두 진을 짜서 앞으로 나서라’ 라는 뜻이다. 싸울 때는 선두에 서서 나아가라는 의미로, 주문을 읊는 데에는 사기를 진작시키거나 두려움을 없애는 효과,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p 058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중요 정보의 경우 닌자가 의존했던 기술이 바로 ‘불망술’이다. 이는 정보를 떠올리며 칼 따위로 스스로의 몸에 상처를 내는 방법이었다. 사람은 상처를 보면 다쳤을 때의 상황을 선명히 떠올리게 된다. 이를 이용한 기술이 불망술로, 흉터를 본 닌자는 그 상처를 냈을 때의 정보를 떠올렸다. p 064

일설에 따르면 최초로 여자 닌자를 휘하에 두었던 인물은 센고쿠 시대의 무장 다케다 신겐이었다고 한다. 말이 여자 닌자이지 실제로는 ‘순회무녀’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특정 신사에 몸담지 않고 무녀 복장으로 전국 각지를 순회하는 신의 사자였다. (…) 에도시대 인술서 『반센슈카이』에는 남자가 잠입하기 어려울 경우 여자가 대신 잠입한다는 ‘쿠노이치술’과 앞서 언급된 ‘가쿠레미노술’이 소개되어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여성을 기용했다는 기술일 뿐 여자 닌자가 활약했다는 증거는 아니라는 것이 여자 닌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의견이다. p 066

하, 진짜 여러모로 닌자에 환상을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강력 추천하고 싶은 일본사 역사책이다...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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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미술관 여행 - 자연 친화적이고 혁신적인 북유럽 미술관을 가다
이은화 지음 / 상상출판 / 2024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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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서평 주인공은 『북유럽 미술관 여행』이라는 미술 여행에세이 책이다. 미술관련 책이야 거의 분기에 한 번 꼴로 읽었던 터라, 이런 책에 바라는 기대치가 꽤나 높다. 적어도 초심자용(?) 미술관련책은 진작에 타파했고! 이후에는 미술을 여러 관점에서 바라보는 책들을 읽으면서, 미술에 대한 궁금증이 매우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북유럽 미술관 여행』이라는 책을 읽기전에, 내심 내 궁금증을 얼마나 해소해줄지 기대가 많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미술작품에 대한 해설보다는 제목 그대로 북유럽 5개국에 있는 ‘미술관’에 초점을 맞춘 미술 여행 에세이다. 미술 작품 해설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조금 실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실망 잠시 넣어두는 걸로! 이 책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미술관’ 매력 빠지게 될 것이다. 심지어 근처에 미술관이 있는지, 한 번쯤은 미술관을 가볼 생각을 하게될지도 모른다.

저자는 북유럽 5개국에 있는 미술관 여행을 하였고, 그 여행기를 이 책에 고스란히 녹여냈다. 당연히 미술관에 걸려있는 미술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는 말이다. 다만, 미술작품 이야기는 일종의 곁가지이고, 주는 ‘미술관’ 자체라는거! 근데 뭐, 따지고 보면 미술관도 하나의 미술작품이나 다름없다. 독특하고 개성있는 외관은 둘째치고, 건물 자체가 품고 있는 역사성만 하더라도 왠만한 미술작품 저리가라니까. 따라서 이 책 역시 미술작품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알고 있는 서양 유명 미술작품들은 대체로 고전작품이 많을뿐더러, 소장처는 루브르 박물관 같은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있는 그런 곳들이 많았다. 헌데 왠걸? 이 책이 소개한 미술관에는 내가 몰랐던 미술작품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으레 알고 있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다. 심지어 ‘미술관’이라는 건물이, 내가 생각하는 보수적인 공간이 아니라 복합문화예술 공간이라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방문했던 우리나라 미술관은 보수적인 공간 인테리어가 많았다. 전시실도 책에서나 볼 법한 그림이나 조각은 많았으나, 체험 공간이나 멀티미디어 공간이 많이 부족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갔었던 미술관은 대게 연식이 오래되어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했지만. 그랬기에 이 책에서 소개한 북유럽 미술관이 하나같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무엇보다 부러웠다T_T. 

아래는 이 책에서 소개한 여러 미술관 중 내가 가보고 싶은 미술관 두 곳에 대한 내용이다. 왜 하필 이 두 곳인가? 에 대해서는 뭉크 그림을 두 눈으로 보고 싶다는 사심 듬뿍이라서다. 2014년에 한가람 미술관에서 개최했었던 뭉크전을 보러갔었던게, 나에겐 꽤 큰 충격으로 다가왔기에. 뭉크 그림을 다시 한 번 두 눈으로 보고 싶달까?!



노르웨이: 문화의 아이콘, 뭉크 미술관

미술애호가들에게 오슬로는 에드바로 뭉크의 도시다. 붉은 노을이 지는 황혼 녘, 해골 모습의 사람이 두 손으로 귀를 틀어 막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 명화, <절규>가 바로 이 도시에 있다. 인간의 고독과 불안을 뭉크만큼 절절하고 상징적으로 잘 표현한 화가가 있을까. 루브르의 <모나 리자>만큼이나 유명한 <절규>를 만나기 위해 해마다 수백만 명이 오슬로를 찾는다. p 017

뭉크 미술관은 노르웨이가 낳은 세계적인 화가 뭉크의 작품와 아카이브 자료 약 4만 5,000점을 소장한 세계 최대 미술관이다. 이 방대한 소장품을 구축할 수 있었던 건 작가의 기증 덕분이다. 1940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가 노르웨이를 점령하자 아내도 자식도 없던 뭉크는 오슬로시에 자신의 작품과 소유물을 다 기증했다. 그가 사망하기 4년 전이었다. 이때 기증품 수는 2만 8,000점이 넘었는데, 단일 작가가 기증한 양으로는 역대 최다였다. 뭉크 미술관 소장품은 작가의 기증 외에도 그의 막내 여동생 잉에르의 사후 기증과 개인 컬렉터들의 기증으로 더 탄탄하고 방대해졌다. p 023

7층에선 뭉크가 생애 마지막 30년을 살았던 에켈리의 별장을 재현한 멀티미디어 설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9층은 다른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획전시 공간이고, 10층은 음악과 시각예술의 융합을 경험해보는 특별한 공간이다. 11층은 체험형 작품 전시 공간으로 어린이 관람객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2022년에는 오슬로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제니 브링가케르가 초대돼 뭉크의 어린시절 바닥 낙서화에 영감을 받은 <브레인 미로>를 선보였다. p 033

 



뭉크 미술관이라고 해서 모든 층, 전시실에 뭉크 작품만 있을거라는 편견은 버리자! 각 층마다 독특하고, 개성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는 건 둘째 치고, 여러 체험공간 특히 어린이 관람객들도 체험할 수 있다는 공간이 있다는 점에서 ‘미술관은 고리타분하다’는 당신의 편견을 완벽하게 부실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미술관에 대한 내 편견을 깨부셨다.

‘절규의 방’은 조도를 낮춘 무척 어두운 공간이었다. 한 공간 안에서 그 유명한 <절규> 그림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었으나, 아뿔싸! 판화 버전 한 점만 벽에 걸려 있었다. 게다가 사람들이 너무 몰려 있어서 가까이 가서 보는데까지 꽤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어렵게 만난 그림이라 그런지, 관람객들은 다들 그림 속 비명 지르는 사람을 흉내 내며 인증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왜 유화 버전은 없는지 궁금해 주변을 둘러봤더니, 벽에 안내 문구가 적혀 있었다. 세 가지 버전의 <절규>는 작품 보호를 위해 한 시간 간격으로 돌아가면서 공개된다는 내용이었다. p 025

지금은 노르웨이의 국보 대우를 받고 있는 세계적인 명화지만, 처음 <절규>가 발표됐을 때 반응은 어땠을까? 평론가들은 ‘정신병자가 그린 그림’이라고 비난했다. 뭉크는 발끈하지 않고 그림 왼쪽 상단에 이렇게 썼다.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것이다”라고. 자신의 광기를 인정한 것이다. p 027

지금은 국민화가로 불리는 뭉크지만 생전에는 그러지 못했다. 어릴때 어머니를 여의고 연이어 누이를 잃었다. 아버지는 강압적이었다. 거기다 뭉크 본인과 여동생은 정신질환까지 앓았다. 업친데 덥친격이다. 뭉크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물론 뭉크에게도 연인은 있었다. 결론적으로 뭉크의 연애사는 여러모로 처참했다. 그런 뭉크가 그림을 그렸다. 당대 사람들 가치관으로는 당연히 이해하지 못할 그림들이었다. 지금은 뭉크 작품으로 제일 유명한 <절규>가 바로 당대 사람들이 외면한 그림 중 하나다.


스웨덴: 뭉크와 니체를 품은 컬렉터의 집, 티엘 갤러리

문화적으로 봤을 때 스웨덴의 행운은 하나 더 있다. 바로 티엘 갤러리다. 노르웨이의 국민화가 뭉크의 작품을 노르웨이 밖에서 가장 많이 소장한 미술관 중 하나다. 독일 철학자 니체의 데스마스크도 소유하고 있다. 아름다운 섬에 지어진 건축과 미술, 조각 공원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곳이자 아는 사람만 아는 스톡홀름의 숨은 명소다. p 212

원래 이 건물은 부유한 은행가이자 미술품 수집가였던 에르네스트 티엘과 그의 아내 시그네마리아 티엘이 살던 집이었다. 소장품이 늘어나자 티엘은 수집품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하얀 궁전을 유르고르덴섬에 지었다. 거주 공간과 갤러리 공간이 함께 있는 빌라 형태의 건물이었다. 경제 대공황 때 티엘은 재산 대부분을 잃었다. 1922년 완전히 파산 상태에 이르자, 그는 자신이 살던 빌라와 수집품, 가구까지 모두 팔아야 했다. 다행히 스웨덴 정부가 발 벗고 나섰다. 정부는 1924년 티엘의 집과 소장품을 일괄 매입한 후 1926년 국립미술관으로 개관했다. 이후 건물은 현대화를 위해 여러 차례 보수 공사를 했지만, 대부분 20세기 초에 지어진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p 214


티엘갤러리는 처음부터 미술관으로 지어진 건물이 아니다. 티엘이라는 부유한 사업가가 살던 집이었다. 다만, 티엘이 워낙에 미술 오타쿠&컬렉터다보니 어느새 집에 많은 많은 미술작품이 쌓였을 뿐이다. 자연스레 집이 미술관처럼 변했고, 티엘은 내친김에 집을 갤러리 공간으로 바꿔버렸다. 역시 덕질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배웠달까. 허허허.

 무엇보다 놀라운 건, 방대한 뭉크 컬렉션이다. 층고가 높은 뭉크 홀의 벽면 모두 뭉크 작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티엘 부부의 초상화는 물론 뭉크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아픈 아이>와 <절망>도 만날 수 있다. 티엘 갤러리는 뭉크가 그린 열 두 점의 유화와 100점에 가까운 판화를 소장하고 있는데, 노르웨이를 제외한 세계에서 가장 큰 뭉크 컬렉션 중 하나로 손꼽힌다. p 222

꼭대기 층에 있는 타워 룸에는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데스마스크와 뭉크의 판화 작업들이 함께 전시돼 있다. 1900년 니체 사망 직후 만들어진 데스마스크가 여러점의 에디션으로 제작됐는데, 그중 하나가 이곳에 있는 것이다. 티엘은 니체의 열렬한 팬이었다. 해서 데스마스크를 소유했을 뿐 아니라, 1906년 뭉크에게 의뢰해 니체의 초상화도 그리도록 했다. 다리 위에 서서 아래의 풍경을 응시하는 그 유명한 <프리드리히 니체>가 티엘 갤러리에 있는 이유다. p 224

돈많은 오타쿠(!)답게 티엘은 당대 여러 화가와 교류했는데, 그중 한 명이 뭉크였다. 뭉크는 생전에 자신의 작품 모두를 노르웨이 오슬로시에 기증했는데, 모든 작품을 기증한 건 아니었다. 자기 가족에게 주거나, 혹은 지인에게 주기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티엘도 개인으로는 단연 돋보적으로 많은, 뭉크의 작품을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래저래 티엘은 망하고, 티엘이 소장하던 모든 작품들은 스웨덴 정부가 매입하여 국립 미술관으로 개관했다. 결과적으로 제일 이득을 본 건 스웨덴 국민들이라고 할까? 만약 티엘이 망하지 않고 자신의 미술작품들을 계속 소장하고 있었다면, 그가 소유한 모든 미술작품들은 티엘과 그 가족들만 볼 수 있었거나, 혹은 아주 비싼 값을 내고 미술작품을 보러 왔어야 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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