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도로 위에 뿌려져 스몄다. 구조구급대가 아무리 빨리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도 환자는 살지 못헀다. 환자의 상태를 판단할 기준은 헐거웠고, 적합한 병원에 대한 정보는 미약했다. 환자는 때로 가야 할 곳을 두고 가지 말아야 될 곳으로 옮겨졌고, 머물지 말아야 할 곳에서 받지 않아도 되는 검사들을 기다렸다. 그 후에도 다른 병원으로 옮겨지고 옮겨지다 무의미한 침상에서 목숨이 사그라들엇다. 그 사이에 갈 수 있는 환자들이 죽어나갔다. 선진국 기준으로 모두 ‘예방 가능한 사망’이었다.

"내 환자들이 숨을 거둘 때 살이 베어나가듯 쓰렸고, 보호자들의 울음은 귓가에 잔향처럼 남았다. 죽음과 눈물이 일상이 되었을 때, 나는 내 손끝에서 죽어간 환자들의 수를 머릿속으로 헤아리는 짓을 그만두었다."

책에 기록된 내용은 내가 기억하는 범위 내에서 모두 사실이다. 기록의 대부분은 2002년에서 2018년 상반기까지의 각종 진료기록과 수술기록 등에서 가려 뽑았고, 내 기억 속의 남겨진 파편선에서 고군분투하는 환자와 내 동료들의 치열한 서사다. 외상으로 고통 받다 끝내 세상을 등진 환자들의 안타까운 상황과, 환자의 죽음을 막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싸우다 쓰러져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무엇보다 냉혹한 한국 사회 현실에서 업의 본질을 지키며 살아가고자, 각자가 선 자리를 어떻게든 개선해보려 발버둥 치다 깨져나가는 바보 같은 사람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흔적이다. - P10

-여기가 미국인 줄 알아?

한국에 돌아온 후 주위 반응은 막막했다. 한국에는 한국만의 ‘질서’가 존재했다. 기껏 찾은 답은 쓸 수 없었고 현실적인 난관을 피해갈 수 없었다. - P53

외상외과 의사로서 교과서적으로 치료하면 환자가 살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원칠대로 하려 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증외상환자 치료 원칙은 환자의 생환에는 도움이 되어도 병원의 이익은 되지 못했다. 일할수록 폭증하는 적자규모는 내가 평생 구경도 못할 액수였다. 그 같은 손실이 나와는 무관한 타인의 불행을 치료하다 발생한다는 사실은 허무하고 허망했다. 나는 일해서 돈을 벌었고 일을 해서 돈을 잃었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외상외과’라는 말도 안되는 부서를 지키고 선 스스로가 무력했다. - P61

-이 선생, 여기는 영국이 아니잖아? 나도 미국에서 연수받았지만 거기에서 하던 걸 한국에서 다 할 수는 없어.

-이 교수가 이제 마흔인가? 적어도 마흔이지? 이제는 좀 적당히 해. 일단 수술은 하지 않았으면 해. 그게 과의 입장이야. 어차피 전공의 배정도 없이 학생들이나 응급구조사들만 데리고 하는 것도 남 보기 좋지 않고. - P109

-아주대학교병원이 외상외과 운영을 포기하면 한국에는 더 이상 현황 파악을 할 곳조차 없습니다. 조금만 이 분야를 더 끌고 가주시면 국회 차원에서 병원 지원과 함께 중증외상 환자 치료에 대한 전국적인 체계를 잡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일행의 방문은 중증외상에 대한 국가의 지원 가능성으로 비쳤다. 보직교수는 그 자리에서 내게 수술 제개를 지시했다. - P124

새로 합류한 팀원들과 내가 열심히 일해서 살려낸 환자의 수가 늘어날 수록 적자는 정비례해 커졌다. 괴이한 일이었다. 우리는 ‘의료진’으로서 최선을 다해 환자를 살려야 했고, ‘조직원’으로서 병원의 이윤을 도모해야 했으나,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상 ‘외상외과’에 적을 두고서는 그 둘 모두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나를 향한 뜨거운 눈초리와 뒷말은 여전히 무성했다. - P146

누군가는 내게 시스템이 없는 곳에서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일이라서 더 힘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 심각함이 지나쳤다. 기존의 체계와 인사, 재정, 지원과 운영 모든 면에서 부딪혔다. 조직적으로 방해하는 이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주시했다. 비아냥과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고 내가 등을 돌리는 순간 숨기고 있던 칼을 사정없이 내리꽂았다. 그 저열함에 나는 치를 떨었다. 이제는 나 하나로 끝나지 않고 곁에 있는 사람들이 덩달아 힘겨워졌다. 그것이 나를 더 괴롭게 했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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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티콘을 이모콘티라고 말해서 딸의 짜증을 촉발시킨다. 그 엄마는 요즘은 컴퓨터의 컨트롤 브이와 컨트롤씨도 모른다고 또 딸에게 혼났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딸에게 가나다라를 가르쳐주려고 수백 번 설명해주고, 더하기 빼기를 알려주려고 수백 번 가르쳐주었다. 걸음마를 가르쳐주려고 수천 번 알려주고 한 걸음만 떼도 물개박수를 쳐주셨다. 세상 이치를 알려주려고 수천 번이나 얘기해주시는데 딸은 이모티콘이나 컴퓨터 설명 몇 번에 짜증을 낸다. - P88

시간이 엄마의 얼굴에서 젊음을 가져갔다. 김진호의 <가족사진> 속 노랫말처럼 ‘나를 꽃피우기 위해 거름이 되어버렸던’ 엄마의 모습에 딸의 가슴이 무너진다. - P66

여행지는 어디든 좋다. 발 닿는 데로 가서 팔짱 끼고 걸으며 끝없이 수다를 떨면 된다. 무뚝뚝한 딸이라 미안하다고 속마음을 표현하기도 하고, 엄마가 내 엄마여서 행복하다는 고백도 해본다. 엄마는 내 사진을 예쁘게 찍어주고, 내가 엄마를 예쁘게 찍어주고, 이 골목 저 골목, 알려지지 않은 길을 걷다가 식당에 들어가기도 하고. 실수 좀 하면 어떤가. 엄마인데, 딸인데 ……. - P61

딸은 사실, 엄마의 아기 캥거루이고 싶다. 딸 옆에 엄마가 없으면 행복이라는 그림이 완성되지 않는다. 엄마가 딸에게 그러하듯 딸도 엄마에게 바라는 건 금은보화가 아니다. 엄마가 돈 걱정하지 말고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 옆에서 잔소리도 하고 도닥여주고 못난 딸 예쁘게 봐주면, 그러면 된다. 그러니 세상의 엄마들은, 딸을 위해서라도 건강해야 한다. - P48

저는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길래 엄마의 자식으로 태어났을까요?

엄마가 우리 엄마라는 사실은 제 인생 최고의 행운입니다.

엄마의 자식으로 태어나게 해주신 신께 감사합니다.

엄마가 계시기에 고통스러울 때마다 다시 힘을 냅니다.

엄마가 계시기에 눈물이 날 때마다 차라리 웃어봅니다.

엄마가 계시기에 무릎이 꺾일 때마다 주먹 쥐고 일어납니다.

엄마가 계시기에 땅을 보는 시선을 들어 하늘을 봅니다.

내 삶의 이유, 내 삶의 힘, 내 삶의 배경인 우리 엄마.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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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분명 허구다. 하지만 뉴스에서 보던 저런 사건들은 분명 사실이다. 이 소설에는 미국, 영국, 사우디 아라비아 등 몇 몇 나라들이 나온다. 상대적으로 미국과 영국에서는 여성혐오가 심하지는 않으나,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여성은 사람이 아니다. 남자에게 종속된 노예이며 물건이다. 분명 허구인 소설인데, 허구같지 않다.


정말 뜬금없긴 하지만 ... 정말 만약에 현실에서 여성들이 이런 POWER를 가진다면? 이 책 속에서 나온 혼돈이 정말 눈 앞에서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속에 나온 여러 나라에서는 여성이 억압된 정도에 따라 그 나라가 변했다. 아니, 권력 주도층이 남성에서 여성으로만 변했을 뿐 사회는 달라지지 않았다. 미국은 변함없이 여성이 주도하는 군사강국이었다. 군사들도 POWER를 쓰는 여성이며, 클럽이든 어디든 약한 남성을 희롱하는 것도 여성이다. 사우디는 여성이 다스리는 신생 여성민주주의국가가 되었다. 과거 사우디가 여성을 노예로, 물건으로 대했듯 신생 사우디에서는 남성을 노예로, 물건으로 대했다. 성범죄 가해자와 피해자의 성별이 달라졌을 뿐 성범죄는 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건 그저 권력 주도층 단 하나였다.



굳이 책 속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꽤 가까운 과거만 봐도 알 수 있다. 몇 년 전 한국에선 여성 대통령이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나라를 파탄으로 이끌었고, 끝내 국민 손에 끌어내려졌다. 무엇보다 그녀가 싼 똥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이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남성이 권력자가 되든, 여성이 권력자가 되든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제발, 제발 하지 마세요. 제발. 이게 뭐죠? 아직 어린애일 뿐이에요. 어린애일뿐이라고요." 한 남자가 나지막이 웃음을 터트린다. "내 눈엔 어린애처럼 보이지 않던데." 엄마가 새된 소리를 낸다. 고장 난 엔진의 금속음 같다. (중략) 엄마의 눈이 커진다. "도망쳐, 록시" - P19

처음에 툰데는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가 "저리 가세요."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예사로운 상황이 아님을 깨닫는다. 남자는 그래도 웃으며 한 걸음 다가선다. "너처럼 예쁜 여자는 칭찬을 들어야 마땅해." (중략) 툰데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영상을 찍으려 한다.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과 똑같은 상황이 여기에서 벌어질 것 같다. 그 사건을 소유하고 싶다 (중략) 남자가 말한다. "야, 피하지 말고, 좀 웃어줘봐" (중략) 툰데가 촬영하고 있을 때 소녀가 홱 돌아선다. 그녀가 팔을 내리치는 순간 휴대폰 화면이 잠깐 흔들린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깔끔하게 찍혔다. 그녀가 화난 척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계속 실실거리는 남자의 팔로 손을 가져가는 장면. (중략) 뒤쪽에서는 소녀가 남자에게 독을 먹였다면서 사람들의 도움을 요청하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소녀가 때리면서 독을 주입했다고. - P30

조스가 아무런 말도 없자 마고는 계속 이야기한다. "다른 여자애들이…… 세 명이었지? 걔네들이 시작했다는 거 엄마도 알아. 그 남학생은 네 근처에 있었으면 안됐고. 존 뮤어 병원에서 검사받았어. 건 그냥 남자애를 놀라게 한 것 뿐이야." - P38

술 냄새가 풍긴다. 그가 분노에 차서 중얼거린다. "봤다. 공동묘지에서 남자애들과 있는 걸 다 봤어. 더러운 창녀 나쁜 계집"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후려갈기고 발로 찬다. 앨리는 몸을 웅크리지 않는다. 그만하라고 애원하지도 않는다. 그래봤자 더 오래가리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는 앨리의 다리를 잡아 벌리고 한 손은 벨트로 가져간다. 앨리가 정말로 창녀라는 점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이미 전에도 여러번 그랬으면서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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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참으로 어렵다고 느꼈었다. 그냥 막연하게 그랬다. 그림은 돈 있고 많이 배운 사람이 향유하는 작품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가, 박물관은 자주 가도, 미술관에 가본 적은 손에 꼽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이런 고전 미술에 대한 입문서가 나오고, 관련 방송들도 나왔다. 덕분에 난 옛날의 나와 달리, 고전 미술과 나름대로 친숙해졌고, 지금은 몇몇 그림은 어떤 화가가 그렸는지까지 맞추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게 바로 대중매체의 힘인가 싶기도 하고(그럼에도 현대 미술은 아직 친해지기 어려운, 정말 범접하기 어렵다). 나처럼 막연하게 고전 미술이 어렵다고 느낀 사람들이 있다면, 이 책이 엄청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고전미술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작품 앞에서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하도록 내버려두라고 권하고 싶다. 작품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잘못 반응하거나 제대로 감상하지 못할까 봐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작품을 꼼꼼히 살피면서 평가하는 일은 그다음에 해도 된다. 눈과 몸이 먼저 반응하고, 그다음에 머리가 따라가도록 해보자. 등을 곧게 펴고 가슴은 앞으로 내미는 바른 자세를 취하라는 말은 아니고, 몸의 반응에 조금 더 집중하면서 적극적으로 작품을 보라는 뜻이다.

내가 경험으로 찾아낸 가장 간단항 방법은 작품 앞에서 세 번 심호흡하기다. 작품 앞에서 몇 번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어보라. 뭔가 명상을 하는 과정 같아 보이지만 사실 예술작품 감상에 가장 적합한 태도이기도 하다. 이 책은 가능한 천천히 작품을 감상하라고 권하지만, 때로는 가차 없이 판단하면서 재빠르게 보는 훈련도 필요하다. - P19

고전 작품은 기본적으로 인물이나 형상을 묘사하기 때문에 현대 미술보다 사람들에게 더 쉽게 다가온다. 아름다운 얼굴이나 느긋하게 움직이는 인물을 보면서 그 그림에 공감할 수도 있따. 반대로 못생기고 지저분하고, 갈등하고 고통받으면서 어려움을 겪는 인물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작품과 관계를 맺기까지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을 수도 있다. - P23

하지만 작가 이름을 무턱대고 맹신해도 괜찮을까? 위대한 화가가 그렸다고 알려졌떤 작품이 기술이나 연구 방법의 발달로 수 백년이 지난 뒤에 사실은 다른 작가의 작품으로 밝혀지기도 한다. 작가가 잘못 알려진 작품은 아직도 많이 존재하고 있다. 이제 까지 빋어 의심치 않았떤 작품이 명성이나 진품 여부에 대한 문제 제기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이유이다. - P26

감상은 ‘유레카’의 순간처럼 갑자기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훑어보고, 샅샅이 살펴보고, 골똘히 바라보아야 이해된다. 하지만 몇 단계를 거쳐 이해하고 나면 그 작품의 의미나 다른 점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 P31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구하는 일처럼 작품을 다시 보면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처음 볼 때 놓친 게 무엇일까?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처음 추측하니 옳은가? 우리 모두는 사물 또는 사람의 겉만 보고 판단하기 쉽다. 다시 보기는 우리가 제대로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 P35

이제 작품을 잘 살펴보고 내 마음에 저장할지 말지 결정해야 할 때다. 예술작품을 보는 눈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아름답게 보이는 작품이 다른 사람에게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없으니 정답이 없다는 뜻이다. - P42

‘리듬’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음악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배치, 화음(조화), 음조(색조), 음의 높낮이 등 음악 작품의 특징은 그림을 감상할 때 고려해야 할 요소이기도 하다. 음악 작품마다 어떻게 연주할 지 알려주는 기호가 있다. 회하에서는 이런 기호가 그림을 반짝이게 하고, 물결치게 하고, 살아 움직이게끔 만든다. - P47

비유 단계는 여러 나라 문화, 고전 문학이나 민담 등 그림 속에 담긴 풍부한 내용을 해석하는 게 아니라, 그 그림 밑에 숨어 있는 상징, 의미, 징후를 읽어내는 것이다. 사람, 물건이나 사상을 다른 형태로 바꾸어서 은유한느 작가들의 전형적인 기법을 ‘알레고리’라고 부른다. - P50

리듬이 그림의 음색, 흥얼거림이나 전체적인 흐름이라면 구도는 그림의 짜임새, 뼈대, 토대, 구성 요소다. 기하학적인 선, 형태와 구획 혹은 지평선, 수평선, 소실점이 구도가 될 수도 있다. 이 모든 요소가 우리의 시선을 좌지우지한다. 그저 오래 바라보는 건 감상이 아니다. 화가의 구성 의도를 파악하는 일도 굉장히 중요하다. - P55

분위기는 작품을 바로 앞에서 실제로 보았을 때 가장 잘 알수 있는 전체적인 느낌, 여운을 뜻한다. 광택이 나는 책에 실린 사진 혹은 고화질 사진이나 화면으로 작품을 보는 게 맨눈으로 직접보기보다 더 또렷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전 미술을 물리적으로 가까이에서 볼 때의 느낌과는 비교할 수 없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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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조선에 뿌리박힌 사상이다. 유교를 학문으로 공부하는 유학, 모든 양반이라면 태어나, 글자를 깨우치는 시기에 유교경전을 하나 둘 읽으며 그에 세뇌된다. 공자와 맹자가 말했던 유교라는 게, 주자학으로 변질되고, 그 마저도 조선에서 또 변질되었다. 유교를 수 많은 차별과 멸시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 중 제일가는 차별은 바로 신분제 차별, 남녀 차별 그리고 새로운 문물에 대한 차별이다.



글자깨나 읽고, 유학을 공부한다는 자들은 정작 중요한 사실에는 눈 감았다. 그들은 조상의 묫자리가 중요했고, 죽은 자의 시를 외우는데 급급했으며, 한자에 점이 몇개 찍혀있는지에 대한 토론에 열을 올렸고, 자신들이 만든 신분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데 열을 올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게을렀다. 양반들에게 노동은 상놈들이나 하는 행위였으며, 본인들은 오로지 공맹을 외는 게 도리라 생각했다. 이게 바로 조선 말, 유학자의 모습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을 말한지 오백여 년이 지났것만, 조선은 오백년 전이나 후나 다를게 없었다. 오백년이 지났지만 조선의 양반네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않았고, 유학을 제외한 모든 학문을 천시하며 역모죄로 몰아넣었다. 그들이 계속 유학을 고집하며 나라의 문을 꽁꽁닫은 댓가는 참으로 참혹했다. 그들이 끈임없이 유지하려 했던 신분제, 본인들만 향유하려 했던 문자, 중국에만 사대하는 유교, 이 모든 게 어우러져 조선은 지식적으로도, 자본적으로도 하향평준화가 된 것이다.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공자께서는 Anja(원문표현; 안자)에게 극도로 청빈한 삶을 살 것을 명하셨는데, 청빈한 삶 속에 도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이었다. 공부를 많이 한 조선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어떠한 동요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반면, 어떤 한자를 쓸 때 점을 두 개 찍는 게 맞는지, 네 개 찍는 게 맞는지 하는 문제는 너무나 중요해서 모든 이들의 관심을 단번에 집중시켰는데, 이놈의 글자 모양이 뭔지 원래 논의하던 주제나 글자가 지닌 뜻은 완전히 잊히기 십상이었다. - P31

갑자기 모퉁이에서 멋을 부린 퉁퉁한 두 양반과 마주친 것은 모든 조선 사람들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나를 뒤덮고 있던 때였다. 그들은 나를 아주 얕잡아 보면서 ‘너 같은 짐승이 사는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를, 또 ‘내가 어디로 기어가고 있는 중인지’를 물었다. 순간 혈압이 올랐고, 나를 이렇게 불러 세운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그들은 내가 이렇게 대응하는 것이 신나는지 새로운 놀림감이 생겼다고 좋아하는 것 같았다. - P148

우리가 대답하자 그는 놀란 눈빛을 보내며 "여기에서 보면 어느 쪽에 나리들의 나라가 있나요?"하고 되물었다. 우리가 지구 중심을 가리키자 원님은 아주 큰 충격에 빠졌고 혹시 우리가 땅속에 사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곳은 지구 반대편 쪽이라고 설명했는데, 이것은 그가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완전히 넘어버리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급히 주제를 바꿔 안전하게 배웅해줄 테니 얼른 마을을 떠나라고 했다. - P180

서양에서는 한 사람 앞에 펼쳐질 삶을 대비하고 발전을 도모하는 것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지만 조선사람들에겐 이러한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현재에 눈 감고 과거만 바라보고 살도록, 한 사람의 정신을 개조하거나 압사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우리는 발전을 생각하지만, 그들은 통제를 생각한다. 서양의 학생은 다양한 학업 성취화 새로 알게된 갖가지 것에 기쁨을 느끼지만, 조선 사람들은 무엇을 배워 안다는 것보다 단지 한자를 읽고 쓰는 것에서만 성취를 느꼈다. - P230

관찰사 양편으로는 부하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관찰사는 질문을 한두 개 던졌는데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런 것이었다. 우리나라에 애꾸눈 부족이 살고 있느냐?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 눈이 두 개씩 달려있느냐? 서양 사람들은 이빨을 아무 때나 뽑았다가 다시 집어넣었다가 할 수 있다는데 과연 사실이냐? 이 외에도 인종학적, 과학적 질문이 이어진 후 면담은 끝이 났다. - P220

어떠한 것이든 예를 공고히 하는 것에 방해가 되는 것은 피해야 했고, 이러한 이유로 양반은 그 누구도 육체노동을 하지 않았다. 사실상 어떤 종류의 노동도 하지 않았는데, 양반의 삶은 상놈의 일을 지휘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상놈들은 모든 명령에 복종했다. - P237

이렇게 부르는 게 정당한지 부당한지는 몰라도 ‘나라의 병폐’라고 일컬어지는 서울의 지체 높으신 양반들은 이미 이런 외국 바람에 깊이 빠져 돈을 흥청망청 써대고 있었고, 세금을 내는 상민들은 입 쓴 비판을 쏟아냈다. (중략) 나라의 제조, 유통산업의 몰락과 더불어 발생한 최근의 이런 사치행각들은 조선 사람들을 역사에 길이 남을 절망적인 지점까지 몰아넣고 있었다.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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