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웠던 점 하나는 미야자키에서는 아직까지도 백제왕족과 관련된 마츠리를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곳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백제 왕족이 반란군에 쫓기다가 히무카국이 있는 미야자키 해변이 이르렀다고 한다. 백제의 정가왕과 차남 화지왕은 미야자키 휴가시 가네가하마 해변으로 들어와 난고손에 정착했고, 정가왕의 부인과 장남 복지왕이 미야자키 가구리우라 해변으로 들어와 기죠초에 정착했다고 한다. 하지만 반란군에 의해 결국 모두 죽었다는 슬픈 이야기.



물론 이 이야기는 두 마을에서 전설로 내려올 뿐이다. 일본의 사서나, 국내 사서에는 없는 이야기 인 것이다. 저자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후 일본 긴키지방으로 망명한 백제 왕족이, 일본 내에서 발생한 내란으로 화를 당한 상황이 이렇게 전설로 전해진 걸로 추측한다. 이유야 어쨌든 두 마을에서는 정가왕 일행과 장남인 복지왕 일행이 일년에 한번 씩 만날 수 있도록, 두 마을에서 합동으로 마츠리를 행하고 있었다. 아주 오랜세월동안, 지금까지도.

한일 간의 관계는 어느 시기에 걸친 어떤 내용들도 결코 간단하지 않다. 우리의 역사는 알고 있는 내용들에 대하여도 관련 내용들을 보다 깊이 있게 많은 것을 파악하고 복합적으로 생각하면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일본 역사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좀 더 객관적으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 많은 지식을 습득할 필요가 있다.

「신찬성씨록」은 815년에 편찬한 고대 씨족의 계보서이다. 출신 별로 황별 335씨족, 신별 404씨족, 제번 326씨족, 그 외 117씨족으로 분류해 그들의 조상과 씨족명의 유래 등으로 1,182씨족을 기록하고 있으며, 황별 씨족, 신별 씨족도 한반도와 많은 관련을 찾아볼 수 있으나, 도래인의 자손인 제번씨족 중 백제계가 104씨족, 고구려가 41씨족, 신라에 9씨족, 가야에 9씨족이 한반도를 뿌리로 하면서 일본 역사에 크게 기여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 P24

「일본서기」에는 하늘나라에서 쫓겨난 스사노오가 맨 처음 다다른 곳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라국에 내려와 소시모리 라는 곳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이 땅은 내가 있고 싶지 않다" 라고 하며, 배를 만들어 타고 동쪽으로 가 이즈모의 도리죠미네로 갔다. 스사노오가 다카아마노하라로부터 내려왔다는 신라국의 소시모리는 우리말로 ‘소머리‘, 한자로는 ‘우두‘라고 적는데 경남 합천에 가야산의 최고봉이 우두봉으로 이 곳이 「일본서기」에 나오는 소시모리라고 추측되고 있다. 또 하나의 우두봉이 춘천 시내에 있는데 일제 시대 때 이 곳에 거대한 신사를 계획한 적도 있고 해서 이곳을 일본 역사의 근거지로 추정하는 연구도 있다. - P24

하늘의 최고신 자손인 니니기노미코토가 내려온 곳인 구리후루타케는 가야 신화에서 김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봉우리 이름, 구지촌봉을 일본어로 읽는 것과 유사하다. 그리고 니니기노미코토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자마자 처음 하는 말로 가라쿠니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가야의 건국신화와 일본의 건국신화는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 P29

「삼국사기」에 백제 무령왕에 대해 이름은 융 또는 사마로 되어있으나, 언제 태어났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는 반면에 「일본서기」에는 무령왕의 출생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기록이 있다. 백제의 개로왕은 왜나라로 가는 곤지에게 임신 중인 부인을 함께 동행시키면서 "나의 임신한 부인이 이미 산월이 됐으니 만일 도중에 출산하면 같은 배에 태워서 조속히 백제로 돌려보내시오"라고 하였다. 하지만 임신한 부인은 일본으로 가는 중에, 앞에서 살펴본 항로 안에 있는 이키섬을 지나 가라쯔로 들어가기 전 가카라시마에서 출산한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도군(島君) 이라 했다. 그러자 곤지는 배 한척을 마련해 도군을 그 어머니와 같이 백제로 돌려보냈다.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의 발굴품 중 지석에 기록된 이와 같은 내용 중 일부가 일본서기의 기로고가 일치해서 큰 반향을 부르기도 했다. - P66

660년 7월 신라, 당나라 연합군과 전투에서 백제는 멸망한다. 일본은 구원군을 보내기로 하고 사이메이 천황이 나라 지역에서 규슈까지 온다. 그러나 규슈에서 4개월 후 사이메이 천황은 사망한다. 그 이후 황태자인 중대형 황자(덴지천황)이 전군을 지휘한다. 9월에는 백제왕자 풍장이 백제로 돌아갈 때 5천 명의 병사를 호위해서 보내고, 663년에는 27,000여 명의 증원군이 파견된다. 그것에 대응해서 당나라도 7,000여 명의 증원군을 보낸다. 결국 8월 말 양국은 백촌강에서 충돌한다. 사서에는 4백여 척의 배가 불타고, 강은 피로 붉게 물들었으며 익사자가 너무 많았다고 기술되어 있다. 일본은 대패하고 백제 부흥은 완전히 실패했다. - P102

664년 미즈키 유적은 백제 멸망 후 일본은 당나라와 신라의 공격에 대비해 다자이후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후쿠오카 평야와 쓰쿠시 평야에 걸쳐 가장 높은 장소에 토성을 쌓은 곳이다. 후쿠오카 시내에서 미즈키 쪽을 바라보면 왼쪽에 오노성이 있고 오른쪽에 기이성이 있다. 그 사이 가장 좁은 곳을 연결하여 흙으로 성을 쌓아 놓아 그 뒤쪽으로 침략하기에는 쉽지 않은 방어벽인 것을 실감할 수 있게 만들어져 1,300여년이 지난 지금도 견고해 보인다. - P95

일본에서는 갓파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하나 이곳 야스시로에는 시내 여기저기에 가라로 시작하는 지명이 눈에 많이 보인다. 이곳에서는 갓파를 가랏파(加羅輩:가라배)라고도 한다. 즉, 가라의 무리들, 바다를 건너온 이방인들이 세월이 가면서 특징이 과장되어 상상의 동물로 자리 잡은 것 같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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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정말 많은 피해 사실이 실려 있다.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나타나던 군부에 의한 양민 학살 사건이, 당시의 일본에서도 있었다. 정말 많이 있었다. 심지어 일본 군인은 자국의 민간인들에게 수류탄을 쥐어주며 ‘집단자결‘까지 강요했다. 특히 오키나와인은 일본인이었으나 일본인이 아니었기에, 제일 많은 피해를 입었다.



지금은 영화 ‘박열‘와 예능 ‘선을 넘는 녀석들 한반도편‘ 덕분에 많이 알려진 관동대학살에 대한 내용도 있다. 관동대학살에 대한 이야기는 예전에 포스팅을 한 적도 있다.



일본은 아키히토 일왕 퇴위 & 나루히토 왕세자 즉위로 들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아키히토 일왕이 헌법 9조를 지키기 위해서 택한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 숨겨 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나루히토 왕세자가 부친인 아키히토 일왕과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것이랄까. 아무리 현실 정치에 힘이 없는 일왕이라도, 그래도 정상적인 사람이 일왕으로 있는 게 그나마 우리에게는 나은 일일테니........... 제발 아베 좀 몰아내자 ㅜㅜ

일본의 거대 신문은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가담했지만 진지한 반성과 정리도 없이, 전쟁 이전과 전쟁 당시의 옛 경영진 또한 대부분 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전후에도 신문 발행을 이어갔습니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한 침략전쟁에 대한 노골적인 협력에는 일정 정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한국 등에 대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강제징용 문제의 본질은 일본의 침략전쟁, 식민지 지배와 결부된 중대한 인권 문제입니다. 본래대로라면 가해자인 일본정부와 해당 기업은 과거의 잘못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기초로 피해자의 존엄,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합의에 의해 전쟁범죄에 해당하는 종류의 일을 진정한 것은 아니다.

‘화해/치유재단‘에 10억엔의 출자가 완료되면

‘합의‘에 기초한 일본 측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2016년 1월,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아베총리가 한 말

‘위안부‘는 병사들에게 물건처럼 던져졌다"고 말씀하시는 이옥선 할머니. 일본군 위안소에서 하루 40~50명을 상대할 것을 강요받는 날도 있었고, 저항하면 어김없이 폭력이 가해졌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이옥선 할머니의 눈앞에서 성행위를 거부한 14세 소녀를 죽였습니다.

"우리는 눈물을 감추고 견딜 수 밖에 없었다"는 이옥선 할머니. 길가에 버려진 시신은 들개에 뜯어 먹혀 유골조차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베 정권은 이번 합의에서 ‘군의 관여‘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그 후 국회에서 "성노예라는 사실은 없다"고 답변, 여성들이 군위안소에서 성노예 상태에 있었다는 ‘위안소‘ 문제의 본질을 부정했습니다.

어느 날 일본군 세 명이 저를 ‘오케다‘라고 불리는 군인의 숙소로 끌고 갔습니다. 옷을 벗기자 저항하는 제게 병사는 "머리를 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저는 오케다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막사에서는 저를 끌고 온 3명의 병사들에게 윤간을 당했습니다. 당시 저는 아직 초경도 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중략) 오케다와 일본 병사들은 저항하는 아이가 있으면 인접한 면직물공장에서 모친을 불러내 눈앞에서 강간했습니다. 어떤 병보는 일본 병사로부터 "여동생을 취직시켜 줄 테니 데려오라"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여동생을 데려오자 오케다가 강간해버렸습니다. 그녀가 "왜 나한테 이렇게 참혹한 일을 당하게 했느냐"라고 절규하자 오빠는 괴로운 나머지 그 자리에서 피스톨로 자신의 머리를 쏘아 자살했습니다 - 인도네시아, 틴다 렌게.

군화소리가 다가오는 요즈음

아버지로부터 전해들은 731부대의 실상을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이를 통해 헌법 9조야 말로

진정 평화로 가는 길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가미야 노리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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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 쓴 책의 내용, 이는 정말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회사에서 읽으며 차오르는 눈물을 억누르느라 혼날정도였으니까.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되려 이런 기록을 한 일본인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들 스스로는 감추고 싶었을 역사인데, 오히려 더 찾아내어 만천하에 공개했으니. 피해국가 정부가 나서서 해야할 일을 가해국가에서, 그것도 기자들이 이렇게 나서서 알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진데. 아마 협박이나 테러도 많이 당했으리라 생각한다. 실제로 한국으로 귀화하신 호사카 교수님도 일본 우익세력에게 많은 협박을 받으셨다고 하니까. 아 물론 국내 우익세력도 있었다고 하니 말 다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감정 소모가 너무 심해서, 2권을 읽어야 하나 순간 고민을 했다. 하지만 우리 역사니까. 누군가는 알아야 하고, 기억해야 하는 역사다.

이 책은 원래 일본의 일반 독자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침략 전쟁과 한반도, 타이완에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실에 근거해 분명하 반성하지 않고서는, 결코 아시아 여러 나라와 그 국민들과의 ‘화해와 우호‘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침략 전쟁의 역사와 상황을 규명하고, 기자들이 한국, 중국 등에서 피해를 입은 현지 주민들로부터 직접 들은 증언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는 1부 ‘청일/러일전쟁에서 패배 전까지의 51년‘과 ‘한국병탄과 식민지 지배‘에서 다룹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한 것은 청일/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주된 목적이 한반도의 국민과 자원에 대한 ‘강탈적 지배‘에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일본군의 개입/군사지배에 저항하며 일어난 동학농민혁명, 항일의병운동 등과 같은 한국의 민중 운동, 특히 3.1 독립운동이었습니다.

전후 70년 아베 담화에 대한 전문가간담회 보고서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많은 비서양 식민지 사람들의 용기를 복돋웠다", "식민지화에 제동걸 걸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이와 정반대이며,

러일전쟁은 만주와 한반도의 지배권을 둘러썬 러·일 두 나라 간의 침략전쟁이었을 뿐입니다 - P 24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에 의해 일본은 한국으로부터 주권국가로서의 모든 통치권을 빼앗고,

한반도에서의 식민지 지배를 성립시킵니다.

이는 메이지 정부가 ‘제국 100년의 장계‘로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 결과였습니다



*제국 100년의 장계 : 한국을 병합하고 이를 제국 영토의 일부로 함은 우리의 실력을 확립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내외의 형세를 지켜보다 적당한 시기에 병합을 실행해, 반도를 명실상부하게 우리의 통치하에 두고

다른 나라들과 조약관계를 소멸시키는 것은 제국 100년의 장계가 된다. (메이지시대 각의 결정 1909년 7월 6일)

- P 32~33

"역사적으로 정확한 기술이 아닙니다.

일본에 의한 옜 종주국의 타도와 점령통치가 이 나라들의 독립에 있어 필수조건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독립의 움직임은 시작되었으니까요"

- 게이오대학 구라사와 아이코 명예교수

731부대는 페스트균 등의 세균 병기를 극비리에 연구·개발했고

데이터를 얻기 위해 ‘마루타‘로 불리던 중국인 포로들에게 인체실험을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시신은 소각로에서 불태

웠습니다 - P77

731부대는 인체 실험으로 효과를 확인한 세균을 실전에 사용했습니다.

실전에서 처음 장티푸스 균을 살포한 것은 1939년 노몬한 사건 이었습니다.

또한 일본군은 731부대 등을 중국 각지로 보내 1940~1942년에 중국 내 십 수개 도시에 세균을 살포했습니다.

기록된 사망자수는 2차감염에 의한 경우까지 포함하면 2만명에 이릅니다 - P 82

이시이 시로 부대장을 비롯해서 731부대에서 인체 실험을 진행한 의사와 의학자들은

전후 미국에 실험 데이터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도쿄 재판에서 전범으로서의 혐의 추궁을 면책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대다수가 의학계로 복귀했습니다. - P83

- 14살 때 강제 동원된 한국의 근로정신대 피해자, 양금덕

초등학교 일본인 교장과 헌병은 "정신대로 일본에서 일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여학교도 갈 수 있다." 라며 학생들으 속여 양씨 등 10명을 지명했습니다. 나중에 부모들이 반대한다고 하자, 교장은 "네가 안 가면 경찰이 너희 부친을 잡아갈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렇게 끌려가게 된 곳은 미쓰비시 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의 도우도쿠 공장이었습니다. 삼엄한 감시하에서 거대한 비행기 부품에 도장작업을 했습니다. 당시 페인트가 자주 눈에 들어갔떤 탓에 지금도 눈이 아프다고 합니다. (중략) 양 씨는 일본이 패전을 맞은 뒤인 1945년 10월에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급료는 받지 못한 상태였고, 한국 사회에서는 일본군 위안부로 오해받았습니다. 정신대였던 것을 숨긴 채 결혼했는데, 남편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되자 "더러운 여자"라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 P 100

-위안소를 전전하며, 김복동

김 씨가 14살이던 당시 마을의 구역장과 반장이 일본인과 함께 찾아와 "딸을 군복 만드는 공장에 보내라. 거부하면 반역자다" 라며 가족들을 위협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끌려간 곳은 중국 광둥성에 있던 위안소였습니다. 일본군의 성 노예가 되어 하루 15명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주말에는 50명이 넘었습니다. 5년간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 등을 전전했습니다. 외국에 가면 일본 정부가 이 문제를 이미 해결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보니 이야기를 하면 다들 놀라면서 이대로는 안된다고 많이 공감해주십니다.

-중국 후난성, 창지아오 학살사건

쟝야오메이 증언) 일본군이 창지아오에 왔을 때 쟝씨는 생후 1개월이 된 작은 딸과 집에 있었습니다. 세 사람의 일본군은 쟝 씨를 발가벗겨 이웃집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들은 부엌에 이불을 깔더니 당시 15살 정도이던 그 집 소년에게 쟝씨를 강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호통을 들은 소년은 얼떨결에 쟝 씨를 덮쳤지만 공포로 떨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화가 난 일본군은 나무 막대기를 쟝 씨의 하반신에 쑤셔 넣고 30분 이상 고통을 주었습니다.

런더바오 증언) 일본군이 집에 들어와서 총검으로 런 씨의 머리를 가격하고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다음 날 출산 예정이던 모친은 거동조차 힘든 몸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는데, 일본군이 총검에 2번이나 배를 찔려 태아와 함꼐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본군은 이에 멈추지 않고 모친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낸 뒤 총검으로 찔러 높이 내걸었습니다. 주변에 있던 동료 일본군들이 웃으며 박수를 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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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를 소환하는 글도 악마를 감동시킬 만큼 재미가 있어야 악마를 부를 수 있다.

설계를 해서 써라.
팩트를 써라.
짧게 써라.
리듬을 맞춰라.

좋은 글은 쉽다.

쉬운 글은 전문용어나 현학적인 단어가아니라 평상시 우리가 쓰는 입말을 사용해 짧은 문장으로 리듬감 있게 쓴 글이다.

독자는 글을 읽으면서 감동 받기를 원한다.

감동은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에서 나온다.

‘매우‘ ‘아주‘ ‘너무‘ 같은 수식어는 그 감동을 떨어뜨린다.

독자들은 ‘너무 예쁘다‘ 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예쁜 이유, 즉 구체적인 팩트를 원한다.

불명확한 글, 결론이 없는 글은 독자를 짜증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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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최영에게 말했다.

"이 사변은 내 본심이 아니오. 국가가 편안하지 못하고

인민이 피로하고 원망이 하늘에 사무쳤기 때문에 생긴 일이니 잘 가시오.‘ - P173

나라 이름은 그전대로 고려라 하고 의장과 법제는 한결같이 고려의 고사에 의거한다 - P284

이성계는 그제야 화가위국이 비극의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왕씨에게만 비극의 길이 아니라 이씨에게도 비극의 길이었다.

그것이 왕가의 길이고, 권력의 길이었다. -P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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