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겨 쓴 책의 내용, 이는 정말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회사에서 읽으며 차오르는 눈물을 억누르느라 혼날정도였으니까.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되려 이런 기록을 한 일본인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들 스스로는 감추고 싶었을 역사인데, 오히려 더 찾아내어 만천하에 공개했으니. 피해국가 정부가 나서서 해야할 일을 가해국가에서, 그것도 기자들이 이렇게 나서서 알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진데. 아마 협박이나 테러도 많이 당했으리라 생각한다. 실제로 한국으로 귀화하신 호사카 교수님도 일본 우익세력에게 많은 협박을 받으셨다고 하니까. 아 물론 국내 우익세력도 있었다고 하니 말 다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감정 소모가 너무 심해서, 2권을 읽어야 하나 순간 고민을 했다. 하지만 우리 역사니까. 누군가는 알아야 하고, 기억해야 하는 역사다.

이 책은 원래 일본의 일반 독자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침략 전쟁과 한반도, 타이완에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실에 근거해 분명하 반성하지 않고서는, 결코 아시아 여러 나라와 그 국민들과의 ‘화해와 우호‘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침략 전쟁의 역사와 상황을 규명하고, 기자들이 한국, 중국 등에서 피해를 입은 현지 주민들로부터 직접 들은 증언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는 1부 ‘청일/러일전쟁에서 패배 전까지의 51년‘과 ‘한국병탄과 식민지 지배‘에서 다룹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한 것은 청일/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주된 목적이 한반도의 국민과 자원에 대한 ‘강탈적 지배‘에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일본군의 개입/군사지배에 저항하며 일어난 동학농민혁명, 항일의병운동 등과 같은 한국의 민중 운동, 특히 3.1 독립운동이었습니다.

전후 70년 아베 담화에 대한 전문가간담회 보고서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많은 비서양 식민지 사람들의 용기를 복돋웠다", "식민지화에 제동걸 걸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이와 정반대이며,

러일전쟁은 만주와 한반도의 지배권을 둘러썬 러·일 두 나라 간의 침략전쟁이었을 뿐입니다 - P 24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에 의해 일본은 한국으로부터 주권국가로서의 모든 통치권을 빼앗고,

한반도에서의 식민지 지배를 성립시킵니다.

이는 메이지 정부가 ‘제국 100년의 장계‘로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 결과였습니다



*제국 100년의 장계 : 한국을 병합하고 이를 제국 영토의 일부로 함은 우리의 실력을 확립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내외의 형세를 지켜보다 적당한 시기에 병합을 실행해, 반도를 명실상부하게 우리의 통치하에 두고

다른 나라들과 조약관계를 소멸시키는 것은 제국 100년의 장계가 된다. (메이지시대 각의 결정 1909년 7월 6일)

- P 32~33

"역사적으로 정확한 기술이 아닙니다.

일본에 의한 옜 종주국의 타도와 점령통치가 이 나라들의 독립에 있어 필수조건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독립의 움직임은 시작되었으니까요"

- 게이오대학 구라사와 아이코 명예교수

731부대는 페스트균 등의 세균 병기를 극비리에 연구·개발했고

데이터를 얻기 위해 ‘마루타‘로 불리던 중국인 포로들에게 인체실험을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시신은 소각로에서 불태

웠습니다 - P77

731부대는 인체 실험으로 효과를 확인한 세균을 실전에 사용했습니다.

실전에서 처음 장티푸스 균을 살포한 것은 1939년 노몬한 사건 이었습니다.

또한 일본군은 731부대 등을 중국 각지로 보내 1940~1942년에 중국 내 십 수개 도시에 세균을 살포했습니다.

기록된 사망자수는 2차감염에 의한 경우까지 포함하면 2만명에 이릅니다 - P 82

이시이 시로 부대장을 비롯해서 731부대에서 인체 실험을 진행한 의사와 의학자들은

전후 미국에 실험 데이터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도쿄 재판에서 전범으로서의 혐의 추궁을 면책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대다수가 의학계로 복귀했습니다. - P83

- 14살 때 강제 동원된 한국의 근로정신대 피해자, 양금덕

초등학교 일본인 교장과 헌병은 "정신대로 일본에서 일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여학교도 갈 수 있다." 라며 학생들으 속여 양씨 등 10명을 지명했습니다. 나중에 부모들이 반대한다고 하자, 교장은 "네가 안 가면 경찰이 너희 부친을 잡아갈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렇게 끌려가게 된 곳은 미쓰비시 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의 도우도쿠 공장이었습니다. 삼엄한 감시하에서 거대한 비행기 부품에 도장작업을 했습니다. 당시 페인트가 자주 눈에 들어갔떤 탓에 지금도 눈이 아프다고 합니다. (중략) 양 씨는 일본이 패전을 맞은 뒤인 1945년 10월에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급료는 받지 못한 상태였고, 한국 사회에서는 일본군 위안부로 오해받았습니다. 정신대였던 것을 숨긴 채 결혼했는데, 남편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되자 "더러운 여자"라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 P 100

-위안소를 전전하며, 김복동

김 씨가 14살이던 당시 마을의 구역장과 반장이 일본인과 함께 찾아와 "딸을 군복 만드는 공장에 보내라. 거부하면 반역자다" 라며 가족들을 위협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끌려간 곳은 중국 광둥성에 있던 위안소였습니다. 일본군의 성 노예가 되어 하루 15명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주말에는 50명이 넘었습니다. 5년간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 등을 전전했습니다. 외국에 가면 일본 정부가 이 문제를 이미 해결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보니 이야기를 하면 다들 놀라면서 이대로는 안된다고 많이 공감해주십니다.

-중국 후난성, 창지아오 학살사건

쟝야오메이 증언) 일본군이 창지아오에 왔을 때 쟝씨는 생후 1개월이 된 작은 딸과 집에 있었습니다. 세 사람의 일본군은 쟝 씨를 발가벗겨 이웃집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들은 부엌에 이불을 깔더니 당시 15살 정도이던 그 집 소년에게 쟝씨를 강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호통을 들은 소년은 얼떨결에 쟝 씨를 덮쳤지만 공포로 떨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화가 난 일본군은 나무 막대기를 쟝 씨의 하반신에 쑤셔 넣고 30분 이상 고통을 주었습니다.

런더바오 증언) 일본군이 집에 들어와서 총검으로 런 씨의 머리를 가격하고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다음 날 출산 예정이던 모친은 거동조차 힘든 몸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는데, 일본군이 총검에 2번이나 배를 찔려 태아와 함꼐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본군은 이에 멈추지 않고 모친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낸 뒤 총검으로 찔러 높이 내걸었습니다. 주변에 있던 동료 일본군들이 웃으며 박수를 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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