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겨울
아들린 디외도네 지음, 박경리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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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는 방이 네 개 있었다.

내 방, 동생 질의 방, 부모님 방, 그리고 시체들의 방.


                                           - <여름의 겨울>, 7쪽 -


책의 시작부터 슬픔과 우울이 밀려왔다.

'시체들의 방'이라니... 뭔가 정상적이지 않은 가족의 모습이 눈에 그려져 마음이 무거웠다.

거대하고 폭력적인 아버지, 그 폭력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아메바 같은 어머니, 그리고 젖니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 사랑스러운 동생 질...

TV 속의 가족들은 함께 이야기하고 행복하게 웃고 서로 사랑하지만, "우리 집에서의 가족 식사란, 커다란 잔에 담긴 오줌을 매일 마셔야만 하는 벌과 비슷했다(P. 26)".

그래도 질과 함께 놀고 이야기를 해 주는 그런 생활들은 너무 행복했었다. 그 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꽃의 왈츠'가 울려퍼지며 집 앞으로 아이스크림 트럭 할아버지가 왔다. 크림을 얹은 아이스크림을 주문했을 뿐인데, 사이펀 기계의 폭발로 우리의 눈 앞에서 크림을 뽑아내던 할아버지의 얼굴이 날아갔다.

그리고 그 사건 이후로 질이 달라졌다.

아버지의 사냥 전리품이 가득찬 '시체들의 방', 그 곳에 있는 하이에나가, 혹은 그 방에 있는 어떤 사악한 것이 질의 머릿 속에 스며들었다. 그 짐승이 질의 안에서 살기 시작했다.

- p. 52

부모님은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아버지는 TV에 온 정신을 쏟았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데 온 정신을 쏟았다.

낯선 눈빛의 질을, 예전의 그 사랑스러운 질로 되돌리기 위해 영화 '백 투더 퓨처'처럼 타임머신을 만들고 싶었고, 그래서 과학 공부를 열심히 했다. 자신이 과학을 맡으면, 숲 속에 사는 어른 친구 모니카가 폭풍을 맡아줄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과거로 돌아가 예전의 질로 돌려놓고 싶었던, 결전의 날에 모니카는 슬픈 눈빛으로 말한다. "하지만... 이건 그냥 놀이일 뿐이라는 사실을 아는 거 아니었니?"라고.

점점 잔인해지는 질, 소녀는 그런 질을 되돌리기 위해 과학 수업, 특히 물리학 수업에 열정을 쏟는다.

-p. 91

마치 엄마 배 속에 있는 것처럼 따듯하고 포근한 짧은 시간. 그 시간만큼은 내가 삶의 여정을 능숙하게 지배하고 있는 듯한 환상을 품을 수 있었다. 마치 하이에나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는 벽이 존재하는 것처럼.

하지만 결국엔 항상, 분류될 수 없는 종이들이 있다는 것을, 연습문제도, 기하학도,곱셈도 진정 분류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으로 그 시간을 끝난다.

삶이란 믹서에 담겨 출렁이는 수프와 같아서, 그 한가운데에서 바닥으로 끌어당기는 칼날에 찢기지 않을고 애써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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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내는 주인공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폭력적이고 공포의 대상일 뿐인 아버지, 자기 자신조차 지킬 힘이 없어 보이는 어머니, 그리고 끔찍한 상황을 마주한 후 완전히 변해버린 동생까지, 가장 그녀 가까이에서 그녀를 보살피고 안아주어야 할 가족들은 그녀의 힘이 되어주지 못한다.

그러나 이 똑똑하고 지혜로운 소녀는 사랑하는 동생을 지켜내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열정을 불태운다.

그녀의 가족들은 힘이 되어주지 못했지만, 다행히도 깃털과 챔피언, 영 교수 등 그녀에게 마음의 위안이 되어 주는 좋은 조력자들도 있었다.

첫사랑의 열병, 몸의 변화 등 자연스럽게 닥치는 일들에도 그녀는 마음을 다잡아낸다. 질을 위해서, 그리고 어머니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히는 일들은 일어난다. 타인에 의해서가 아닌, 가족에 의해서 말이다.

아버지에 의해 낯선 타인들에게 먹잇감으로 놓이게 된 그녀,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파괴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행복해지기를, 너무 어린 나이에 이런 일들을 겪어버린 그녀가 빨리 좋은 날을 맞이하기를 얼마나 바라면서 책장을 넘겼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열다섯 살의 여름 끝자락, 그녀는 더이상 두렵지도, 약하지도 않았다. 그 사건을 계기로 그녀의 인생 2막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너무나도 반짝거리는 소녀, 그래서 그녀가 너무 눈부셔서 내 눈이 조금 따끔거린다. 어느새 내 마음도 벅차 올라, 그녀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하게 된다.

지금까지도 너무 잘 해 줬고, 그러니 앞으로도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이제는 정말 행복하기만을, 그리고 되찾은 질의 미소를 계속 지켜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

- p. 270

두렵지 않았다. 나는 약하지 않았다. 이것만은 알 수 있었다.

나는 열다섯 살에 내 죽음을 받아들였다.

나는 삶이 나에게 선사한 그 모든 경이로움을 보았다. 공포를 보았고,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리고 아름다움이 승리했다.

나는 약하지 않았다. 나는 질을 영원히 잃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약하지 않았다. 나는 먹잇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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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방
오쓰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고요한숨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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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를 구분짓지 않고 다양한 글을 쓰는 작가 오츠이치, 그는 작품의 장르에 따라 필명까지 바꾸며 글을 쓴다라고 한다. 얼마 전에 읽은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의 작가 야마시로 아사코와 오츠이치가 동일 인물이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번 책 《일곱 번째 방》은 2007년 출간된 <ZOO>의 개정판이라고 하는데, 워낙 천재작가로 불리우는 작가에다 기존 출판된 <ZOO>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들었던 터라 읽기 전부터 기대가 되었다.

 

작가는 책의 첫 번째 이야기 '일곱 번째 방'부터 내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어느 날 나는 누나와 함께 납치되어 회색 콘크리트 방에 갇힌다. 창문은 없고 방 안의 중앙에는 악취가 나는 썩은 물이 흐르는 곳, 아침이면 빵이 제공되고 저녁 6시면 어느 방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기계 소리 등 불길한 소리가 들린다.

나는 작은 몸을 이용해 도랑을 헤엄쳐, 우리가 갇힌 방을 포함해 총 일곱 개의 방이 있고 그 곳에도 납치된 사람들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우리를 이 방에 가둔 걸까."

 

- p. 36

이 굳게 닫힌 방은 우리를 그저 가두고 있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더욱 중요한, 인생이나 영혼마저 가두고, 고립시키고, 빛을 빼앗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말하자면 이 방은 영혼의 감옥이었다. 이 방은 이때까지 본 적도 겪은 적도 없는 진짜 고독이나, 자신에게는 이제 미래가 없다는 삶의 무의미함을 가르쳐주었다.

-

누나가 무릎을 안고 웅크린 채 흐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태어나기 훨씬 전, 역사가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인간의 진짜 모습은 이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둡고 습한 상자 안에서 울고 있는 듯한, 지금의 누나 같았던 건지도 모른다.

 

두 번째 이야기인 'SO-far'도 충격적이었다.

나와 아빠가 거실에 앉아 텔레비젼을 보고 있을 때 엄마가 들어온다. 혼자서 텔레비젼을 보냐고 묻는 엄마... 분명 옆에 아빠가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아빠도 엄마가 보이지 않는지 나에게만 외식을 하러 가자고 하더니, 엄마가 남아 있는 집의 불을 끄고 문을 닫아 버린다.

나는 그 무렵 발생한 전차 사고로 엄마 혹은 아빠가 사망했고, 남아 있는 아빠 혹은 엄마의 세계가 각각 분리되었다라고 믿게 된다. 그래서 엄마와 아빠의 세계의 접점인 내가 소파의 중간에 앉아 양 옆에 앉은 엄마와 아빠의 말을 전달해주며 생활해 나간다.

그러던 어느날 화가 난 아빠에게 혼난 나는 엄마의 세계에서 살아가기로 결정하고, 그 후로 아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건 뭐, 아동학대였다. 이야기를 다 읽고난 후에 곧바로 드는 생각이 '아동학대'였는데, 아마 읽으신 분들이라면 맞다라며 손뼉을 치지 않을까... 그리고 뒤늦은 후회는 소용없다는 점... ^^

 

세 번째로 'ZOO'를 만났다.

100일 넘게 우편함에 옛 연인이었던 그녀의 사진이 들어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죽은 그녀의 시체가 찍혀 있는 사진이다.

나는 컴퓨터에 사진을 저장해 그 사진들을 연속적으로 본다.

나와 만난 후 갑자기 사라졌던 그녀, 나는 갑작스레 연인을 잃은 여느 남자처럼 그녀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회사마저 그만두고 매일매일 그녀를 찾기 위해, 이제는 그녀를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 고통스러워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건 다 연기다.

결코 범인을 잡을 수 없다. 그녀를 죽인 건 바로 나이기 때문에...

 

- p. 120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하루를 마쳐도 나는 그녀를 죽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변하는 것은 없다.

그 동물원에서 우리 안을 빙빙 돌던, 보기 흉한 원숭이와 마찬가지다. 언제까지고 같은 하루를 반복한다.

아침에 되면 우편함에서 사진을 발견하고 경악한다. 그렇게 되디라는 것이, 유감스럽게도 정해져 있다.

 

위 3편 외에도, 인간이 모두 없어진 세계에서 인간과 똑같이 만들어진 사이보그(?)가 진정한 죽음의 의미를 알아가는 이야기(양지의 시),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마력의 목소리를 가진 남자의 이야기(신의 말), 사랑받는 쌍둥이 동생과는 달리 엄마에게 끔찍한 학대를 받는 여학생의 이야기(카자리와 요코), 검은 옷장 속에 죽은 남자를 숨기는 이야기(Closet), 10년 전 교통사고로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된 남자의 이야기(혈액을 찾아라), 시체로 숲 속에 집을 짓는 남자의 이야기(차가운 숲의 하얀 집), 각자의 사정으로 비행기를 탄 남녀가 하이재킹을 당하는 이야기(떨어지는 비행기 안에서), 어린 시절 공원의 모래밭에서 겪은 이야기(옛날 저녁놀 지던 공원에서) 등 책 속에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가득 차 있었다.

 

읽으면서 '이게 뭐야'라는 생각보다는, 모든 이야기들이 다 재미있었다. 아, 맨 마지막 이야기는 이해를 제대로 못한 건지 좀 애매하긴 했지만... ^^

그리고 두 번째 이야기에서 아동학대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진짜 끔찍한 아동학대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약간 씁쓸함을 준 이야기도 있었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약을 파는 남자의 모습에는 분위기의 심각함을 잊고 헛웃음이 나기도 했다.  

 

워낙 독특하고 섬뜩한 상상력이 결집된 소설들이라 오츠이치의 작품에는 독자들의 호불호가 나뉜다고 들었는데, 지금 이 책을 포함해 내가 지금껏 읽었던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나에게 '호'였다. 피가 낭자한 상태로 갑작스레 이야기가 종결되는 것이 아니어서 좋았고, 무섭고 가끔은 불쾌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상상이 납득가능하게 펼쳐지는 이야기라는 것도 좋았다.

다양한 장르, 다양한 인간, 다양한 감정을 한 권의 책으로 느껴보고 싶다면, 오치이치라는 이 작가를 주목해 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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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여자들 스토리콜렉터 82
아나 그루에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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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르 해안에 있는 지방 소도시 '크리스티안순', 그 곳에는 광고대행사 카피라이터로 이름을 날린 '단 소메르달'과 그의 부인이자 크리스티안순 클리닉을 운영하는 '마리아네', 그리고 단의 오랜 친구이자 경쟁자인 경찰서 수사과장인 '플레밍 토르프'가 있다.

어느 월요일 저녁, 플레밍이 저녁 식사를 한 후 돌아가려던 그때 살인 사건이 발생했음을 알리는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단이 일하는 회사 '쿠르트&코'에서 여성이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는 것. 플레밍은 현재 심신상의 이유로 휴직중인 단에게 피해자 신원확인 등을 이유로 동행을 요청한다. 

 

피해자는 청소업체 직원인 '릴리아나'로 확인되었지만, 피해자에 대한 정보를 전혀 얻을 수가 없었다. 청소용역업체에도 그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고, 그녀의 진짜 이름도 모르고, 지문도 일치하는 것이 없고, 실종자 데이터베이스에서도 그녀에 대한 자료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릴리아나의 친구로 추정되는 샐리를 찾아봤지만 그녀 역시 몇 주전부터 일을 쉬는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릴리아나와 파트너로 청소일을 하는 '벤야민'은 사건 당일 릴리아나가 살해된 모습을 보았음에도 신고를 하는 등의 조치를 하지 않고 거짓진술을 하는 등 의심스러운 행동을 보였지만, 플레밍은 부검 결과 등을 보고 그에 대한 의심은 조금씩 거둔다.

 

 

한편, 단은 마리아네의 갑작스런 제안(혹은 거의 명령)으로 그녀의 환자였던 앨리스와 벤야민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고, 그들이 누구로부터 도망다니고 있는지, 과거에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에 대하여 듣게 된다.

 

 

그 후 목요일, 오메루프 해변에서 행방이 묘연했던 샐리의 시신이 발견된다. 그녀는 목이 졸려 죽은 릴리아나와 달리 심한 구타로 인해 사망한 걸로 보였다.

범행수법이 완전히 다른 두 사건, 릴리아나와 샐리를 죽인 사람은 누구일까?

절친이자 경쟁자인 단과 플레밍은 완벽한 콤비를 이루며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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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가던 카피라이터로 승승장구하던 단 소메르달은 쉬지 믿지 못해 자신이 일을 끌어안고 전전긍긍하다가 갑작스런 번아웃을 겪고 현재는 휴직으로 일을 쉬고 있었다.

그러던 그는 회사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과 관련해 친구인 플레밍에게 자신이 아는 정보를 전해주는 동시에 추리와 직관을 펼치며 사건이 앞으로 나아가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 p. 52

단이 쿠르트&코의 살인사건 수사에 조금이라도 관여하면 집과 회사만 쳇바퀴 돌듯 반복하던 그의 삶에 뭔가 특별한 활력을 주게 되지 않을까?

 

 

그런데... 단순히 오랜 친구이자 비슷한 똑똑한 능력을 가진 경쟁자로만 보였던 그 둘의 관계는 좀 더 복잡미묘했다.

바로 플레밍의 여자친구였던 마리아네가 단과 결혼했던 것!!!

두두둥~~~!!! 그러나 그들은 그 부분에 대한 언급은 피한 채 오랫동안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단과 플레밍의 미묘한 심리를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러나 누가 피해자를 죽였는지에 대한 단과 플레밍의 멋진 수사와 추리도 중요한 문제겠지만, 뭐니뭐니해도 이 책은 제목 <이름 없는 여자들>에서 보여지듯이 '이름 없는 여자들'의 사연이 가슴에 많이 남았다.

외국인 불법근로자인 살해당한 릴리아나와 샐리를 포함해서, 벤야민의 어머니 앨리스까지... 그들은 자신들을 괴롭히고 학대하는 누군가로부터 도망쳐 이름을 바꾸고 숨 죽이며, 마치 없는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 p. 135

그 친구들은 전부 특정 인물이나 어떤 것을 피해 숨어 살아요. 피하는 것의 대부분은 출입국사무소나 외국인 담당 기관이지만 어떤 경우는 가족과 연관이 있기도 하죠. 폭력적인 남편이나 포주 말이에요. 아주 끔찍한 얘기들이 많아요.

 

 

이름 없는 그녀들에게 도움을 손길을 내밀어 준 사람들에게 그들은 감사한 마음을 가지며 살아가지만, 글쎄... 선의로 도움을 준 사람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들의 손을 잡아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처음 그 단체의 존재가 드러났을 때, 훌륭한 사람들이 많구나 싶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비록 소설속이었지만, 불리한 위치의 사람들을 자신의 이득을 취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하는 건 참... 씁쓸했다.

그래도 그녀들은 그 사람들이 없다면 더 끔찍한 지옥에 던져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비록 남들보다 적은 보수나 대접에도 그 사람들에게 더할 수 없이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마지막에 밝혀지는 범인, 그리고 자신에게는 사소할지도 모르는 자신의 거짓말로 인해 범인의 범행에 불을 지펴버린 그 사람까지, 착한 사람인 척 남을 돕는 척 살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내면은 참 끔찍했다.

 

 

북유럽 코지미스터리의 여왕으로 불린다는 '아나 그루에', 이 책 <이름 없는 여자들>은 코지미스터리임에도 소설 속 소재가 꽤 진중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다음 작품이 또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제 완전히 프리랜서가 된 단 소메르달과 수사과장 플레밍 토르프의 다음 공동 수사도 기대가 된다.

다음 편에도 그들의 알콩달콩 캐미가 순탄하게 이어지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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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차의 애프터 파이브 - 막차의 신, 두 번째 이야기
아가와 다이주 지음, 이영미 옮김 / 소소의책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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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희망이 시작되는 시간, 《첫차의 애프터 파이브》를 읽었다.

'막차의 신 두 번째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이 책은, 전작 <막차의 신>처럼 따뜻하고 잔잔한 다섯 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첫차의 애프터 파이브》는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오후 5시처럼, 첫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오전 5시 이후의 잔잔한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밤새도록 불빛이 꺼지지 않는 신주쿠 혹은 신주쿠 가부키초를 배경으로,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잔잔하면서도 온기가 느껴지는 사연들이 소개된다.

 

 

젊은 시절부터 해외 지사에서 일하며 능력을 인정받고 승승장구했지만 지금은 신주쿠 러브호텔에서 야간 청소일을 하는 남자(첫차의 애프터 파이브), 더 큰 무대에서 노래를 하고 싶어 고향을 떠나 도쿄로 올라왔지만 정작 도쿄의 거리에서 위축되어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방황하던 여자(스탠 바이 미), 가부키초 한복판의 식당 '정식 이치아야'에서 만난 일하던 사무실이 문을 닫아 바텐더로 일하던 여자와 동일본 대지진으로 재난을 입어 도쿄로 올라와 호스티스로 일하는 여자(초보자 환영, 경력 불문), 헤어진 여자친구를 데리러 막차가 끊긴 사루하시역으로 가는 남자(막차의 여왕), 출장 성매매 여성을 손님이 있는 곳에 데려다주는 통칭 딜리버리헬스를 하는 남자(밤의 가족)의 이야기가 잔잔하게 전개된다.

 

 

책 속의 등장인물들은 중심부에서 활약하는 그런 인물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주류가 아닌 주변부 인물들로 어떤 상실의 아픔마저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다.

 

 

말이 해외지사지, 미국이나 유럽 등의 선호 국가가 아닌 비선호 국가에서 일해야 했던 남자는 결혼조차 하지 못하고 중년의 나이에 피치못할 사정으로 회사에서 쫓겨나다시피 해서 나온 후 신주쿠의 러브호텔에서 야간 청소일을 한다.

또 노래를 부르고 싶어 대도시인 도쿄에 왔지만 정작 위축되어 노래를 부르지 못하던 여자는 뜻하지 않은 만남으로 용기와 자신감, 희망이 생긴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돌아갈 고향이 사라져버린 이의 사연도 안타까웠으나, 가부키초의 의외 장소에서 이들은 희망의 끈을 잡게 된다.

자신의 분야에서 열심히 노력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꿈을 이루지 못한 남자와 여자는 다른 분야에서 다시 희망을 꿈꾸려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나름의 사연을 가지고 출장 성매매 여성을 데려다주는 일을 하는 남자, 나름의 사연으로 성매매를 하는 여성, 그리고 그 밤 여자는 특별한 누군가를 성매매 장소에서 맞닥뜨리게 되지만, 시원하게 털어내려 노력한다. 

 

 

'막차'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늦은 시간까지 일하다 겨우 퇴근하는 지친 얼굴이 자연스레 생각난다.

'첫차'라는 단어에서도 이른 아침부터 출근하는 지친 얼굴이 생각나는 건 사실 마찬가지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니, 이런 구절이 나왔다.

막차는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들의 교통수단이라는 것...

하지만 이런 구절도 나온다.

오전 5시, 첫차가 다니는 지금부터가 밤에 일한 사람에게는 애프터 파이브라는 것...

 

 

어쩌면 모든 걸 가지고 화려하게 빛나는 그런 인물들이 아니기에, 오전부터 저녁까지 일하고 밤에는 잠을 자는 평범한 생활을 하는 인물들이 아니기에, 이들의 첫차 이후의 희망을 그리고 생각하는 그 시간이 더 따뜻하고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8월의 마지막 금요일 밤, 이들은 화려한 불빛들이 가득한 신주쿠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간다.

그렇게 맞이한 토요일 아침, 이들의 새로운 시작이 펼쳐진다.

물론 이들의 삶은 앞으로도 여전히 고단하고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본 따뜻한 희망의 불꽃은 이들의 가슴 속에 남아 조그마한 빛을 내 줄 것이다.

그렇게 희망의 첫차, 첫차의 애프터 파이브는 계속되리라.

 

- p. 55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피곤에 지친 얼굴이었지만, 그 물결에 역행하는 두 사람은 활기가 넘쳐났다.

시각은 오전 5시, 밤에 일한 사람에게는 지금부터가 애프터 파이브인 것이다.

 

 

- p. 102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모두 막차로 돌아갈 시간이야."

"막차를 타러 서둘러 가는 사람들을 볼 때가 제일 외로워."

막차는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을 위한 교통수단인 것이다.

 

 

- p. 260

1구, 1구, 그냥 곧 날아올 공만 바라보는 게 좋았어.

헛스윙해도 아무 문제 없잖아. 다시 바로 다음 공이 날아오니까.

앞의 공에서 헛스윙을 했어도 다음 공을 칠 때는 전혀 상관없어.

헛스윙을 몇 번을 해도 또다시 새 공이 나와. 실패가 꼬리를 끌지 않지. 그냥 다음에 날아올 공을 칠 생각만 하면 돼.

이런 건 인생에서는 거의 없잖아. 배팅센터 정도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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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바침 - 결코 소멸되지 않을 자명한 사물에 바치는 헌사
부르크하르트 슈피넨 지음, 리네 호벤 그림, 김인순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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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바침

- 결코 소멸되지 않을 자명한 사물에 바치는 헌사

 

책을 참 좋아한다. 어린 시절에는 이 책 저 책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골라서 읽고 느끼고 생각하는 그 과정들이 다 좋았다.

 

이 책 <책에 바침>은 정말 책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저자가 '책에 바치는 헌사'이다.

 

아직 자동차가 사용되지 않았을 시절, 말을 이용해 온갖 운송과 생활을 했던 그 때, 자동차가 혜성같이 등장했지만 사람들은 자동차가 말을 몰아내고 그 모든 것을 변화시킬 것이라 믿지 않았다.

그리고 책, 기계로 움직이는 자동차가 압도적으로 우리 생활에 이용되는 지금 현대의 또 다른 대단한 발명품으로 '전자책'이 생겨났다.

자동차가 말이 하던 모든 일들에 사용되는 것처럼, 전자책이 종이책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그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을까?

 

그래서, 저자는 이 종이책이 자신의 곁을 떠나게 되면, 그래서 자신이 잃어버리게 될 것들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 p. 21, 서문 중

그래서 책이 언젠가 내 곁을 떠나게 되면, 내가 잃어버리게 될 것들을 이 책에서 한번 열거해보려 한다. 물론 모든 것을 완벽하게 열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책을 옹호하는' 새로운 논거를 발굴해낼 생각도 없다. 그보다는 기이하게도 우리 모두가 아주 당연시 여기는 책을 둘러싼 문화 현상 전반에 주목하려 한다. 너무나도 친숙한 나머지 책이 없어진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될 그 모든 것에.

 

사실 <책에 바침>이라는 제목만 보고는, 유명한 고전이나 책들을 이야기해주는 책이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 <책에 바침>은 진짜 '책'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가 책이라고 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저자' 외에도, 한 권의 책을 만드는 데에는 많은 텍스트가 필요하고 편집과 인쇄, 제본의 작업까지 필요하다.

 

- p. 25

이제 완성된 작품으로서 수백만 권의 책은, 세상의 모든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들이 확고한 형태, 즉 처음과 중간과 끝을 가진다는 확신을 더욱 고양시킨다.

가령 인간의 삶이 그렇듯이.

 

이 책 <책에 바침>은 의외로 재미있다. 작가는 말 그대로 책 그 자체를 여러 분야로 나누어서 이야기해준다.

가령, 새 책, 헌 책, 큰 책과 작은 책, 아름다운 책, 훼손된 책, 불완전한 책, 주석을 붙인 책 등으로 책 몸체에 대하여도 이야기하고,

좋아하는 책, 알맞은 책, 부적절한 책, 비싼 책과 싼 책, 선물 받은 책, 빌린 책, 분실된 책, 훔친 책, 금지된 책책의 사용에 대하여도 이야기를 해 준다.  

 

책의 여러 모습과 여러 쓰임새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경험도 빠뜨리지 않는다.

'발견된 책' 부분에서 작가는, 배회하는 애서가를 위한 마지막 남은 피난처 벼룩시장에서 살까 말까 망설였던 수천 권의 책과 결국 손에 넣은 수백 권의 책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작가는 벼룩시장에서의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수많은 책 중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식사도 제대로 못한 채 예민해져서 책을 고른다. 그렇게 몸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그로 인해서 세상에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책 몇 권의 주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 p. 71

내가 실제로 이 책들을 골랐을까? 아니면 혹시 이 책들이 나를 선택한 건 아닐까? 때로는 책들이 정말로 나를 선택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그 책들은 수십 년 동안 제자리를 마련하려고 계획해왔고, 그래서 그레펠트 피쉘른 또는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이 특별한 토요일 아침에 나의 길과 교차한 것이다.

이건 순전히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서로 얽힌 길을 가던 두 사람이 결국 만나서 평생 함께 지내는 것처럼 숙명 같은 건 아니었을까?

 

책이 나를 선택하다니, 이런 로맨틱한 문장이라니...

확실히 지금의 중고 서점처럼 깨끗하게 정리되고 검색 버튼 하나로 위치와 재고 사항까지 파악할 수 있는 그런 곳에서라면, 그 책과 나와의 만남이 이렇게 로맨틱하게 느껴지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그 곳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는 그 무언가를 찾아낸다면, 많은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아내는 느낌이려나...

문득 아주 오래전에 일본 여행에서 동네를 어슬렁거리다가 중고 가게에서 cd를 고르고 골랐던 일이 기억이 났다. 가게 앞의 박스 안에 cd가 한가득 들어 있었고, 매장 안에도 가득했다. 일본어를 어설프게 아는 나는 내가 좋아하는 '나카시마 미카' cd를 찾느라 박스를 뒤지고, 매장의 선반을 눈이 뚫어져라 탐색하고 탐색해서 결국 2~3개를 샀었다.

그 때의 그런 느낌이려나... 그 때 엄청 기분이 좋았었던 것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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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책에 바침>은 애서가들에게는 참으로 좋은 기분을 선사하는 책이 아닐까.

종이책은 전자책이나 다른 매체에 자신의 자리를 점점 내어주고 있지만, 여전히 종이책을 무한 애정하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전자책이 아무리 가볍고 편리하다 해도, 종이책의 손맛을 잊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너무도 많다. 나 역시도 전자책을 읽지만, 여전히 1순위는 종이책이다. 

 

종이책이 사라진다? 글쎄, 미래의 이야기는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너무나도 바란다. 두근두근거리며 종이를 넘기는 그 손맛, 책 주변에서 느껴지는 은근한 종이 냄새가 너무도 그리워질테니 말이다.

 

- p. 127

나는 개인적으로 조금은 다른 이유에서 초판본을 더 좋아한다. 한편으로는 당연하게도 책 수집가의 자부심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초판본에 인쇄된 페이지들을 응시할 때 우리는 작가가 인쇄소에서 갓 나온 책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응시했던 것과 같은 것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한 감동 이상의 것이다.

 

- p. 163

읽힌 책은 그것을 읽은 독자가 살아온 삶의 일부이다. 심지어는 아주 중요한 장의 특별한 한 단락이 삶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독자가 가장 머물러 있고 싶어 했던 부분, 가장 편안함을 느낀 부분이었다면 언제나 그렇다. 모든 텍스트는 언어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이와 동시에 독자에게는 그 세계를 여행한 기록이다. 그러므로 이따금씩 그 여행을 회상하기 위해서라도 읽힌 책은 여행 기록처럼 보관될 필요가 있다. 여행기록들이 다 그렇듯이 기억을 생생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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