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디샤의 여섯 번째 선물 - 지혜와 용기를 키워주는 터키 환상 동화 마음이 자라는 나무 7
아흐멧 위밋 지음, 이난아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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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제목 : 파디샤의 여섯 번째 선물
저자 : 아흐멧 위밋
출판사 : 푸른숲

아흐멧 위밋은 터키에서 추리 소설로 인기 있는 작가다. 추리소설 작가가 전래동화 같은 이야기를 꾸민 까닭은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사라지는 것이 가슴 아파서라고 한다. 아마 터키도 우리처럼 예전엔 부모님이나 할머니, 할아버지께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던 것 같다. 지금은 TV나 컴퓨터가 옛이야기를 대신하고 있는 것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파디샤는 이슬람교의 군주를 뜻한다. 젊은 파디샤는 불쌍한 백성에게 자애로운 왕이었다. 그런 왕에게 한 가지 약점이라면 선행을 자랑한다는 것이다. 왕의 자랑에 모든 신하들이 부화뇌동하여 아첨을 하였다. 이를 보다 못한 총리대신이 왕의 버릇을 고치고자 한 가지 제안을 한다. 파디샤는 총리대신의 제안을 따르기로 한다. 두 사람은 기나긴 여정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책을 고를 땐 터기의 이색적인 분위가 풍기길 기대 했었다. 생각보단 특별하지 않았다. 아라비안나이트의 일부을 읽는 기분이었다. 파디샤가 평생 간직하게 된 다섯 가지 이야기는 인생을 관리하는데 지침이 될 만한 중요한 이야기들로 꾸며 졌다. 천일야화의 천 가지 이야기 중 핵심적인 것만 모았다고 보면 될 것 같다.

"파디샤도, 가난한 사람도 모두 인간이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를 수 있소 이것은 어쩌할 수 없는 불변의 진리지. 자네들이 경험한 것들은 아주 좋은 실례라 할 수 있다오.

예를 들면 자네는 탐욕 때문에 눈이 멀었고, 대장장이는 나눌 줄을 몰라서 중요한 기회를 놓쳤지. 또 보석 상인은 흥청망청 쓴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중이고, 뮤에진은 인내심이 없어서 사랑하는 여자를 잃지 않았소?

모자 장수는 또 어떤가? 질투심 때문에 아내와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소. 자네들은 인가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오류들의 생생한 증거들일세. 모두 내 곁에 머물면서 바른 길을 제시해 주길 바라오."

사실, 다섯가지 이야기 속에는 어리석음만 있다. 마지막 여섯 번 파디샤에게 와서야 비로써 삶의 지혜를 보여준다. 파디샤가 다섯 가지이야기를 잊지 않기 위해 이야기 속 주인공들을 평생 자문관으로 모시기로 한 것이다.

세상에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교훈을 주는 좋은 이야기는 많고도 많다.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해서 지혜롭지 못한 것이 아니다. 이야기를 듣고도 자기 것으로 받아드리지 못 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많은 이야기중 이 다섯 가지 이야기를 고른 까닭은 파디샤가  평생 마음에 새겨 풍요롭고 아름다운 나라를 만든 것처럼, 청소년들이 후회 없이 건실한 삶을 가꾸어 나가리 바라는 뜻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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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생태보고서 - 2판
최규석 글 그림 / 거북이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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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제목 : 습지생태보고서
작성자 : 최규석
출판사 : 거북이 북스

작가 최규석은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통해 나에게 만화라는 것을 새롭게 인식시켰다. 감히, 상상하지 못한 형태의 그림으로 상처 난 양심을 드러냈고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했던 작품이다. 반면, ‘습지생태보서’는 가난한 젊은이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모순에 초점을 맞춘다.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는 사회구조적 문제를 해부하여, 독자에게 계층 간 문제에 대해 고민 할 것을  요구한다.  ‘습지생태보서’는 우리가 순간순간 놓치는 사소한 일상의 부조리를 잡아서 보여주고 있다.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서 작가가 악을 악을 쓰는 절규하였다면 ‘습지생태보서’에서는  한 차례 호흡을 고른 뒤 자신에 대한 인간적인 면을 드러내고 있다.

습지는 눅눅하고 칙칙한 곳이다. 그러나 무한한 원초적 가능성을 지닌 생태계의 보고이다. 최규석의 탄생은 그 곳이었기에 가능했다.

미래가 불투명한 만화과 학생 넷이 칙칙한 반 지하 단칸방에 기거한다. 그 곳에서 묻어나는 자칭 궁상의 얼룩들은 나에겐 낯설지 않은 추억인 동시에 현재 생활의 일부이기도 했다.

정답

‘친해질까 봐... 그 슬픔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전해질까봐 무서웠어.’
‘나도 내 꿈만 바라보며 달리기에도 벅찬데 왜 다들 나에게만 나타나는 걸까?’

‘너무 괴로워하지마’ ‘지금은 그냥 네 꿈을 향해 달리는 수밖에 없어...,

‘그렇지?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때까지는 그냥 달려야겠지?’

‘그게 아니라... 성공하고 나면 다른 사람의 고통 따위는 보이지 않게 될 거라고...,’


뛰어 오른 적 없어!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라고 가르치는 아들에게 포도를 못 먹게 되자 시고 맛이 없을 거라고  하는 여우의 이솝이야기를 읽어 주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현장체험학습(2)

‘이 두 잔의 영혼이 서로 공명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 .’
‘하지만 서로 다른 외형에 오랫동안 다른 색의 음료를 담고 있어서 둘은 그걸 몰라’
‘깨 버리면 되겠다!’

‘다른 시기에 다른 모습으로 만났다면 영혼의 짝이 되었을 사람들이 원수처럼 지내기도 하죠. 하지만 지금의 모습도 그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중요한 틀일 거예요. 아름답지 못하더라도...’

가난의 효용

성실 3년 장학생은 검소하기에 주머니가 항상 넉넉하다. 그래서 배고픈 후배에게  밥을 사는 호기를 부리기도 한다.
 
‘그...근데 왜 그렇게 자주 끼니 걸러?’

‘여친이 하도 차 사라고 성화라서 중고라도 한 대 사려고...,’
‘다음에 드라이브 시켜 드릴게요.’

팔이 잘려 본 사람은 손가락 잘린 사람을 위로하지 못한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지붕이 날아갈까, 걱정한다는 친구 앞에서 6개월 동안 간장만 비벼 먹었다든가, 평생 두 칸짜리 전세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은 사치가 되 버린다. 그런 습지를 한 발만 걸어 나오면 ‘기름 값 안 주는 걸 보니 집안이 어려워 진거 같다’고 걱정하는 친구를 만나게 된다.

주인공 최군은 성실히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가난 속에서 꿈을 키우기 위해 가난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학과 경제관을 갖고 있다. 그래야만이 습지를 탈출 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습지에 남게 될까 두렵지만 생태적으로 습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최군. 슬픔이 나에게 전해질까, 어려운 이의 고통을 애써 외면하지만, 배부른 자의 고민도 위로해 주고 싶지 않다. 그런데 뭔가가 양심에 걸린다.

사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이런 일에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친척이나 친구는 어려움은 해결 할 수 없어도 일정부분 같이 가야 하는 것으로 받아 드리게 되었다. 배부른 자의 슬픔 역시, 그에게는 가난한 자의 끼니 걱정만큼 자신에겐 심각한 일이다. 충분히 위로해 줄 만하다. 어차피 누구든 서로 보고 느낄 수 있는 게 한정되어 있다. 습지의 슬픔 역시 부자들의 고민을 이해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가난의 미학을 이야기하는 것도 우습다. 왜? 부를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 되고 만다. 부를 버리고 습지로 찾아와 가난을 예찬하는 것은 가져 봤던 자의 여유이다. 부를 가져보지 못한 자는 부를 비판하거나 안분자족 할 수밖에 없다.
 
세상 속에서 우수운 꼴로 살아가지 않으려면 일단 부를 가져 봐야한다. 그래야 버리든, 기부하든, 지키든 할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양심의 가책 없이 깨끗한 돈을 손에 쥐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내가 친구에게 할 수 있는 위로는 당연히 내 습지 생활에 방해를 받지 않는 선에서라는 전제가 있다.

자신의 생각들을 여과 없이 솔직히 드러낸 작가의 젊은 순수성을 발견하는 순간, 더 이상 사소한 일이라 여기고 고민하지 않는 나. 조금은 뻔뻔스러워진 나를 발견하게 된다.

한편, 이제는 습지를 벗어난, 아니 습지로 다시 향한 작가. 그래서 다음 작품을 통해 습지를 벗어나지 못했거나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과의 어울림을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최규석의 만화은 대사처리가 짧다. 그런데도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인물들의 표정에서 모든 걸 찾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 우정, 질투, 순수, 부와 가난, 그의 고뇌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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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10-30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도 리뷰도 재밌습니다. 땡스투 눌렀어요.^^

수양버들 2005-10-30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저는 매번 책 살때 땡스투 누루는 걸 잊어 먹어요.
다음엔 꼭 저도 해야 겠어요. 다른 분들도 기분 좋으라고....., **
 
다니
김용규.김성규 지음 / 지안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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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Genocide)란 그리스어 genos(인종)와 라딘어 cide(살해)를 합해 만든 말로 종족 내에서 벌어지는 집단학살을 의미한다. 제노사이드는 각 희생자가 살해를 유발하는 행동을 했든 안 했든 간에, 단지 어느 집단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살해되는 게 특징이다.

이런 현상은 인간의 범죄, 전쟁 등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제노사이드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숨져가고 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벌어졌던 유대인 대학살, 일본인들의 잔혹행위, 코소보 사태, 중국의 문화혁명, 이라크 전, 6.25에서 광주사태까지 수많은 대량학살 뒤에 숨어 있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광기이다. 어떤 일련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노약자를 포함한 수많은 목숨을 앗아갈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스스로 제어되지 않고 판단하지 못하는 개인의 이성을 마비시킨 상태가 제노사이드를 만들어낸다. 집단이 아니 개인의 정의가 살아 있다면 제노사이드의 비극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제니퍼는 야생 침팬지에게 수화를 가르치는 연구 프로젝트를 맡아 탄자니아로 떠난다. 그녀는 중국계 미국인이다. 중국 대학 교수였던 친부모는 문화혁명 때 탄압받다 죽고 입양되었다. 그런 그녀에게 자신이 가족처럼 사랑하는 침팬지 집단을 희생으로 삼는 제노사이드 공포가 서서히 다가온다.
 
제노사이드는 동물 세계에선 보기 드문 일이다. 벌목으로 인해 생활터전을 위협 받은 수적으로 우세한  튀틀덤 집단이,  제니퍼가 수화를 가르친 튀틀디 집단을 위헙하고 있는 것이다. 침팬지의 제노사이드는  새끼들까지 포함한 모든 수컷들은 몰살을 의미한다. 암컷들에겐 목숨을 유지하는 대신 성적학대와 집단의 최하위 계급으로 전락을 의미한다.

제니퍼가 다니에게 특별한 애정을 갖는 것은 다니가 인간과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감정의 교류가 가능한 감성을 지녔다는데 있다. 그 만큼 그들의 정은 깊었다. 제니퍼는 갈등한다. 튀틀디 집단을 구하지 못하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다. 악이 아닌 튀틀덤 집단을 적으로 규정해야 하는 현실과 자신 조차 안전할 수 없다는 것에 두려워 했다.  이런 상황을 만든 권력자에게 분노하지만 그녀는 나약하다.

제노사이드는 또 다른 진화를 의미하며 인간이 개입하지 않으면, 자연은 종의 계체 수를 조절한다는 논리에 잠시, 자신의 나약함을 위로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화혁명 당시 광기 어린 홍위병 앞에서 폭력의 부당성을 부르짖다 축출당한 어머니의 망령이 그녀 속에 살아 움직인다.

제니퍼는 다니와 그의 가족을 구출하기 위해 순수한 열정으로 숲을 향한다. 그러나 그녀는 소크라테스가 죽고 세네카가 죽었듯 그렇게 권력 앞에 죽어갔다. 철학자가 죽은 뒤에도 세상은 권력자가 차지였던 것처럼, 튀틀덤 집단에 의해 다니의 가족 역시 하나 둘 처참하게 사라졌다. 다니는 공포에 떨며 이미 죽어버린 제니퍼를 찾으며 울부짖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세네카의 초연한 죽음을 기억하면서 정의로움을 생각하는 것처럼, 제니퍼의 죽음은 광기어린 폭력에 맞선 휴머니즘을 생각하게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한 일은 노트와 펜을 준비하는 거였다. 신행동주의, 인류학계보, 네클로필리아, 사회생물학, 사회생태주의, 심층생태주의, 코소보사태 발발과 진행과정, 르완다 내전 따위 평소에 궁금했던, 혹은 생각지도 못했던 수 많은 내용들을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한 일은 중국, 아프리카, 중동, 미국 등 동서양을 오가는 다양한 소재를 다룬 두 작가의 역량에 놀라고 감동하는 일이였다. 다소 복잡해 보이는 지식을 전하면서도 소설적 매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었다. 지적인 충만감 속에  주인공과 함께 사랑하고 분노했다. 그리고 마침내 참았던 눈물을 에필로그를 읽으며 쏟아내고 말았다.

책을 덮고 미처 찌릿한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전이였다. 9시 뉴스에서, 한 고등학교 교실에서 벌어진 일이, 동영상에 올라 보도되고 있었다. 같은 반 아이들이 둘러싸인 가운데 외소한 남학생이 덩치 큰 학생에게 일방적으로 맞고 있었다. 그런데 누구하나 말리는 사람 없이 야유를 보내며, 그 상황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 동영상을 올린 의도도 고발성이 아니라 재미라고 한다. 

우리 아이들을 저곳에 맡겨야 하다니, 순간 부르르 몸서리 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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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일 내인생의책 책가방 문고 3
펄 벅 지음, 강유하 옮김, 류충렬 그림 / 내인생의책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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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문호 펄 벅은 나를 실망 시키지 않았다. 짧은 글이지만 깊이 있고 안정감 있는 동화다. 아이들이 죽음과 삶을 관조하는 철학적 사유를 어떻게 받아드릴지  몹시 궁금하다.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 해도 가볍게 넘어갈 수는 없을 거다.

키노네 집은 산비탈 층층대를 이룬 논밭을 일구며 산다. 지야네는 그 아래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며 산다. 둘은 친구다. 그들은 평화로웠다.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는 일상을 즐거워했다. 적어도 그 일이 있기 전엔 그랬다.

그날, 키노는 아버지가 순무를 심는 것을 돕고 있었다. 땅거미가 졌을 때 하늘은 붉게 물들었고 농장의 땅까지 흔들렸다. 화산이 다시 폭발한 것이다. 바다 빛깔은 붉은 회색을 띠어 아름다웠지만, 키노는 그걸 보고 도리어 두려움을 느꼈다.

영주의 성에 깃발이 올랐다. 마을 사람들에게 대비하라는 표시이다. 성벽안의 대피소로 피하라는 종소리가 언덕 아래로 퍼져나갔다. 키노는 지야를 향해 흰 오비를 흔들었다. 지야는 영주의 성이 아니 키노의 집으로 가족들을 뒤로 한 채 올라 왔다. 가족들은 배를 지키기 위해 남기로 한 것이다.

키노가 막 지야에게 반갑다고 할 때다. 갑자기 돌풍이 바다에서 일어났다. 애원하는 듯한 종소리가 다시 울렸다. 해일이 으르렁거리고 포효하는 소리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마침내 마을을 덮쳤다. 거대한 정적 속에 모든 것이 가라앉았다.

“지야는 다시는 행복해질 수 없을 거예요.”

“아냐, 언젠가는 다시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거다. 왜냐하면 삶은 언제나 죽음보다 강하거든. 그렇지만 처음에는 다시는 행복해질 수 없다고 여기겠지. 아마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야 될 거다. 눈물은 우리 몸의 나쁜 감정을 씻어낸단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이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인생이 얼마나 멋진지 알게 될 거야. 잊지마, 폭풍이 온 다음날의 하루는 폭풍 전의 모든 날들보다 더 소중하다는 거.”

“언젠가 너는 네가 왜 죽음을 무서워했는지 궁금해 할 거야. 오늘, 왜 네가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했는지를 궁금해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야는 아직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게 누워만 있던 지야에게 어느 날 영주가 찾아온다. 고아가 된 지야를 아들로 삼고자 보러 온 거다. 키노의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다. 아버지는 지야에게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살 것인지, 영주아들로 살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게 했다. 영주를 만난 지야가 묻는다.

“왜 어르신은 그들을(해일에서 목숨을 구한 다른 사람들) 이 큰 집으로 초대해, 아드님과 따님으로 삼지 않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나는 그들을 내 아들과 딸로 삼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

“너는 밝고, 잘생겼어. 사람들이 네가 이 마을에서 가장 똑똑한 소년이라고 하더구나.”

“저는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게 없어요. 제 아버지는 어부일 뿐입니다.”

왜, 지야는 영주의 아들이 되지 않은 걸까, 폭풍이 지난 뒤 지야의 인생은 달라졌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삶의 소중함으로 바뀐 것이다. 영주의 아들이 아닌, 어부의 아들로 가족의 죽음을 간직한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한다. 지야는 이제 두렵지 않다. 살아갈 준비가 되었고 삶을 사랑하게 되었다.
 
“지야 오빠가 왔어!”

그녀가 소리쳤다.

“지야 오빠! 지야 오빠!”

지야는 그녀의 귀여운 얼굴을 보자, 팔을 벌려 꼭 안았다. 처음으로 그는 가슴에 위안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위로는 생명 그 자체와 같은 세쯔(키노의 여동생)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지야는 청년이 되었다. 바닷가에 세워지는 집을 바라보고 서 있자, 지야는 엄습하는 희열을 느낀다. 집짓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며 꾸짖는 영주에게 그는 말한다.

“땅이 심하게 흔들리면, 어르신의 성도 허물어질 겁니다. 이 섬에 사는 우리에게 영원히 안전한 피난처는 없죠. 우리는 용감해요. 왜냐하면 우리는 반드시 용감해야 하거든요.”

지야가 사는 섬 뿐만 아니라 지구 어느 곳에도 안전한 피난처는 없다. 우리도 위험이 도사리는 도시를 살지만 피난처에서 웅크리고 살기 보다는 아침마다 버스를 타고 다리를 건넌다. 저녁이면 긴 터널을 건너기 위해 지하철에 몸을 맡긴다. 다가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안락만 추구한다면 오늘의 나를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그 것은 지야가 폭풍을 겪기 전과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죽음을 일반화 시키지 못한 상태다. 죽음은 타인의 것이다. 오늘을 사는 이유가 치열하지 못함이 거기에 있다. 삶을 즐기기 못하는 것도 거기에 있다.

지야에게 삶의 모든 것이 아름다운 까닭은 가족의 죽음이 함께 하고 있으며, 죽음이 항상 목전을 오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해일이  휩쓸고 지나간 바로 그곳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지야, 역시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이 함께 살던 곳에 집을 짓고 세쯔와 새살림을 꾸린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와 형처럼 배를 지키다 죽진 않을 거다.

“해일이 다시 오더라도 괜찮아요. 저는 대비를 하고 있어요. 저는 그것과 맞설 것입니다. 저는 두렵지 않아요.”
   
펄벅은 대문호답게 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짧은 글이지만 그 곳엔 삶과 죽음이 공존했다. 오래전 그녀의 사유(思惟)가 오늘의 내게 전해지는 고전의 풍미(風味)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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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슨 선생님 구하기 내인생의책 책가방 문고 6
앤드루 클레먼츠 지음, 김지윤 그림, 강유하 옮김 / 내인생의책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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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제목 : 랄슨 선생님 구하기
저    자 : 앤드루 클레멘츠
출 판 사 : 내인생의 책


‘랄슨 선생님 구하기’는 ‘프린들 주세요’로 유명한 앤드루 클레멘츠의 글이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로 수년 간 근무한 경력이 있다. 그래서 인지 ‘프린들’에 이어 ‘랄슨 선생님 구하기’ 역시 학교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프린들 주세요.’가 언어의 생성이라는 소재로 사제간의 따뜻한 정을 다루었다며, ‘랄슨 선생님 구하기’ 언론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하면서, 신문을 매개로 사제간의 정을 싹틔운다.

두 작품은 그 소재가 신선하고 교육적이다. 전개방식이 빠르고 긴장감을 주어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그런데 이 두 권의 책을 다 읽은 나는 왠지 떨떠름하다. 좀더 과격한 표현을 쓰고 싶지만 나의 서평이 혼자 보는 것이 아니기에 좀 완곡한 표현을 쓰기로 했다. 언론은 진실을 담아야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나쁜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신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투명인간과도 같았던 전학 온 학생 카라 랜드리는 어느 날 칼럼을 써 교실 게시판에 붙인다.


        공정한 질문 하나

랄슨 선생님의 반에서는 올해도 가르침은 없었다. 학습은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가르침은 없었다. 교실에 선생님은 계셨지만, 선생님은 가르치지 않았다.
  ‘학부모님의 밤’에서 나온 자료를 보면 랄슨 선생님은 자신의 교수법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학생들은 자신에게서 배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학생들은 또한 서로에게  배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 반의 선생님은 랄슨 선생님인가? 학생인가?

 그래서 여기 질문이 있다. 만약 학생들이 학생을 가르친다면 그들은 서로에게 선생님일 것이다. 그렇다면 랄슨 선생님은 왜 가르치는 선생님에게 지급되는 봉급을 타 가는 걸까?
  칼튼 기념 도서관의 공식기록을 보면 랄슨 선생님은 지난해 39.324달러를 받아 갔다. 그 돈이 랄슨 선생님의 반 교실의 진짜 선생님에게 지급되어야 한다면, 학생들 각자는 매일 4,69달러를 받아야 한다.
  나는 여러분이 이 생각에 동의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여러분의 생각은 학교 측에 전하는 내 의사에 큰 힘이 될 것이다.
  뉴스 데스크에서 나온 이번 주 생각이다.    

                                       편집장, 카라 랜드리

언제나 떠들썩하던 교실이 싸늘해 졌다.
주인공 카라는 자신의 글로 인해 누군가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극적인 독설을 거두어 드린다. 진실과 함께 자비를 담아 글을 쓰기로 한 것이다.  랄슨 선생님은 자신이 유죄임을 인정하고 아이들이 신문 만드는 일을 돕는다.

“기사는 한정된 지면만을 가질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단어들이 제 힘을 발휘될 수 있도록 선택해야 한다.” 

“기자들이 선택하는 단어들은 긍정적, 부정적, 혹은 중립적으로 나눌 수 있다. 기사가 뭔가를 생산 했다 ! 그럴 때는 긍정적인 기사라고 한다. 뭔가를 찢어발겼다! 그걸 부정적인 풍자라고 한다. 만약 기자가 그냥 탐색만 할 때는 그 기사거리는 주위에서 구경만 할 때는 말이다. 그걸 우리는 중립적인 표현이라고 한다.”        

작가는 ‘프린들 주세요’에서 단어의 탄생과 소멸을 말했고  ‘랄슨 선생님 구기’에서는 단어들을 확장시켜 분류하고 올바른 쓰임에 대해 알려준다.

우리 아이들은 학교나 가정에서 표현의 자유를 암묵적으로 억압받고 있다. 그러니 자신들의 생각을 펼쳐 보이는데 성공한 책 속 주인공과 친구들이 부럽기만 하다. 우리 아이들도 그들처럼 자신들의 생각들을 표현할 수 있는 공식적인 창구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내가 떨떠름했던 까닭은 클레멘츠의 두 책을 다 읽었다는 데에 있다. 두 작품 모두 너무나 좋은 소재와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사건 전개방식이 너무 똑같아 실망스러웠다. 우리 아이들이 상기된 상태로 빠른 속도로 사건을 몰고 가다가 절정을 맞이하는 허리우드식 싸구려 감성에 빠져들까 우려스럽다. 이렇게 쓰게 되면 부정적 표현이다. 나의 주관적 의사에 따라 부정적 단어 선택을 여과 없이 진행한 샘이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두 번 읽기를 싫어하고 뒤 이야기가 짐작되는 추리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나의 개인적인 취향이다. 이런 내 취향에 따라 트집 잡기는 반칙이다. 아이들은 같은 만화를 열 번 이상 읽기도 하고 어른들 중엔 추리소설만 읽는다던지, 내용이 비슷비슷한 무협지만 읽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객관성을 갖지 못한 가혹한 지적이다. 좋은 마음을 가졌다 할 수 없다.

이 책은 언론이 지녀야 할 태도를 알려주고 있다. 권력으로부터 언론은 자유로워야 한다. 많은 사람이 보는 신문기사 글은 객관적 시각을 요구 한다. 언론은 진실을 말해야 하지만, 그것이 주위를 끌기 위한 독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언론은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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