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 - 건설·거주·재건축의 40년 케이 모던 2
이인규 지음 / 마티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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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작 <마이너 필링스>는 마티 출판사의 ’앳(at)’ 시리즈의 첫 권이다. ‘앳(at)’ 시리즈, ‘온(on)’ 시리즈에 이어 ‘케이 모던(k-modern)’이 새롭게 출범했다. 마티 출판사 홈페이지에 소개된 시리즈 설명은 다음과 같다.

한국이 만든 ‘현대성’을 묻다

마티가 『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와 함께 ‘케이 모던’ 시리즈를 시작한다. ‘케이 모던’ 시리즈는 한국이 만든 현대성(modernity)에 주목한다. 현대는 주어진 조건으로, 또는 서구나 일본이 한국에 미친 영향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왔으나 이런 시선으로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 사태가 많다. 예를 들어 고층아파트의 기원은 분명 서구에 있지만, 한국의 아파트는 1960년대 이후 한국만의 정치-경제적 상황이 누적되어 빚어진 대단히 독특한 사태이다. 이제 우리가 서구와 일본에서 무엇을 참조했는지 묻는 데에서 나아가 그것을 바탕으로 무엇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이것들이 어떤 한국인을 만들었는지 묻고자 한다.

‘케이 모던’ 첫 번째 책 『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는 시리즈 번호 2번이다. 1번은 박철수 선생의 『마포주공아파트: 단지 신화의 시작』을 위해 남겨두었다.

한마디로 건축을 통해 한국이 만든 현대성을 탐구하는 시리즈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예고된 출간 목록을 보면 아파트를 중심으로 특수한 건축적 현대성을 구현한 한국사회를 논의하려는 시도인 것 같다. ‘아파트 한국사회’의 현대성 탐구랄까. 아파트 책은 꽤 많이 축적되어 있는 편이다. ’프랑스 지리학자가 본 한국의 아파트‘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발레리 줄레조의 <아파트 공화국>, 시각디자인 연구자이자 아파트 담론을 정력적으로 이끌었던 박해천의 ’콘크리트 유토피아 3부작‘(<콘크리트 유토피아>, <아수라장의 모더니티>, <아파트 게임>), 전상인의 <아파트에 미치다>, 건축학자 박인석의 <아파트 한국사회: 단지공화국에 갇힌 도시와 일상>, 얼마 전에 작고하신 고 박철수 교수님의 <아파트>와 <한국 주택 유전자>, 브랜드 아파트의 현장 연구를 진행한 문화인류학, 도시인류학 저술인 <가치 있는 아파트 만들기> 등 한국의 아파트는 국내외 연구자들에게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을 제공해왔다.

그동안 발전국가 시기 근대화의 부정적인 산물로서, 자산 증식의 수단으로 투기의 대상(’사는 곳‘이 아닌 ’사는 것‘이 된)이 된 부동산 상품으로서, 획일화되고 집단주의적 심성을 주조하는 건축 양식으로서 아파트에 대한 부정적인 논의가 지배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케이 모던‘ 시리즈는 그동안 축적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건축이 만든 한국의 현대성‘을 새롭게, 두텁게 이야기해보려는 도전이 아닐까 싶었다. ’디지털 네이티브‘처럼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아파트 네이티브’, ’아파트 키드‘가 특수가 아닌 보편적 주체가 된 시대 상황에서 오늘날 도시와 건축, 주거와 라이프스타일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한국의 건축적 현대성을 역사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노력. ’케이 모던‘ 시리즈는 1번 단지 신화의 시작을 알린 마포주공아파트이 아닌 2번 박철수 선생의 제자이자 ’아파트 키드‘로서 젊은 세대의 새로운 아파트 연구를 보여주는 이인규의 <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로 첫 선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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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둔촌주공아파트‘로 이인규 저자를 처음 알게 되었다. 아직 책을 읽어보지 못했으나 어느 글에서 이 아카이빙 프로젝트의 존재를 접해 굉장히 흥미로운 작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둔촌주공아파트 재개발 소식을 모르고 있던 터라 그의 작업이 어린 시절 추억을 보관하기 위한 실천이겠거니 짐작했을 뿐이었다. <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는 ’아파트의 생애사‘를 기록하는 독특한 형식의 글쓰기를 표방하고 있었다. ’건설, 거주, 재건축의 40년‘은 둔촌주공아파트가 살아낸 생로병사의 시간인 셈이다. 식민지 근대와 발전국가 시기 압축적 근대화를 겪으며 한국사회는 시간의 더깨가 쌓인 역사성의 흔적을 파괴적으로 지우고, 그 위에 근대국가를 전투적으로 건설해 왔다. 한 세기 전만 해도 식민지의 시간을 살았던 한국사회에 역사적 기억을 다음 세대로 전수해줄 만한 ’기억의 장소‘, ’기억의 공간‘은 그리 많이 보존돼 있지 않다. 자본이 빠르게 움직이고, 재개발과 건설이 활발히 이뤄지는 서울에서 40년씩 오랜 수명을 살다 간 건축물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오랜만에 어느 동네를 방문했을 때 단골집이 사라졌음을 확인하고 헛헛함과 상실감을 느낀 적이 한 번씩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둔촌주공아파트는 호상을 치렀다고 할 수 있으려나. 아마 그렇게 얘기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둔촌주공아파트 재개발을 둘러싼 갈등의 내력이 그리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다.


둔촌주공아파트의 생애를 통해 단순히 ‘어떻게 하면 재건축사업에서 둔촌주공 사태의 재발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인가?’에서 질문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왜 이렇게까지 거대한 문제가 만들어진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원인과 문제가 일어난 과정을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랐다.

서문

이인규는 대단지의 생애사를 기록함으로써 앞으로 반복될 재개발 잔혹사의 오답 노트를 제공하고자 한다. 역사 쓰기를 통해 현실에 개입하기.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기억/상상력의 자원을 제공함으로써 다가올 미래를 현재에 기입하기. 이곳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곳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냈는지, 이곳이 어떻게 사라져갔는지 탄생부터 죽음까지 한 편의 전기(autobiography)를 작성한다. 단독 주택이라면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 건물을 지은 건설사, 건물에서 산 주민 정도의 이야기를 담으면 될 텐데 둔촌주공아파트는 훨씬 복잡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놓여 있다. 그래서 저자는 “둔촌주공아파트의 생애를 살펴본다는 것은 콘크리트로 지어진 아파트 건물과 그 주변에 조성된 단지 환경을 넘어, 아파트 단지의 생애에 관여하는 여러 주체에 관한 관심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일이었다. 둔촌주공을 기획한 정책 결정자들, 설계하고 시공한 건축업 종사자들, 그리고 당시 아파트에 들어와 살았던 입주민들, 그리고 재건축 과정에 관여한 조합, 시공사 등까지. 그들의 생각과 활동, 상호작용과 그 결과로 나타난 변화를 두루 살펴보려고 노력했다”고 밝히고 있다.

둔촌주공아파트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해하려면 발전국가 시기의 개발연대와 정림건축의 두 행위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대에 정권에 친화적인 중산층을 육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주공아파트 건설은 이면에 “늘어나는 중산층의 내 집 마련 수요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체제 순응적이고 정권 친화적인 집단을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총과 칼의 무력을 통한 폭압적인 철권 통치의 한계가 명확했기에 시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체제순응적인 시민 집단을 형성하고자 아파트를 대대적으로 건설하여 공급한다. 강남 개발로 서울이 폭발적으로 팽창하던 시기였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유치를 앞두고 사회 안정을 시행한다는 명목 아래 정상 시민과 비시민을 구분하고, 부랑아나 노숙자 등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 찍힌 소외된 자들을 배제하고 몰아내는 데 앞장 섰다. 둔촌주공아파트의 경우, 군인, 공무원, 서울대 교수 등 정권에 친화적인 기득권 세력이 특혜를 받았고(‘반공 국민’ 만들기의 일환), 입주권을 따내기 위해 현금을 많이 지불해야 했기에 고임금 전문직이나 대출을 쉽게 받을 수 있는 계층이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건축신문’을 발행하는 ‘정림건축문화재단’의 정림건축이 본문에 등장해서 놀라웠고 반가웠다. 저자는 김중업, 김수근 등 스타 건축가에 집중돼 있는 기존 건축계의 한계를 지적하며 건축사의 빈 자리에 건축 집단의 퍼즐을 끼워맞추고자 한다. 분량이 좀 길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이라 그대로 인용해보려고 한다.

김정철의 바람대로 둔촌주공은 ‘후세에 의해 평가’된다. 건축학자나 평론가 들이 아니라 그곳에서 나고 자랐던 이들에 의해 아파트에 대한 다른 평가와 이해가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둔촌주공아파트에 살았던 이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각자 마음속에 품고 있던 동네에 대한 애정을 공유했다. 사람들은 둔촌주공아파트가 낮은 밀도로 지어져 쾌적하고 여유로운 공간을 누릴 수 있었고, 섬세하게 설계된 단지의 여러 요소 덕분에 장소에 대한 좋은 감각과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계절마다, 구역마다 다른 모습이었던 수목들과 넓은 녹지, 놀이터와 휴게공간을 유연하게 연결하던 보행자 전용로 등 주민들이 사랑했던 공간들은 설계자들이 특별히 더 신경 써서 설계하고 실현한 것들이었다.

거주민들은 안락하고 살기 좋은 거주 환경을 만들고자 했던 이름 모를 설계자의 이상과 이를 실제로 구현하기 위한 노력을 읽어낼 수 있었다. 살기 좋은 집을 만들려는 마음이 정말로 살기 좋은 집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좋음을 사람들은 알아본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 더 좋은 거주 환경을 고민하는 마음이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69-70)

책 말미에 “둔촌은 강동이 아닙니다!” 파트는 재개발과 부동산, 자본과 정치의 모순이 집약적으로 녹아 있는 부분이었다. 대한주택공사의 과거 사훈대로, 김정철과 정림건축의 철학대로 살기 좋은 주택을 짓는 건축의 공공성 정신은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 아니 부동산을 중심으로 이익 집단이 헤쳐 모이고, 동일한 욕망을 공유하는 조직화된 집단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역학 속에서 공공적인 도시 정책이 어떻게 시행될 수 있을까. 이런 커다란 질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정작 마음속에 선명하게 각인된 이미지는 성인이 되기까지 자신을 키워낸 집-동네를 향한 애정으로 기록활동가에서 건축연구자가 된 저자의 궤적이었다. 집에서 동네로, 동네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국가로, 그리고 사적인 추억에서 공공적 기억으로, 사실에서 역사로 이동하며 집에 집을 지어 주었다. 성냥갑 같이 네모 낳고 단단한 책의 집을, 존재가 거주하는 언어의 집을. 여기서 누군가의 유년 시절의 노스탤지어를, 누군가는 아파트 공화국/한국사회의 역사적 단면을, 누군가는 재개발의 잔혹한 역사를 재현하지 않기 위한 지적 재료를 얻어갈 것이다. 한 생애는 이토록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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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상하고 평범한 부동산 가족
마민지 지음 / 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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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코인 광풍이 한바탕 몰아쳤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회귀물의 인기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의 정서에 기인한다고 말하면 너무 거칠고 불성실한 분석일까. 하지만 <재벌집 막내아들>은 진양철 역으로 분했던 이성민 배우의 열연 외에도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상상을 대리실현한 데서 오는 통쾌함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생각한다. 분당이 '천당 위의 분당'이 될 거란 사실을 알고 미리 땅을 사들이고, 주식의 등락 흐름을 미리 파악해 저점에서 사서 고점에서 판매하고... 평균적인 소득 수준의 임금노동자가 서울 집 한 채(아마 주거 형식의 코리안 스탠다드인 아파트를 기준으로 삼았을)를 구하려면 30년 동안 돈을 모아야 한다는 식의 기사를 가끔 발견하곤 한다. '일확천금''한탕주의'까진 아니더라도 <21세기 자본>의 저자인 세계적인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유명한 공식,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다'는 사실이 상식이 된 마당에 재태크를 하지 않으면 바보가 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인문잡지 <한편 5호 : 일>에 실린 배세진의 '동학개미, 어떻게 볼 것인가'에도 관련 일화가 소개된다. <21세기 자본>을 읽고 주식투자를 시작했다고, 사회과학적으로 보면 주식 투자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부모님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거나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 경우라면 이 말에 설득력이 더해진다. 여기에 대해 진보적인 입장에서 '제로섬 게임'에서 홀로 생존 경쟁을 부추기는 이 신자유주의 시스템을 바꾸는 게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괜찮은 식사와 살 만한 주거 환경 및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릴 수 있는 권리를 다수가 누릴 수 있도록 사회의 공공성을 살려내야 한다고 말한다. 메시지는 가슴 깊이 공감하지만 현실의 차가운 벽 앞에 인간에서 (동학)개미로 '변신Metamorphosis'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지 고민이 든다. 왜 한국은 부동산에 미친 나라가 된 걸까. 서울의 집은 왜 이리 비싼 걸까. 수저계급론이 시사하듯 어쩌다 계층 이동성이 경직되고 중산층이 해체되고 신분제 사회로 회귀한 것 같은 신계급사회가 도래한 걸까... 답답하고 막막한 현실, 바뀌지 않을 것 같은 견고한 현재를 비틀어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역사를 들여다 보기. 세계가 왜 지금 모습이 되었는지 파악하고, 실현되지 못한 미래를 불러올 수 있는 틈새를 찾아내기. EBS 국제다큐영화제 대상 수상작인 <버블 패밀리>의 감독 마민지의 첫 책 <나의 이상하고 평범한 부동산 가족>은 버블이 꺼지듯 호황 뒤에 불황이 덮치면서 초래된 가족의 불행을 역사의 렌즈를 통해 바라보며 자신의 '이상하고 평범한 부동산 가족'을 이해하는 과정을 담담히 풀어낸다.

IMF 외환위기(이하 IMF)는 몇 년 전부터 대중문화의 소재(영화 <국가부도의 날> 등)로 등장할 만큼 이제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말할 수 있는 역사가 된 것처럼 보인다. IMF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 IMF의 상징적 이미지는 두 종류로 구분된다. 긍정적인 이미지로 '금 모으기 운동'을 통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선진국으로 도약했던 '국뽕'의 이미지, 부정적인 이미지로 일자리를 잃고 길거리에서 배회하는 쓸쓸한 가장의 이미지, 서울역에 나앉은 노숙자의 이미지. IMF는 한국전쟁만큼이나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시스템을 뒤흔들고 재편한 결정적 사건으로 지목된다. 며칠 전에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가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는데 비정규직이 최초로 도입된 계기가 다름 아닌 IMF였다. 노동시장의 이원화(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학의 신자유주의적 변화, 소득 불평등 및 양극화의 점진적 심화 등 IMF를 기점으로 한국은 '헬조선'으로 가는 헬게이트가 열렸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파국적이고 엄청난 사건이었음에도 IMF에 대한 문화적 기억/재현은 여전히 빈약하다. 그런 의미에서 마민지의 작업은 'IMF 키즈'(IMF를 경험한 밀레니얼 세대 청년)로서 자신이 겪은 IMF가 무엇이었는지 증언하는 이야기로서 흥미롭고, IMF 재난/트라우마가 남긴 상흔을 치유하는 가족 드라마로서 감동적인 면모가 있다. 대학교 졸업작품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을 때, 그녀는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하겠다고 마음 먹고 "부모님을 인간 대 인간으로서 더 알아보고 싶다는 마음"(252)에서 인터뷰를 했다. 연을 끊다시피 하며 살았던 아빠가 왜 대낮에 종로를 거닐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고, 엄마는 하필 많고 많은 직업 중에 부동산을 파는 사람이 되었는지 궁금했다고(252). 여기서 자연스레 개인과 사회, 가족사와 역사가 겹치면서 질문은 확장된다. "중산층이었던 우리 가족은 왜 하루아침에 추락한 걸까? 부모님은 왜 부동산에 집착하는 걸까? 나는 왜 사춘기 시절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렸던 걸까? IMF 외환위기가 우리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 걸까? 마음속에서 무수히 생겨났다 없어지길 반복했던 질문들"에 답하기 위한 시도로서 저자는 영화를 찍고 글을 썼다. 그렇게 저자의 시선은 자신들과 같이 "IMF 외환위기를 극복했다는 신화 뒤에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어린 시절 갑자기 좁은 평수로 집을 이사 가야 했거나, 양육자가 정리해고로 직업을 잃었거나, 중소기업 사업체를 운영하다가 부도가 났거나, 양육자 중 특히 어머니가 실질적 가장이 되어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기 시작한, 어떤 형태로든 정상가족이 해체되는 경험을 하며 자신의 속사성을 가까운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끝없이 치솟는 아파트값을 보며 더 이상 내 집을 가지지 못할 거라고 체념해버린 이들을 만나고 싶었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조건들 위에 단단히 발을 딛고 서 있다가도, 그 땅이 언제든 다시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해본 사람들과 경험을 나누고 싶었다.

'내 땅'을 통해 바라본 것들, 252~253

나는 이 이야기를 IMF 외환위기를 겪어낸 또래의 관객들과 나누고 싶었다. 가세가 기울고 부모님의 언성이 높아지는 날들이 이어졌지만 친구들에게 차마 이런 속사정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혼자 마음속 깊은 곳에 짐을 진 채로 성인이 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흩어져 있는 서사를 각자의 방식대로 다시 채워나가고 있을 사람들과, 전기가 나간 방 한구석에서 두려움에 떨었던 순간에 대해, 등교하기 전 머리를 감기 위해 커다란 냄비에 물을 끓이며 지각할까봐 발을 동동 구르던 순간에 대해, 내가 살고 있는 초로한 집을 누군가에게 들킬까봐 불안해하며 죄지은 사람처럼 골목길을 돌고 돌아 집에 가던 순간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다.

영화 <버블 패밀리>의 완성, 228~229쪽

중산층도 아닌 중상류층으로 풍족한 생활을 누리다 한순간에 경제적으로 추락한 상황을 가족 구성원 중 누구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부친은 큰 한 방을 노리며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재기를 꿈꾸고, 모친은 축소된 집 크기에 맞지 않는 '투머치한' 원목 식탁(90년대에 500만 원을 부담하고 구매했던!)을 포기하지 못한다. 저자는 인용문에 서술된 모든 궁금증을 안고 영화를 찍었는데 그 영화가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느낀 순간은 부친이 관람했을 때라고 적는다. "아빠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나서야 비로소 <버블 패밀리>라는 영화가 완성됐다는 생각이 들었다."(232) 그렇게 한 부동산 가족의 이야기가 사람들 곁으로 왔다. 부동산 불패신화의 호황기 한가운데에 있었고, IMF의 여파를 직격탄으로 맞았으나 여전히 부동산 신화에 사로잡혀 있는 부모님을 이해하고자 했던 딸은 아버지와 자신의 성씨를 따 '쌍마픽처스'를 설립한 영화인이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며 앞으로 밀레니얼 세대가 들려줄 집과 부동산 이야기가 더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이미 기존에도 대단지 아파트의 독특한 커뮤니티에 대한 이야기(이은규의 <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 최초의 집에 살았던 주거 기억을 찾아가는 책(신지혜, <최초의 집>) 등이 나와 있다. 시야를 좀 더 확장하면 <여기는 무지개집입니다 - 한 지붕 퀴어 대가족> 등 주거, 가족, 공동체, 섹슈얼리티, 계급, 장소성 등 다채롭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품고 있는 집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IMF 버블이 거품 꺼지듯 한 정상가족을 해체로 몰아갔다면 마민지는 서사의 힘을 통해 거품에서 태어난 조개껍질을 엮어 이야기의 집을 지어냈다. 이 집에서 각자 상처로 얼룩덜룩한 집, 사랑하지만 지긋지긋한 가족에 대한 기억의 사진첩을 잠시 꺼내보게 될 것이다. 집을 사지는 못하더라도 집을 지을 권리와 능력은 누구에게나 있다. 기억의 건축술은 과거의 나, 우리를 다르게 살게 할 수 있다. 이름 모를 외로움과 슬픔에 잠겨 있던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집을 지어주길 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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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 3호 : 전기, 삶에서 글로 교차 3
주아 외 지음 / 읻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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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 3호에 실린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의 서평을 읽었다. 글쓴이는 [자기배려의 책읽기], [자기배려의 인문학]의 저자인 강민혁이고, 과거에 작성된 저자 약력을 보면 은행원으로 일하신다고 한다. 경영학과 경제학을 전공하고 번듯한 직장에 자리 잡은 분들 중 20대 후반-30대 중반 즈음에 불현듯 삶이 철학과 포개져 읽고 쓰는 삶을 살게 되는 분들이 있는 것 같다(‘이인‘ 작가도 떠올랐다). 사람들은 왜 철학을 공부하는 걸까. 그리고 철학자들은 왜 철학을 하는 걸까.


<자기배려의 책읽기> 저자의 말에 그 저의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한동안 나는 플라톤에서부터 니체, 푸코까지 종목을 가리지 않고, 내가 읽고 좋았던 작품이면 뭐든 친구들과 함께 읽었다. 그때마다 나는 깨달았다. 그렇게 읽고 함께 철학자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어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쾌락(필자 강조)이라는 것을 말이다. 친구들도 오래지 않아 그것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이 설명해 주는 플라톤, 니체, 푸코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그들의 텍스트를 악착같이 읽어 내고, 그 세계를 향유하는 기쁨은 엄청나다. 그런 순간이 되면, 어디 써먹을지 모르는데, 왜 이 어려운 글을 읽느냐는 볼멘소리가 쏙 들어가고, 오로지 책읽기가 주는 쾌락에 빠져 더 이상 되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강민혁에게 철학은 무엇보다 쾌락과 기쁨의 원천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아마 모든 철학자들은 이런 욕망을 근원적으로 공유하고 있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철학의 어원을 ‘지혜를 사랑하는 것‘, ‘지혜와 우정을 나누는 것‘으로 풀이한다. 서평에서 강민혁은 철학자를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 ‘지혜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고 해석한다.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득도한 자‘, 세속에 초연한 초인적, 초월적 인물이 아니라 고정된 지혜/진리로 환원되지 않은 삶의 복잡성과 대면하길 주저하지 않고 더 나은 질문을 던지기 위해(더 좋은 앎을 얻기 위해, 좋은 삶을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 내게 철학자는 이런 이미지에 가까워서 ‘지혜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란 표현에 밑줄을 그었다. 소중히 여긴다는 건 무엇인가. 그건 소중한 A를 위해 다른 것들을 포기할 수 있는 것, 소중한 것을 위해 기꺼이 내 시간을 내주는 것이다. 이를 어느 철학책에서는 ‘좋은 것‘과 ‘옳은 것‘의 대비, 이익과 지혜(진리)의 대비로 풀어내기도 했다. 일반적인 학문-지식은 대개 그 자체로 삶의 문제에 답변을 해주지 않는다. 우주는 138억 년 전, 빅뱅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과학적 지식이 우주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비존재/없음이 아니라 존재/있음이 왜 있는지 묻는 형이상학이나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를 묻는 철학적 인간학(막스 셸러), 혹은 물을 수 있는 것과 물을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실증주의...(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철학 훈련을 받지 못한 나로선 ‘철학‘을 논할 때면 꽤 강한 압박감을 느낀다. 워낙 재야의 고수들이 많고, 학문적 엄정함과 엄밀함을 추구하는 분야다 보니 벙벙하고 엉성하게 얘기하면 혼날 것 같은 기분에 시달린달까... 하지만 오류가 좀 있을지언정 자유롭게 철학을 얘기하고 향유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긴 블로그니까 !!) 철학은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사유의 형식이다. 그래서 철학(예술도 여기 포함되는 듯)은 병든 자가 하는 활동이라는 말도 있다(<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에 관련 경우가 인용된다). 삶을 건강하게 충족적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굳이 현상 이면의 본질이나 의미에 매달리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철학함-예술함은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이다. 이성복의 유명한 시구를 빌려 보자면 모두 병들었으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세상에서 아픔을 감각하고 세계의 아픔을 사유하는 활동이랄까.


철학의 난점은 앎과 삶의 불일치, 앎과 삶의 합치 불가능성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보통 철학의 쓸모를 논할 때 철학적 앎을 삶에 적용하기 힘들다, 적용할 수 없다는 말이 가장 먼저 나오곤 한다. 철학은 현실과 유리된 이상ideal에 불과하다는 거다. 강민혁 또한 서평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연속적인 삶을 설명하려는 철학이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언제나 삶이 철학보다 앞서 가는 ‘제논의 역설‘ 같은 현상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정말 철학은 과시적 말놀이에 불과한 것일까. 더러운 현실을 지금 당장 직접 바꿀 순 없으니 아름다운 생각의 성체를 지으려는 중얼거림에 다름 없는가. 그래서 나는 철학이 앎-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방법 혹은 사유의 태도라는 말을 좋아한다. 이를테면 철학자들의 ‘사랑론‘, ‘사랑의 철학‘을 읽는다고 해서 ‘현실 연애‘에 실용적인 도움을 얻긴 쉽지 않다. 주변 사람들의 연애 상담이 훨씬 효과적일 가능성이 높다. 알랭 바디우의 <사랑 예찬>이 상대방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해 직접적인 지침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의 의미를 어떤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지, 삶과 너무 밀착되어 있어 이해하기 힘든 사랑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자신만의 사랑관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자기모순이 덜할 수 있지 않을까. 사회적으로 합의된 사랑 개념과 역할을 순응적으로 따르는 것보다 주체적으로 정립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거라는 믿음이 있다. 아마도... 분명히...


강민혁은 생애와 사상, 삶과 철학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서평 초반부에서 이렇게 적는다. 삶은 철학을 발명한다. 삶과 철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고, 일상과 유리되어 있는 것 같은 고차원적 지성 활동인 ‘철학함’도 삶의 물질적 기반 위에서 전개된다는 것이다. 삶에서 철학이 자연발생하는 것 같지는 않다. 철학적 사고를 하려면 훈련이 필요한 것 같고, 일상에서 흘러가는 사유를 철학적 형식으로 전환하는 일은 의식적으로 고도의 노력을 기울여야 가능해 보여서다. 그렇지만 철학자의 삶에서 배태되지 않는 철학은 없다. 칸트가 늦잠 자고, 불규칙하게 살았더라면 그의 비판 철학은 없었을지도 모른다(혹은 지금과 모습이 꽤 달라졌을 지도 모르고). 고대 그리스 아테네, 18세기 프로이센의 예나, 19세기 말-20세기 초 빈, 20세기 중반 프랑스 파리 등 도시라는 환경도 철학자를 설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고. 근대 이후 철학이 독립적인 분과 학문으로 분리되는 과정에서 ‘자연과학‘과 닮는 전략을 통해 근대 학문으로서 요구되는 정합성, 체계성, 전문성, ‘과학성‘ 등을 충족시키고자 했다고 들었다(어제 동아리 모임에서 S님이 지적해준 내용). 강민혁도 주석에서 원래 철학자들은 외교관 등 다른 직업을 겸하면서 철학을 했는데 대학에 ‘철학과‘에 ‘철학교수‘라는 직함이 생기면서 전문적으로 철학을 연구하며 ‘논문‘을 생산하는 사람이 철학자가 된 변화를 지적한다. 어찌 보면 ‘문창과 교수‘ 출신 작가들에 대한 설명/비판과 되게 유사하다고 느꼈는데 이건 일단 넘어가기로... 그러다 보니 크게 두 가지 변화가 생겼다. 하나는 철학이 커다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게 되었다는 점, 생물학에서 특정 유전자, 특정 세포를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하듯(그런 부분을 통해 ‘생명의 원리‘ 같은 전체 보편을 설명하는) 삶 바깥의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세계 내에서 탐구를 진행하게 되었다는 점(그러다 보니 전문가를 제외한 일반인에게 철학이 현실에 쓸모 없고, 관련이 없는 것이 되어버린), 다른 하나는 철학의 전통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적 글쓰기도 존재하지만 변증술-대화의 줄기도 존재하는데 후자가 거의 실종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강민혁의 서평은 바로 이 변증술의 전통, 대화로써 철학을 하는 가치를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경유해 적극적으로 소환한다. 이런 변증술, 대화의 철학함은 소설로 넘어갔다고 생각한다(밀란 쿤데라 같은). 플라톤의 대화편들은 사실 한 편의 소설, 희곡처럼 재밌게 읽힌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피에르 아도의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 헤르만 프랭켈의 <초기 희랍의 문학과 철학>, 미셸 푸코의 <담론과 진실>을 같이 읽으면 을매나 좋을까... (<최초의 과학자, 아낙시만드로스>도)


서평의 마지막 부분은 ‘진실을 말하기‘‘진실에 대한 용기‘를 논하는 파레시아로 채워진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예전에 약간 치졸한? 느낌의 변명으로 번역되곤 했던)은 파레시아의 관점으로 다시 읽으면 엄청 의미심장해 보일 것 같다. 넷플릭스에서 고대 그리스의 배경으로 철학자들을 등장인물로 하는 12부작 드라마를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서평을 보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외모와 성격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재밌더라. 센세들이 한결 친근하게 다가왔달까... 한국 배우로 캐스팅을 하면 누가 어울리려나. 촬영 쉬는 시간에 하이데거 논문을 읽는다는 유태오 배우 말곤 딱히 떠오르지 않네...



p.s ‘철학자의 생애‘‘철학자 전기‘ 분야 하면 그린비의 인물 시리즈 ‘he-story‘, 고명섭의 ‘극장‘ 시리즈 정도가 떠오르는데 ‘철학자 전기‘도 재밌는 것 같다. 딱 들어맞는 예시는 아니지만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가 그랬고, 이상길의 <아틀라스의 발>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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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4
얼 C. 엘리스 지음, 김용진.박범순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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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인류세’라는 말을 많이 썼다. 기후위기, 인간중심주의-종차별주의, 공장식 축산을 비롯해 동물에 대한 폭력과 착취,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 재난, 말장난처럼 보이는 철학적 현학을 넘어선 ‘인간’ 주체 개념에 대한 강력한 도전… 일련의 문제의식을 한꺼번에 환기하기에 이만한 개념어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인류세’가 뭔지 물어본다면, 특히 면접관이 ’인류세‘를 설명해 보라고 하면 자신 있게 답변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노벨상을 수상한 대기과학자 폴 크뤼천(과 한 분이 더 계시는데 이름을 못 외움…) 2000년대 초반(아니면 90년대 후반이었나?) 인류가 지질학적 변화를 일으켰다고 판단해 지질학적-지구적 단위의 시대를 구분하기 위해 새롭게 고안된 범주. 홀로세 다음으로 지금은 인류세 시기를 살고 있다고 주장. 인류가 지구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력을 강조하려는 비판적인 의도가 있음. 막상 적어놓고 보니 평타는 친 건 같은데 아무튼 앞으로도 이 개념을 자주 사용하게 될 것 같으니 개념의 정확한 의미, 개념-담론이 출현하게 된 역사적 배경, 학계의 수용 양상 등을 파악하고 싶어졌다.

알라딘에 ’인류세‘로 검색하면 인류세 자체를 다룬 책은 몇 보이지 않는다. 인류세를 인문학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서술한 것 같은 책이 다수인 듯. 내 정보력으로 찾을 수 있는 최고의 인류세 입문서-배경이 아니라 중심 소재로 인류세를 다루는 책-교유서가의 첫 단추 시리즈였다.

2016년이었나. 그때 알라딘인가 교보에서 옥스퍼드 출판사의 ‘A very short introduction’ 원서 시리즈를 반값 할인 행사를 했다. 6권 정도 샀던 것 같다(철학, 과학철학 등등…) 그러던 어느 날, 교유서가에서 첫 단추 시리즈가 나오기 시작했고, 옥스퍼드의 이 시리즈를 원저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원서와 번역본을 대조하며 영어 공부를 하겠다는 원대한 꿈은 얼마 못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옥스퍼드 책 또한 가족이 실수로(?) 충동적으로(?) 저지른 분서갱유의 대상이 되며 내 품을 떠났다(난 아직도 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난 건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일은 정말 사건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듯. 바디우적 의미의 사건…). 첫 단추 시리즈로 조금씩 모으고 있다. 사이먼 크리츨리의 ‘유럽 대륙철학’ 같이 자자를 보고 산 경우, ‘이빨’ 같이 제목-주제를 보고 산 경우, ‘홉스’‘마키아벨리’는 번역자를 보고 산 경우다. 이우창, 김민철, 조무원, 임동현 … 지성사 클럽 멤버들을 팔로우업하고 있다. 역자 목록에 신뢰감이 확 생겼다. 과학잡지 에피에서 인류세를 주제로 연재를 하고 계시는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의 박범순 교수님이라니! 공역자인 김용진 선생님 역시 현재 같은 연구센터에서 전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라고 하시니(역자 소개 참고)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라인업이었다.


책을 읽으며 가장 놀랐던 부분은 인류세 시기의 기원을 언제로 볼 것인지에 대해 예상보다 훨씬 다양한 가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인류세의 기점을 18세기 산업혁명으로 보는 시각 외에도 2차 세계대전 이후로 보는 시각, 신석기 농업혁명 이후로 보는 관점 등이 존재했다. 농업혁명 가설은 근거가 빈약해서 충분히 설득력을 얻지 못한 모양새이긴 했다. 2030년, 2050년, 2100년 같은 (근)미래에 Unless 구문의 아포칼립스 서사가 존재한다. 탄소 배출량을 줄이지 않으면, ~~하지 않아 해수면이 상승하면 … 그래서 어쩌란 말이지, 개인이 할 수 있는 부분은 한계가 명확하고 결국 국가, 국제 사회, 기업이 바뀌어야 하는데 녹색정치가 제도권 정치에서 실현될 가능성은 난망하고… 그런 의미에서 인류세의 예술, 예술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와 부분을 매개하고, 새로운 우정을 발명해내고, 공통적인 것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예술 말고 무엇이 할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유물론 동아리에서 캐런 바라드 파트를 다뤘는데 발제를 맡은 Y님이 연극 코펜하겐과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이상우의 프리즘 등 텍스트들을 엮어 짜오신 모자이크 발제문이 정말 흥미로웠다. 양자물리학, 영화 오펜하이머, 닐스 보어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책임과 응답, 간섭과 회절, 잠재적인 것에 잠재적으로 답하기, 우주를 중간에서 만나기 = 우주를 창조하기, 현상, 간-행intra-action(내부-작용)…

세미나 책인 [신유물론 입문] 파트에서 바라드가 가장 흥미로웠다. 마누엘 데란다, 제인 베넷, 로지 브라이도티까지 그동안 읽은 파트의 철학자들은 들뢰즈의 계보 아래 있어서 그런지 잠재성, 생기, 조에 등 각기 다른 개념을 구사하지만 사고방식이 크게 다르다고 느끼지 못했다(데란다는 정치적 입장이 나머지와 좀 다르다고 느끼긴 했는데 베넷과 브라이도티는 적어도 이 책 내에서는 동어반복적이라고까지 느껴졌다). 생물학이나 화학이 아니라 물리학, 닐스 보어의 물리-철학을 베이스로 해서 행위적 상대론을 주창하는데 이게 다른 존재론보다 더 와닿았달까. 표상 없는 실재론, 대상 없는 객관성, 물의를 빚는 우주까지 일독으로 소화하기 벅찬 밀도였고, 그래서 오히려 좋았다. 바라드가 얘기하는 현상의 의미가 무엇인지 마치 양자 역학처럼 책을 읽는 도중에는 알 것 같았는데 덮고 나니까 알쏭달쏭해졌다…

이중슬릿 실험을 재해석하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를 현상의 차원에서 장치apparatus와 얽힘entanglement의 불확정성 원리로 풀어내고…. 릭 돌피언의 [신유물론]에 수록된 캐런 바라드 인터뷰를 보면 바라드는 페미니즘 수업에서 물리학을 가르친다고 한다. 따져 보면 철학적 베이스에서 동일성에 기반한, 로고스중심주의의 뿌리에서 뻗어나온 서양철학을 전복적으로 뒤짚는 페미니즘은 양자 역학과 정말 잘 통할 것 같다…


신유물론은 로지 브라이도티 같은 학자가 세기 말에 처음 사용한 용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인류세와 신유물론은 개념사의 시간적 층위를 공유하고 있는 동시대 발명품인 셈이다. 유물론,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물질에 대한 사유를 새롭게 하는 실험과 인간이 지구의 생태 시스템을 바꿔 그에 대한 지질학적 연대의 명명을 요청하는 작업. 오늘의 소결. 해러웨이를 읽자. 사이보그 선언문 초반부를 읽었는데 정말 미친 텍스트인 것 같다. 대학원 1학기 때는 텍스트를 정말 1도 이해를 못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이제는 읽을 수 있다! 여전히 매우 어렵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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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기계
김홍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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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기계]를 읽고 : 적은 것이 더 총체적일 수 있는가

마음의 사회학’ 이론의 창시자 김홍중은 학계와 출판계 모두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학자이자 작가다. 계간 『사회비평』과 『문학동네』의 편집위원을 역임한 경력은 그가 학자로서의 엄밀성과 작가로서의 미학성을 두루 겸비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런 그가 『사회학적 파상력』 이후에 낸 단독 저서인 산문집 『은둔기계』가 단상 모음집이란 사실이 눈길을 끈다. 애초에 단상 형식으로 쓴 글을 모은 게 아니라 일반적인 산문으로 쓴 글들도 단상으로 변형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한 권의 책으로서 체계적 완결성을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 전작과 같이 일반적인 산문, 평론, 논문을 엮어 책을 내는 게 충분히 가능했을 텐데 ‘단상의 사회학적 글쓰기’를 실험했다. 결과적으로 이 실험이 두 가지 측면에서 유효한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하고 싶다. 하나는 김홍중의 기존 독자들이 단상으로 형식의 변화를 겪은 책에서 고유한 독서 체험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짧은 호흡의 글로 요즘 트렌드에 익숙한 독자들을 포섭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단상의 사회학‘을 시도한 것일까. 작가의 대답은 소박하다. 프롤로그에서 예전부터 단상의 형식을 선호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단상 형식의 에세이는 파스칼, 몽테뉴, 니체, 에밀 시오랑 등 유구한 지성사적 계보를 지니고 있다고 설명한다. 한편, 이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일으킨 전대미문의 사회 변화에 따른 반응인 것처럼 보인다. 문체는 사유의 스타일이자 작가의 몸의 리듬에서 배태된 산물이다. 사회적 거리두기, 언택트 등 삶의 방식을 타율적·강제적으로 변화시켰던 코로나19 사태의 한복판에서 쓴 「바이러스 기호학」은 『은둔기계』의 스타일을 예비하고 있다. 이렇게 작가 자신이 ‘은둔기계‘가 되어 읽고, 쓰고, 사는 과정을 기록한 결과물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전통적으로 사회학은 사회 현상을 총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일반 이론을 지향한다. 그런 의미에서 단상과 사회학은 양립 불가능한 관계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총체보다 더 크고, 심오하고, 생명력이 있고, 강렬˝한 파편에 대해 역설하며 적은 것이 더 총체적일 수 있음을 주장한다. 발터 베냐민의 ‘아케이트 프로젝트‘가 그러했듯 파편의 글쓰기인 단상은 모더니티를 포착하는 데 유용한 형식이 될 수 있다. 단상의 매력은 산문처럼 메시지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단절에서 비롯되는 “멈춤의 힘”에 있다고 역설한다. 산문적 리듬이 멈춘 자리에서 파편이 섬광처럼 말을 시작한다.

『은둔기계』는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는 글쓰기를 위해 은둔에 대한 사유를 단상으로 풀어냈다. 은둔은 ‘생존’, ‘잔존’, ‘자기-삭감’, ‘물러남’, ‘코나투스의 자기-제한’, ‘자기-비움’, ‘파상’, ‘페이션시’, ‘케노시스’, ‘덜 존재하기’다. 은둔은 ‘거리의 생산’ 혹은 ‘간격의 조립’이다. ‘은둔기계’의 개념은 들뢰즈·과타리의 ‘욕망 기계’ 개념과 ‘탈주(도주)’ 개념을 연상시키고, 실제로 연관성이 높다. 은둔기계는 은둔을 실천하는 존재자를 비유하는 형상이다. 파국이 임박한 인류세의 문제 앞에 은둔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인류세에 맞서 봉기나 혁명 같은 급진적인 저항이 아닌 은둔이라니. 나이브하다 못해 탈정치적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없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마음의 사회학‘ 이론 자체가 개인과 사회, 행위와 구조 등 사회학 내부의 이분법적 구분을 극복하기 위한 패러다임이었던 만큼, ‘은둔의 마음‘이 현 시스템에 균열을 일으킬 만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단순화의 위험을 감안해 보자면 인류세는 자연을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자원으로 전락시킨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는 자본주의 시스템과 직결되는 사항이기에 혹자는 인류세를 ‘자본세‘로 고쳐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은둔은 자본주의 사회가 유도하고 강제하는 ‘자기-채움‘, ‘자기-충족‘의 욕망에서 물러나 주체와 타자 사이에 거리를 생산하고, 간격을 조립하는 기술이다. 은둔은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게끔 강제하는 현실에 거리를 두고, 다르게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하는 실천이다. 은둔기계는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이제껏 자연과 비인간에 행해졌던 폭력을 중단하고, 타자와 공생하고자 하는 주체성의 새로운 이름이 될 수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한창이던 시기에 생태적으로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은둔의 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사회학적 단상을 모은 책은 흔할 수 있으나 단상의 사회학적 글쓰기를 시도한 책은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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