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 - 건설·거주·재건축의 40년 케이 모던 2
이인규 지음 / 마티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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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작 <마이너 필링스>는 마티 출판사의 ’앳(at)’ 시리즈의 첫 권이다. ‘앳(at)’ 시리즈, ‘온(on)’ 시리즈에 이어 ‘케이 모던(k-modern)’이 새롭게 출범했다. 마티 출판사 홈페이지에 소개된 시리즈 설명은 다음과 같다.

한국이 만든 ‘현대성’을 묻다

마티가 『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와 함께 ‘케이 모던’ 시리즈를 시작한다. ‘케이 모던’ 시리즈는 한국이 만든 현대성(modernity)에 주목한다. 현대는 주어진 조건으로, 또는 서구나 일본이 한국에 미친 영향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왔으나 이런 시선으로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 사태가 많다. 예를 들어 고층아파트의 기원은 분명 서구에 있지만, 한국의 아파트는 1960년대 이후 한국만의 정치-경제적 상황이 누적되어 빚어진 대단히 독특한 사태이다. 이제 우리가 서구와 일본에서 무엇을 참조했는지 묻는 데에서 나아가 그것을 바탕으로 무엇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이것들이 어떤 한국인을 만들었는지 묻고자 한다.

‘케이 모던’ 첫 번째 책 『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는 시리즈 번호 2번이다. 1번은 박철수 선생의 『마포주공아파트: 단지 신화의 시작』을 위해 남겨두었다.

한마디로 건축을 통해 한국이 만든 현대성을 탐구하는 시리즈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예고된 출간 목록을 보면 아파트를 중심으로 특수한 건축적 현대성을 구현한 한국사회를 논의하려는 시도인 것 같다. ‘아파트 한국사회’의 현대성 탐구랄까. 아파트 책은 꽤 많이 축적되어 있는 편이다. ’프랑스 지리학자가 본 한국의 아파트‘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발레리 줄레조의 <아파트 공화국>, 시각디자인 연구자이자 아파트 담론을 정력적으로 이끌었던 박해천의 ’콘크리트 유토피아 3부작‘(<콘크리트 유토피아>, <아수라장의 모더니티>, <아파트 게임>), 전상인의 <아파트에 미치다>, 건축학자 박인석의 <아파트 한국사회: 단지공화국에 갇힌 도시와 일상>, 얼마 전에 작고하신 고 박철수 교수님의 <아파트>와 <한국 주택 유전자>, 브랜드 아파트의 현장 연구를 진행한 문화인류학, 도시인류학 저술인 <가치 있는 아파트 만들기> 등 한국의 아파트는 국내외 연구자들에게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을 제공해왔다.

그동안 발전국가 시기 근대화의 부정적인 산물로서, 자산 증식의 수단으로 투기의 대상(’사는 곳‘이 아닌 ’사는 것‘이 된)이 된 부동산 상품으로서, 획일화되고 집단주의적 심성을 주조하는 건축 양식으로서 아파트에 대한 부정적인 논의가 지배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케이 모던‘ 시리즈는 그동안 축적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건축이 만든 한국의 현대성‘을 새롭게, 두텁게 이야기해보려는 도전이 아닐까 싶었다. ’디지털 네이티브‘처럼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아파트 네이티브’, ’아파트 키드‘가 특수가 아닌 보편적 주체가 된 시대 상황에서 오늘날 도시와 건축, 주거와 라이프스타일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한국의 건축적 현대성을 역사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노력. ’케이 모던‘ 시리즈는 1번 단지 신화의 시작을 알린 마포주공아파트이 아닌 2번 박철수 선생의 제자이자 ’아파트 키드‘로서 젊은 세대의 새로운 아파트 연구를 보여주는 이인규의 <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로 첫 선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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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둔촌주공아파트‘로 이인규 저자를 처음 알게 되었다. 아직 책을 읽어보지 못했으나 어느 글에서 이 아카이빙 프로젝트의 존재를 접해 굉장히 흥미로운 작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둔촌주공아파트 재개발 소식을 모르고 있던 터라 그의 작업이 어린 시절 추억을 보관하기 위한 실천이겠거니 짐작했을 뿐이었다. <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는 ’아파트의 생애사‘를 기록하는 독특한 형식의 글쓰기를 표방하고 있었다. ’건설, 거주, 재건축의 40년‘은 둔촌주공아파트가 살아낸 생로병사의 시간인 셈이다. 식민지 근대와 발전국가 시기 압축적 근대화를 겪으며 한국사회는 시간의 더깨가 쌓인 역사성의 흔적을 파괴적으로 지우고, 그 위에 근대국가를 전투적으로 건설해 왔다. 한 세기 전만 해도 식민지의 시간을 살았던 한국사회에 역사적 기억을 다음 세대로 전수해줄 만한 ’기억의 장소‘, ’기억의 공간‘은 그리 많이 보존돼 있지 않다. 자본이 빠르게 움직이고, 재개발과 건설이 활발히 이뤄지는 서울에서 40년씩 오랜 수명을 살다 간 건축물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오랜만에 어느 동네를 방문했을 때 단골집이 사라졌음을 확인하고 헛헛함과 상실감을 느낀 적이 한 번씩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둔촌주공아파트는 호상을 치렀다고 할 수 있으려나. 아마 그렇게 얘기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둔촌주공아파트 재개발을 둘러싼 갈등의 내력이 그리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다.


둔촌주공아파트의 생애를 통해 단순히 ‘어떻게 하면 재건축사업에서 둔촌주공 사태의 재발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인가?’에서 질문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왜 이렇게까지 거대한 문제가 만들어진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원인과 문제가 일어난 과정을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랐다.

서문

이인규는 대단지의 생애사를 기록함으로써 앞으로 반복될 재개발 잔혹사의 오답 노트를 제공하고자 한다. 역사 쓰기를 통해 현실에 개입하기.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기억/상상력의 자원을 제공함으로써 다가올 미래를 현재에 기입하기. 이곳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곳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냈는지, 이곳이 어떻게 사라져갔는지 탄생부터 죽음까지 한 편의 전기(autobiography)를 작성한다. 단독 주택이라면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 건물을 지은 건설사, 건물에서 산 주민 정도의 이야기를 담으면 될 텐데 둔촌주공아파트는 훨씬 복잡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놓여 있다. 그래서 저자는 “둔촌주공아파트의 생애를 살펴본다는 것은 콘크리트로 지어진 아파트 건물과 그 주변에 조성된 단지 환경을 넘어, 아파트 단지의 생애에 관여하는 여러 주체에 관한 관심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일이었다. 둔촌주공을 기획한 정책 결정자들, 설계하고 시공한 건축업 종사자들, 그리고 당시 아파트에 들어와 살았던 입주민들, 그리고 재건축 과정에 관여한 조합, 시공사 등까지. 그들의 생각과 활동, 상호작용과 그 결과로 나타난 변화를 두루 살펴보려고 노력했다”고 밝히고 있다.

둔촌주공아파트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해하려면 발전국가 시기의 개발연대와 정림건축의 두 행위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대에 정권에 친화적인 중산층을 육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주공아파트 건설은 이면에 “늘어나는 중산층의 내 집 마련 수요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체제 순응적이고 정권 친화적인 집단을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총과 칼의 무력을 통한 폭압적인 철권 통치의 한계가 명확했기에 시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체제순응적인 시민 집단을 형성하고자 아파트를 대대적으로 건설하여 공급한다. 강남 개발로 서울이 폭발적으로 팽창하던 시기였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유치를 앞두고 사회 안정을 시행한다는 명목 아래 정상 시민과 비시민을 구분하고, 부랑아나 노숙자 등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 찍힌 소외된 자들을 배제하고 몰아내는 데 앞장 섰다. 둔촌주공아파트의 경우, 군인, 공무원, 서울대 교수 등 정권에 친화적인 기득권 세력이 특혜를 받았고(‘반공 국민’ 만들기의 일환), 입주권을 따내기 위해 현금을 많이 지불해야 했기에 고임금 전문직이나 대출을 쉽게 받을 수 있는 계층이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건축신문’을 발행하는 ‘정림건축문화재단’의 정림건축이 본문에 등장해서 놀라웠고 반가웠다. 저자는 김중업, 김수근 등 스타 건축가에 집중돼 있는 기존 건축계의 한계를 지적하며 건축사의 빈 자리에 건축 집단의 퍼즐을 끼워맞추고자 한다. 분량이 좀 길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이라 그대로 인용해보려고 한다.

김정철의 바람대로 둔촌주공은 ‘후세에 의해 평가’된다. 건축학자나 평론가 들이 아니라 그곳에서 나고 자랐던 이들에 의해 아파트에 대한 다른 평가와 이해가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둔촌주공아파트에 살았던 이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각자 마음속에 품고 있던 동네에 대한 애정을 공유했다. 사람들은 둔촌주공아파트가 낮은 밀도로 지어져 쾌적하고 여유로운 공간을 누릴 수 있었고, 섬세하게 설계된 단지의 여러 요소 덕분에 장소에 대한 좋은 감각과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계절마다, 구역마다 다른 모습이었던 수목들과 넓은 녹지, 놀이터와 휴게공간을 유연하게 연결하던 보행자 전용로 등 주민들이 사랑했던 공간들은 설계자들이 특별히 더 신경 써서 설계하고 실현한 것들이었다.

거주민들은 안락하고 살기 좋은 거주 환경을 만들고자 했던 이름 모를 설계자의 이상과 이를 실제로 구현하기 위한 노력을 읽어낼 수 있었다. 살기 좋은 집을 만들려는 마음이 정말로 살기 좋은 집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좋음을 사람들은 알아본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 더 좋은 거주 환경을 고민하는 마음이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69-70)

책 말미에 “둔촌은 강동이 아닙니다!” 파트는 재개발과 부동산, 자본과 정치의 모순이 집약적으로 녹아 있는 부분이었다. 대한주택공사의 과거 사훈대로, 김정철과 정림건축의 철학대로 살기 좋은 주택을 짓는 건축의 공공성 정신은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 아니 부동산을 중심으로 이익 집단이 헤쳐 모이고, 동일한 욕망을 공유하는 조직화된 집단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역학 속에서 공공적인 도시 정책이 어떻게 시행될 수 있을까. 이런 커다란 질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정작 마음속에 선명하게 각인된 이미지는 성인이 되기까지 자신을 키워낸 집-동네를 향한 애정으로 기록활동가에서 건축연구자가 된 저자의 궤적이었다. 집에서 동네로, 동네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국가로, 그리고 사적인 추억에서 공공적 기억으로, 사실에서 역사로 이동하며 집에 집을 지어 주었다. 성냥갑 같이 네모 낳고 단단한 책의 집을, 존재가 거주하는 언어의 집을. 여기서 누군가의 유년 시절의 노스탤지어를, 누군가는 아파트 공화국/한국사회의 역사적 단면을, 누군가는 재개발의 잔혹한 역사를 재현하지 않기 위한 지적 재료를 얻어갈 것이다. 한 생애는 이토록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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