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4
얼 C. 엘리스 지음, 김용진.박범순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해 ‘인류세’라는 말을 많이 썼다. 기후위기, 인간중심주의-종차별주의, 공장식 축산을 비롯해 동물에 대한 폭력과 착취,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 재난, 말장난처럼 보이는 철학적 현학을 넘어선 ‘인간’ 주체 개념에 대한 강력한 도전… 일련의 문제의식을 한꺼번에 환기하기에 이만한 개념어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인류세’가 뭔지 물어본다면, 특히 면접관이 ’인류세‘를 설명해 보라고 하면 자신 있게 답변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노벨상을 수상한 대기과학자 폴 크뤼천(과 한 분이 더 계시는데 이름을 못 외움…) 2000년대 초반(아니면 90년대 후반이었나?) 인류가 지질학적 변화를 일으켰다고 판단해 지질학적-지구적 단위의 시대를 구분하기 위해 새롭게 고안된 범주. 홀로세 다음으로 지금은 인류세 시기를 살고 있다고 주장. 인류가 지구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력을 강조하려는 비판적인 의도가 있음. 막상 적어놓고 보니 평타는 친 건 같은데 아무튼 앞으로도 이 개념을 자주 사용하게 될 것 같으니 개념의 정확한 의미, 개념-담론이 출현하게 된 역사적 배경, 학계의 수용 양상 등을 파악하고 싶어졌다.

알라딘에 ’인류세‘로 검색하면 인류세 자체를 다룬 책은 몇 보이지 않는다. 인류세를 인문학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서술한 것 같은 책이 다수인 듯. 내 정보력으로 찾을 수 있는 최고의 인류세 입문서-배경이 아니라 중심 소재로 인류세를 다루는 책-교유서가의 첫 단추 시리즈였다.

2016년이었나. 그때 알라딘인가 교보에서 옥스퍼드 출판사의 ‘A very short introduction’ 원서 시리즈를 반값 할인 행사를 했다. 6권 정도 샀던 것 같다(철학, 과학철학 등등…) 그러던 어느 날, 교유서가에서 첫 단추 시리즈가 나오기 시작했고, 옥스퍼드의 이 시리즈를 원저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원서와 번역본을 대조하며 영어 공부를 하겠다는 원대한 꿈은 얼마 못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옥스퍼드 책 또한 가족이 실수로(?) 충동적으로(?) 저지른 분서갱유의 대상이 되며 내 품을 떠났다(난 아직도 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난 건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일은 정말 사건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듯. 바디우적 의미의 사건…). 첫 단추 시리즈로 조금씩 모으고 있다. 사이먼 크리츨리의 ‘유럽 대륙철학’ 같이 자자를 보고 산 경우, ‘이빨’ 같이 제목-주제를 보고 산 경우, ‘홉스’‘마키아벨리’는 번역자를 보고 산 경우다. 이우창, 김민철, 조무원, 임동현 … 지성사 클럽 멤버들을 팔로우업하고 있다. 역자 목록에 신뢰감이 확 생겼다. 과학잡지 에피에서 인류세를 주제로 연재를 하고 계시는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의 박범순 교수님이라니! 공역자인 김용진 선생님 역시 현재 같은 연구센터에서 전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라고 하시니(역자 소개 참고)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라인업이었다.


책을 읽으며 가장 놀랐던 부분은 인류세 시기의 기원을 언제로 볼 것인지에 대해 예상보다 훨씬 다양한 가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인류세의 기점을 18세기 산업혁명으로 보는 시각 외에도 2차 세계대전 이후로 보는 시각, 신석기 농업혁명 이후로 보는 관점 등이 존재했다. 농업혁명 가설은 근거가 빈약해서 충분히 설득력을 얻지 못한 모양새이긴 했다. 2030년, 2050년, 2100년 같은 (근)미래에 Unless 구문의 아포칼립스 서사가 존재한다. 탄소 배출량을 줄이지 않으면, ~~하지 않아 해수면이 상승하면 … 그래서 어쩌란 말이지, 개인이 할 수 있는 부분은 한계가 명확하고 결국 국가, 국제 사회, 기업이 바뀌어야 하는데 녹색정치가 제도권 정치에서 실현될 가능성은 난망하고… 그런 의미에서 인류세의 예술, 예술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와 부분을 매개하고, 새로운 우정을 발명해내고, 공통적인 것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예술 말고 무엇이 할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유물론 동아리에서 캐런 바라드 파트를 다뤘는데 발제를 맡은 Y님이 연극 코펜하겐과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이상우의 프리즘 등 텍스트들을 엮어 짜오신 모자이크 발제문이 정말 흥미로웠다. 양자물리학, 영화 오펜하이머, 닐스 보어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책임과 응답, 간섭과 회절, 잠재적인 것에 잠재적으로 답하기, 우주를 중간에서 만나기 = 우주를 창조하기, 현상, 간-행intra-action(내부-작용)…

세미나 책인 [신유물론 입문] 파트에서 바라드가 가장 흥미로웠다. 마누엘 데란다, 제인 베넷, 로지 브라이도티까지 그동안 읽은 파트의 철학자들은 들뢰즈의 계보 아래 있어서 그런지 잠재성, 생기, 조에 등 각기 다른 개념을 구사하지만 사고방식이 크게 다르다고 느끼지 못했다(데란다는 정치적 입장이 나머지와 좀 다르다고 느끼긴 했는데 베넷과 브라이도티는 적어도 이 책 내에서는 동어반복적이라고까지 느껴졌다). 생물학이나 화학이 아니라 물리학, 닐스 보어의 물리-철학을 베이스로 해서 행위적 상대론을 주창하는데 이게 다른 존재론보다 더 와닿았달까. 표상 없는 실재론, 대상 없는 객관성, 물의를 빚는 우주까지 일독으로 소화하기 벅찬 밀도였고, 그래서 오히려 좋았다. 바라드가 얘기하는 현상의 의미가 무엇인지 마치 양자 역학처럼 책을 읽는 도중에는 알 것 같았는데 덮고 나니까 알쏭달쏭해졌다…

이중슬릿 실험을 재해석하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를 현상의 차원에서 장치apparatus와 얽힘entanglement의 불확정성 원리로 풀어내고…. 릭 돌피언의 [신유물론]에 수록된 캐런 바라드 인터뷰를 보면 바라드는 페미니즘 수업에서 물리학을 가르친다고 한다. 따져 보면 철학적 베이스에서 동일성에 기반한, 로고스중심주의의 뿌리에서 뻗어나온 서양철학을 전복적으로 뒤짚는 페미니즘은 양자 역학과 정말 잘 통할 것 같다…


신유물론은 로지 브라이도티 같은 학자가 세기 말에 처음 사용한 용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인류세와 신유물론은 개념사의 시간적 층위를 공유하고 있는 동시대 발명품인 셈이다. 유물론,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물질에 대한 사유를 새롭게 하는 실험과 인간이 지구의 생태 시스템을 바꿔 그에 대한 지질학적 연대의 명명을 요청하는 작업. 오늘의 소결. 해러웨이를 읽자. 사이보그 선언문 초반부를 읽었는데 정말 미친 텍스트인 것 같다. 대학원 1학기 때는 텍스트를 정말 1도 이해를 못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이제는 읽을 수 있다! 여전히 매우 어렵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