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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 3호 : 전기, 삶에서 글로 ㅣ 교차 3
주아 외 지음 / 읻다 / 2022년 10월
평점 :
교차 3호에 실린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의 서평을 읽었다. 글쓴이는 [자기배려의 책읽기], [자기배려의 인문학]의 저자인 강민혁이고, 과거에 작성된 저자 약력을 보면 은행원으로 일하신다고 한다. 경영학과 경제학을 전공하고 번듯한 직장에 자리 잡은 분들 중 20대 후반-30대 중반 즈음에 불현듯 삶이 철학과 포개져 읽고 쓰는 삶을 살게 되는 분들이 있는 것 같다(‘이인‘ 작가도 떠올랐다). 사람들은 왜 철학을 공부하는 걸까. 그리고 철학자들은 왜 철학을 하는 걸까.
<자기배려의 책읽기> 저자의 말에 그 저의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한동안 나는 플라톤에서부터 니체, 푸코까지 종목을 가리지 않고, 내가 읽고 좋았던 작품이면 뭐든 친구들과 함께 읽었다. 그때마다 나는 깨달았다. 그렇게 읽고 함께 철학자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어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쾌락(필자 강조)이라는 것을 말이다. 친구들도 오래지 않아 그것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이 설명해 주는 플라톤, 니체, 푸코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그들의 텍스트를 악착같이 읽어 내고, 그 세계를 향유하는 기쁨은 엄청나다. 그런 순간이 되면, 어디 써먹을지 모르는데, 왜 이 어려운 글을 읽느냐는 볼멘소리가 쏙 들어가고, 오로지 책읽기가 주는 쾌락에 빠져 더 이상 되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강민혁에게 철학은 무엇보다 쾌락과 기쁨의 원천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아마 모든 철학자들은 이런 욕망을 근원적으로 공유하고 있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철학의 어원을 ‘지혜를 사랑하는 것‘, ‘지혜와 우정을 나누는 것‘으로 풀이한다. 서평에서 강민혁은 철학자를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 ‘지혜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고 해석한다.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득도한 자‘, 세속에 초연한 초인적, 초월적 인물이 아니라 고정된 지혜/진리로 환원되지 않은 삶의 복잡성과 대면하길 주저하지 않고 더 나은 질문을 던지기 위해(더 좋은 앎을 얻기 위해, 좋은 삶을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 내게 철학자는 이런 이미지에 가까워서 ‘지혜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란 표현에 밑줄을 그었다. 소중히 여긴다는 건 무엇인가. 그건 소중한 A를 위해 다른 것들을 포기할 수 있는 것, 소중한 것을 위해 기꺼이 내 시간을 내주는 것이다. 이를 어느 철학책에서는 ‘좋은 것‘과 ‘옳은 것‘의 대비, 이익과 지혜(진리)의 대비로 풀어내기도 했다. 일반적인 학문-지식은 대개 그 자체로 삶의 문제에 답변을 해주지 않는다. 우주는 138억 년 전, 빅뱅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과학적 지식이 우주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비존재/없음이 아니라 존재/있음이 왜 있는지 묻는 형이상학이나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를 묻는 철학적 인간학(막스 셸러), 혹은 물을 수 있는 것과 물을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실증주의...(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철학 훈련을 받지 못한 나로선 ‘철학‘을 논할 때면 꽤 강한 압박감을 느낀다. 워낙 재야의 고수들이 많고, 학문적 엄정함과 엄밀함을 추구하는 분야다 보니 벙벙하고 엉성하게 얘기하면 혼날 것 같은 기분에 시달린달까... 하지만 오류가 좀 있을지언정 자유롭게 철학을 얘기하고 향유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긴 블로그니까 !!) 철학은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사유의 형식이다. 그래서 철학(예술도 여기 포함되는 듯)은 병든 자가 하는 활동이라는 말도 있다(<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에 관련 경우가 인용된다). 삶을 건강하게 충족적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굳이 현상 이면의 본질이나 의미에 매달리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철학함-예술함은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이다. 이성복의 유명한 시구를 빌려 보자면 모두 병들었으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세상에서 아픔을 감각하고 세계의 아픔을 사유하는 활동이랄까.
철학의 난점은 앎과 삶의 불일치, 앎과 삶의 합치 불가능성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보통 철학의 쓸모를 논할 때 철학적 앎을 삶에 적용하기 힘들다, 적용할 수 없다는 말이 가장 먼저 나오곤 한다. 철학은 현실과 유리된 이상ideal에 불과하다는 거다. 강민혁 또한 서평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연속적인 삶을 설명하려는 철학이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언제나 삶이 철학보다 앞서 가는 ‘제논의 역설‘ 같은 현상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정말 철학은 과시적 말놀이에 불과한 것일까. 더러운 현실을 지금 당장 직접 바꿀 순 없으니 아름다운 생각의 성체를 지으려는 중얼거림에 다름 없는가. 그래서 나는 철학이 앎-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방법 혹은 사유의 태도라는 말을 좋아한다. 이를테면 철학자들의 ‘사랑론‘, ‘사랑의 철학‘을 읽는다고 해서 ‘현실 연애‘에 실용적인 도움을 얻긴 쉽지 않다. 주변 사람들의 연애 상담이 훨씬 효과적일 가능성이 높다. 알랭 바디우의 <사랑 예찬>이 상대방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해 직접적인 지침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의 의미를 어떤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지, 삶과 너무 밀착되어 있어 이해하기 힘든 사랑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자신만의 사랑관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자기모순이 덜할 수 있지 않을까. 사회적으로 합의된 사랑 개념과 역할을 순응적으로 따르는 것보다 주체적으로 정립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거라는 믿음이 있다. 아마도... 분명히...
강민혁은 생애와 사상, 삶과 철학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서평 초반부에서 이렇게 적는다. 삶은 철학을 발명한다. 삶과 철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고, 일상과 유리되어 있는 것 같은 고차원적 지성 활동인 ‘철학함’도 삶의 물질적 기반 위에서 전개된다는 것이다. 삶에서 철학이 자연발생하는 것 같지는 않다. 철학적 사고를 하려면 훈련이 필요한 것 같고, 일상에서 흘러가는 사유를 철학적 형식으로 전환하는 일은 의식적으로 고도의 노력을 기울여야 가능해 보여서다. 그렇지만 철학자의 삶에서 배태되지 않는 철학은 없다. 칸트가 늦잠 자고, 불규칙하게 살았더라면 그의 비판 철학은 없었을지도 모른다(혹은 지금과 모습이 꽤 달라졌을 지도 모르고). 고대 그리스 아테네, 18세기 프로이센의 예나, 19세기 말-20세기 초 빈, 20세기 중반 프랑스 파리 등 도시라는 환경도 철학자를 설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고. 근대 이후 철학이 독립적인 분과 학문으로 분리되는 과정에서 ‘자연과학‘과 닮는 전략을 통해 근대 학문으로서 요구되는 정합성, 체계성, 전문성, ‘과학성‘ 등을 충족시키고자 했다고 들었다(어제 동아리 모임에서 S님이 지적해준 내용). 강민혁도 주석에서 원래 철학자들은 외교관 등 다른 직업을 겸하면서 철학을 했는데 대학에 ‘철학과‘에 ‘철학교수‘라는 직함이 생기면서 전문적으로 철학을 연구하며 ‘논문‘을 생산하는 사람이 철학자가 된 변화를 지적한다. 어찌 보면 ‘문창과 교수‘ 출신 작가들에 대한 설명/비판과 되게 유사하다고 느꼈는데 이건 일단 넘어가기로... 그러다 보니 크게 두 가지 변화가 생겼다. 하나는 철학이 커다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게 되었다는 점, 생물학에서 특정 유전자, 특정 세포를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하듯(그런 부분을 통해 ‘생명의 원리‘ 같은 전체 보편을 설명하는) 삶 바깥의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세계 내에서 탐구를 진행하게 되었다는 점(그러다 보니 전문가를 제외한 일반인에게 철학이 현실에 쓸모 없고, 관련이 없는 것이 되어버린), 다른 하나는 철학의 전통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적 글쓰기도 존재하지만 변증술-대화의 줄기도 존재하는데 후자가 거의 실종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강민혁의 서평은 바로 이 변증술의 전통, 대화로써 철학을 하는 가치를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경유해 적극적으로 소환한다. 이런 변증술, 대화의 철학함은 소설로 넘어갔다고 생각한다(밀란 쿤데라 같은). 플라톤의 대화편들은 사실 한 편의 소설, 희곡처럼 재밌게 읽힌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피에르 아도의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 헤르만 프랭켈의 <초기 희랍의 문학과 철학>, 미셸 푸코의 <담론과 진실>을 같이 읽으면 을매나 좋을까... (<최초의 과학자, 아낙시만드로스>도)
서평의 마지막 부분은 ‘진실을 말하기‘‘진실에 대한 용기‘를 논하는 파레시아로 채워진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예전에 약간 치졸한? 느낌의 변명으로 번역되곤 했던)은 파레시아의 관점으로 다시 읽으면 엄청 의미심장해 보일 것 같다. 넷플릭스에서 고대 그리스의 배경으로 철학자들을 등장인물로 하는 12부작 드라마를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서평을 보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외모와 성격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재밌더라. 센세들이 한결 친근하게 다가왔달까... 한국 배우로 캐스팅을 하면 누가 어울리려나. 촬영 쉬는 시간에 하이데거 논문을 읽는다는 유태오 배우 말곤 딱히 떠오르지 않네...
p.s ‘철학자의 생애‘‘철학자 전기‘ 분야 하면 그린비의 인물 시리즈 ‘he-story‘, 고명섭의 ‘극장‘ 시리즈 정도가 떠오르는데 ‘철학자 전기‘도 재밌는 것 같다. 딱 들어맞는 예시는 아니지만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가 그랬고, 이상길의 <아틀라스의 발>이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