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기계
김홍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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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기계]를 읽고 : 적은 것이 더 총체적일 수 있는가

마음의 사회학’ 이론의 창시자 김홍중은 학계와 출판계 모두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학자이자 작가다. 계간 『사회비평』과 『문학동네』의 편집위원을 역임한 경력은 그가 학자로서의 엄밀성과 작가로서의 미학성을 두루 겸비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런 그가 『사회학적 파상력』 이후에 낸 단독 저서인 산문집 『은둔기계』가 단상 모음집이란 사실이 눈길을 끈다. 애초에 단상 형식으로 쓴 글을 모은 게 아니라 일반적인 산문으로 쓴 글들도 단상으로 변형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한 권의 책으로서 체계적 완결성을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 전작과 같이 일반적인 산문, 평론, 논문을 엮어 책을 내는 게 충분히 가능했을 텐데 ‘단상의 사회학적 글쓰기’를 실험했다. 결과적으로 이 실험이 두 가지 측면에서 유효한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하고 싶다. 하나는 김홍중의 기존 독자들이 단상으로 형식의 변화를 겪은 책에서 고유한 독서 체험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짧은 호흡의 글로 요즘 트렌드에 익숙한 독자들을 포섭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단상의 사회학‘을 시도한 것일까. 작가의 대답은 소박하다. 프롤로그에서 예전부터 단상의 형식을 선호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단상 형식의 에세이는 파스칼, 몽테뉴, 니체, 에밀 시오랑 등 유구한 지성사적 계보를 지니고 있다고 설명한다. 한편, 이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일으킨 전대미문의 사회 변화에 따른 반응인 것처럼 보인다. 문체는 사유의 스타일이자 작가의 몸의 리듬에서 배태된 산물이다. 사회적 거리두기, 언택트 등 삶의 방식을 타율적·강제적으로 변화시켰던 코로나19 사태의 한복판에서 쓴 「바이러스 기호학」은 『은둔기계』의 스타일을 예비하고 있다. 이렇게 작가 자신이 ‘은둔기계‘가 되어 읽고, 쓰고, 사는 과정을 기록한 결과물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전통적으로 사회학은 사회 현상을 총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일반 이론을 지향한다. 그런 의미에서 단상과 사회학은 양립 불가능한 관계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총체보다 더 크고, 심오하고, 생명력이 있고, 강렬˝한 파편에 대해 역설하며 적은 것이 더 총체적일 수 있음을 주장한다. 발터 베냐민의 ‘아케이트 프로젝트‘가 그러했듯 파편의 글쓰기인 단상은 모더니티를 포착하는 데 유용한 형식이 될 수 있다. 단상의 매력은 산문처럼 메시지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단절에서 비롯되는 “멈춤의 힘”에 있다고 역설한다. 산문적 리듬이 멈춘 자리에서 파편이 섬광처럼 말을 시작한다.

『은둔기계』는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는 글쓰기를 위해 은둔에 대한 사유를 단상으로 풀어냈다. 은둔은 ‘생존’, ‘잔존’, ‘자기-삭감’, ‘물러남’, ‘코나투스의 자기-제한’, ‘자기-비움’, ‘파상’, ‘페이션시’, ‘케노시스’, ‘덜 존재하기’다. 은둔은 ‘거리의 생산’ 혹은 ‘간격의 조립’이다. ‘은둔기계’의 개념은 들뢰즈·과타리의 ‘욕망 기계’ 개념과 ‘탈주(도주)’ 개념을 연상시키고, 실제로 연관성이 높다. 은둔기계는 은둔을 실천하는 존재자를 비유하는 형상이다. 파국이 임박한 인류세의 문제 앞에 은둔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인류세에 맞서 봉기나 혁명 같은 급진적인 저항이 아닌 은둔이라니. 나이브하다 못해 탈정치적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없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마음의 사회학‘ 이론 자체가 개인과 사회, 행위와 구조 등 사회학 내부의 이분법적 구분을 극복하기 위한 패러다임이었던 만큼, ‘은둔의 마음‘이 현 시스템에 균열을 일으킬 만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단순화의 위험을 감안해 보자면 인류세는 자연을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자원으로 전락시킨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는 자본주의 시스템과 직결되는 사항이기에 혹자는 인류세를 ‘자본세‘로 고쳐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은둔은 자본주의 사회가 유도하고 강제하는 ‘자기-채움‘, ‘자기-충족‘의 욕망에서 물러나 주체와 타자 사이에 거리를 생산하고, 간격을 조립하는 기술이다. 은둔은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게끔 강제하는 현실에 거리를 두고, 다르게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하는 실천이다. 은둔기계는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이제껏 자연과 비인간에 행해졌던 폭력을 중단하고, 타자와 공생하고자 하는 주체성의 새로운 이름이 될 수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한창이던 시기에 생태적으로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은둔의 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사회학적 단상을 모은 책은 흔할 수 있으나 단상의 사회학적 글쓰기를 시도한 책은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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