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사박물관이 세계를 구하는 법 - 대멸종의 시대, 자연의 기억보관소가 들려주는 전시실 너머의 이야기
잭 애슈비 지음, 제효영 옮김 / 김영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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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친구가 권해서 가게 된 런던 자연사 박물관, 원형처럼 박제 복원한 생물들은 보기가 슬퍼서, 골격 구조만 남은 생물들을 한참 보았다. 규모가 커서 평생 다녀야 다 볼 수 있을 듯했다. 그땐 생각해보지 못한 기록의 필요와 의미에 대해서 처음으로 배워 볼 기회다.

 

자연사박물관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존한 장소가 아니라, 인간 사회의 시선과 권력, 기술과 제약 속에서 자연을 선별해 저장해온 장소다.”

 

유익하고 진중한 분위기의 글일거라 생각했는데 그렇기도 하지만 아주 재밌다. 불쾌하거나 불편하지 않게 전하는 기술과 중요한 것들을 놓치거나 빼놓지 않는 능력이 절묘하게 결합한 글이다. 너무 쉽고 빠른 지적보다는 차분하게 역사를 함께 살펴 이해하는 과정이 멋진 강의 같다.

 

새롭게 배운 점들은 너무나 많다. 극히 일부만 소개할 수 있어서 안타깝기만 하다. 박물관이 전시와 보존을 위한 공간이라는 이해를 덕분에 바꿨고, “자연을 대변할 사람들을 길러내는역할까지 가능하다는 점이 기쁘다. 물론 박물관을 만드는 사람들이 편향적이고 정치적이며 대체로 그리 과학적이지 않아서, “박물관이 해석한 자연에는 편향과 정치가 녹아 있다는 것을 정확히 이해한 후에만 긍정이 가능하다.

 

자연사박물관이 처음부터 전시를 목적으로 표본을 수집하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 수장고에 있는 표본은 관람객들의 기대에 부응하기보다는 연구에 더 적합하도록 처리되고 보관된다.”

 

선명한 기억은 아니지만, 어릴 적부터 보아온 여러 전시에서 나는 - 우리는 - 갖가지 편향적 사고가 반영된 모습들을 만났을 것이다. 그 내용들을 책을 통해 함께 짚어보고, 비전공자로서 잘못된 과학 지식을 바로 잡고, 다른 생물들의 생태를 새롭게 배우는 시간도 즐겁기만 하다.

 

또한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된 - 전시에 적합한 - 생물종의 생태적 기능이 전시되지 않거나 배경으로 처리되는 다른 생물종보다 크지 않거나, 오히려 후자들의 기능이 인간의 생존에 결정적이라는 반전 내용들을 배우고 기억하는 일이 중요하다. 현실적이고 현재 진행형이며 미래에 영향을 끼칠 과학 지식이다.

 

건강한 지구 생태계에 막대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식물과 균류는 자연사박물관 전시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곤충 생물량이 "해마다 2.5퍼센트씩 줄고 있는지, 그렇게 심각한 상황인지 몰랐다. 지독하게 고단한 일상에 매몰되어 살다보니, “생물서식지의 문제와 총체적인 이해 같은 것을 잊고 산다. 윽박지르거나 비난하지 않는 재밌는 이 책이, 간과한 많은 것들을 조목조목 상기시켜주어 고맙다.

 

순수를 내세우거나, 그 기준으로 분류하고 배격하는 이들을 늘 경계하며 살았다. 혼자 살 수 없는 생명체가 함께 살기 위해 고안된 시스템과 깔끔하게 분리되어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이해 부족이나 무지에 대한 무지거나 혹은 의도된 프로파간다라고 간주했다.

 

사실 과학도 문화의 한 부분이다. 과학계가 던지는 질문은 특정 시대와 지역의 사회적 규범, 정치, 우선순위, 금기시되는 것의 영향을 받는다.”

 

객관과 논리를 존립 조건으로 삼은 과학 연구도 마찬가지다. 거칠게 말하자면, 연구비 지원이 없는 어떤 연구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엇도 완전무결할 수 없다면, 가능한 최선은 인간도 인간의 모든 행위도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잊지 말고, 그로부터 신중하게 고갱이를 골라내는 일일 것이다.

 

읽기 전에 제목을 보고 피식 웃었는데, 지금은 자연사박물관이 어떤 한 방식으로 세계를 구하는 장면이 몹시 기대된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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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시인선 52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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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종교인들은 많지만, 종교는 가져본 적 없다. 그래도 기도하는 방법은 시인에게 배웠다. 걷기 명상을 좋아하니, 걷다가도 문득 기도할 수 있는 이 방법이 좋다. 살아갈수록 모르는 것만 더 많아진다는 슬픔을 나눌 형편이 아닐 때는 더 좋다.

 

2014년에 처음 배웠으니 어느새 12년차 기도쟁이가 되었다. 문득 낯설고 익숙하기도 한 것이 삶 자체와 닮았다. 봄꽃들이 진 자리마다 봄이 왔다 감, 이라고 적혀 있다. 남은 꽃잎들이 더 적은 하늘 어디에서, 다시 꽃잎 하나가 떨어진다. 기도하고 싶은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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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 시가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라고 묻곤 했다. (...) 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

 

존경하는 친구가 말했듯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관(世界觀)이 아니고 세계감(世界感)이다. 세계와 나를 온전하게 느끼는 감성의 회복이 긴급한 과제다. 우리는 하나의 관점이기 이전에 무수한 감점(感點)이다.”

 

이렇게 모아놓은 조금은 낯선 낯익은 이야기가, 오래된 기도 같은 이야기가 다른 삶,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사람들과 손을 잡았으면 한다.”

 

2014년 봄 이문재 시인의 말 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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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단
정보라 지음 / 상상스퀘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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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속에서 계엄군은 대화나 협상이 통하지 않았다. 군인들은 종이 피켓 한 장을 손에 들고 거리에서 행진하는 사람들에게 실탄을 발사했다.”

 

청청이 패션이라는 말에 격세지감(?)을 크게 느낀 적이 있다. 내게 청청은 끔찍한 폭력의 상징이라서 명명도 실제 착장도 보기가 편하지 않다. 대단한 희생과 피해를 감수하면 산 당사자는 아니지만, 한국근현대사를 필수과목처럼 배우며 살았다. 그래서 정말 역사가 된 줄 알았다. 그런데...

 

뇌가 이해를 못했다. 뭐라는 거니... 계엄?! 환시를 보고 환청이 들리는 건지, 가짜뉴스인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친구들 연락이 들이닥치자 현실감도 함께 찾아왔다. 바로 국회로 달려 간 가족 때문에 벌써 울고 있는 친구, 나처럼 일종의 쇼크 상태로 멍해진 친구, 분노에 차서 내란 수괴는 사형이라고 해당 법령을 찾아 알려주는 친구... 그 밤이 어떻게 지났는지.. 기억 속에서도 혼란스럽다.

 

총성, 핏방울, 쓰러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휴대폰 화면을 통해 그대로 전송되었다.”

 

신경이 찢어질 듯 긴박하고 결정적인 그 밤이 지나 계엄은 해제되었지만, 수면도 정신도 챙길 새가 없이, 재시도를 막고 제대로 처벌하며 사회 공동체를 지키고 바꿔나갈 거대한 일은 막 시작되었다. 202412, 겨울이 더 깊어지는 계절에.

 

지금은 20264월이다. 재판()은 아직 진행 중이고, 명명백백하게 내외란 음모를 다 밝히고 있는 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민주적 절차를 통해 선출한 자들의 온갖 헛소리를 매일 들어야 하는 악몽 같은 시간도, 기세등등하던 다종다양한 불법 세력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게 된 것도 다행이다.



 

연대하는 동지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소설이라서 현실보다 더 무서웠다. 고문과 살해 장면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며 겨우 읽었다. 그리고 계엄의 밤 이전부터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오래전부터 싸우고 있었던이들을 다시 떠올렸다. 이 정부는 어떤 기대들을 배반하지 않을 것인지 배반할 것인지도. 사는 일이 곧 저항인, 그래도 계속해서 좀 더 좋은 날을 기다리고 만들어 나가는 이들을 떠올렸다.

 

밀도 높은 시절을 사느라 우리 모두 힘이 들지만, 이런 기회가 흔한 것은 아니니까, 부디 미래를 위한 설계를 제대로 잘 해나가길 조마조마하게 지켜본다. 그리고 그 설계도에 따라 삶의 실질적 풍경을 바꿀 지역 정치의 지형도와 내용도 바뀔 수 있길 기대한다. 그 모든 희망과 변화의 주체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꼭 해치우면서.

 

투쟁은 헌법에 보장된 권리이지만 내가 지키기 않으면 빼앗기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란이 나에게 남긴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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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 강순희 말하고 유시민 듣다
유시민.김세라 지음 / 은빛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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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산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에요. 우리나라 역사가 이렇게 흘러왔다는 걸, 국민들이 이렇게 고생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예요.”

 

특별하다. 기쁘다. 오랜만에 이런 기백*을 느끼는 분이 살아 낸 삶을 들었다. 왕조 말기, 식민지, 내전, 독재, 폐허, 가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재난을 그토록 단시간에 겪으며 살아낸, 내 조부모님 세대의 이야기를 다시 만난 듯했다. *기백氣魄: 씩씩하고 굳센 기상과 진취적인 정신. 몸 백

 

그래서 천천히 아껴 읽었다. 그럴 수 있게 정성스럽게 자료 조사와 각주을 달아주어 감사하고 큰 도움을 받았다. 자신의 삶을 우리 역사를 적은 일이라고 선명하게 인식하는 분, 대단한 성취를 해내서가 아니라, 가족사와 개인사도 민족사라고 증언하는 분이라서 읽는 동안 나 역시 역사적 동참을 하는 기분이었다.

 

역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는 게 다 역사예요. 우리가 지금 이렇게 만난 것도 다 역사가 되는 것이지요.”

 

생전에 할머니께 듣던 다양한 여자들의 이야기를 지면에서 다시 만나 기분이 들고, 그렇게 자긍심도 집요함도 끈기도 용기도 큰 존재들이 있었다는 걸 오래 잊고 산 기분도 든다. 우리 가족들이 남편 살려 달라고 호소하기만 한 게 아니라 그놈들이 조작한 걸 모두 파헤쳤어요라고 자부심을 느끼는 동료 시민을 만난 감사도 크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되지 못한, 발치도 못 미치는 나이만 먹은 나를 돌아보게 된다. 어째 이럴까... ... 게으르게 산 것도 아닌 듯한데... 기대 수명에 기댄 변명을 오늘의 다짐처럼 기록해보다. 어쩌면 나도 여한이 없다고 느낄 생의 마지막 시간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나한테 주어진 것으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았어요. 아무 여한이 없어요. 아무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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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 1등급 고미정이 망하면 우리학교 소설 읽는 시간
우신영 지음 / 우리학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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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 고시라 불리는 영어 레벨 테스트를 앞둔 유치원생부터 암소고시를 준비하는 초등학생들까지, 10월이면 이 골목은 키즈 카페가 되었다.”

 

초가공 식품으로 채워진 매대에서 고르고 삼킬 짧은 시간, 제한된 선택의 자유만 누리고 사는 아이들, 그건 거대한 식품 산업과 허술한 사회 시스템이 합작한 삶의 풍경이다. 식사만 그런게 아니라, 나머지 시간은 지옥 같은 입시 공부에 시달린다. 단 한 번의 실패가 남은 삶을 결정한다는 무서운 협박에 익숙해진 채로.

 

K- 뭐뭐뭐 등이 찬란하게 각광 받을 때마다, 고통 속에 살아가는 한국 사회의 어린이들 생각을 한다. 이런 세상에서 소위 어른들이 참 무감하구나,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부족하구나. 그건 내가 사랑하는 십 대 두 명이 늘 겹쳐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건 거듭되는 악몽처럼 멈추지 못한, 그래서 십대들을 망가뜨리고 죽게 만드는 한국 사회의 성장과 성공의 방식에 대한 깊은 불만과 고민이다.



 

제목보다는 덜 서늘하고 더 생동감이 있고 더 다정한 내용이라서 읽을수록 안도감이 퍼진다. 작가가 아이들을 염려하며 보내는 간절한 기도처럼, 이토록 척박한 토양에서도 이야기 속 아이들은 말랑하고 따뜻한 우정을 피워내고 나눈다. 소설이라서 아쉽고 동시에 소설이라서 누군가의 상상력과 희망에 더 다채로운 불을 피울 수 있을 거란 기대가 함께 든다.

 

꿈 없음, 그러니까 무몽증(無夢症)은 이 동네 아이들 사이에 도는 전염병이었고, 대치동은 무몽동이었다.”

 

63일은 전국동시지방선거일이다. 지자체장과 교육감을 새롭게 선출한다. 삶의 뿌리를 더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는 국회위원이나 대통령선거보다 더 중요한 선거일 수 있다. 지자체와 교육시스템은 한국에서 가장 깊고 크고 멀리 보는 공동의 고민과 계획 재정립이 필요하다.

 

그 기회가 대치동으로 상징되는, 4세부터 잠을 줄이고 시험을 마주하는, 한국의 교육 풍경과 일상의 풍경과 굳은 인식을 바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저항과 관성이 한반도 지각 변동에 버금갈 것 같지만, 절망을 반복할 새 이유는 없다. 파란만장해서 더 선명한 이 이야기를 통해 어른 독자도 청소년 독자도 변화를 바라게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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