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가라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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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쪽으로 바람이 분다, 가라, 기어가라, 기어가라, 어떻게든지 가라.”

 

2010년에는 어떻게 읽었는지 기록 한 줄도 없다. 덕분에 처음인 듯 새 책 사서 읽을 생각이 들었다. 올 봄에는 비가 올 때마다 방향 모를 강한 바람도 함께 왔다. 봄비 풍경이 이랬는지 이런 건지... 기억을 믿지 못하니 생경함만 더 크다.

 

곧 날이 무더워질 계절이니 서늘한 미스터리(?)가 더 반갑다. 상념도 체념도 냉각이 필요한 때다. 아직도 어쨌든 어떻게든지 살아가야할 시간.

 

내 말들로 그의 말에 부딪칠 거다. 부서질 거다. 부술 거다. 조각조각 부수고 부서질 거다.”

 

읽는 내가 변하니, 대개 같은 작품도 시간이 지나면 다르게 읽히는데, 이 작품은 처음과 비슷한 무게로 시선을 잡아당긴다. 고정시킨다. 퀴즈 풀 듯 전개를 따라 달려서 결말에 이르곤 했던 다른 미스터리 작품과는 여전히 다른 밀도의 시간이다.

 

죽음이 그렇고, 그 죽은 이를 살려 말하게 하는 일이어서 그렇고, 그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다 듣고 싶어서 그렇다. 이제야 겨우 육친의 죽음으로부터 주저앉지 않을 정도의 힘을 그러모아서 그럴 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죽음이 한번 뚫고 나간 삶의 구멍들은 어떤 노력으로도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을. 차라리 그 사라진 부분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아 익숙해지는 편이 낫다는 것을 그때 나는 몰랐다.”



 

여전히 함께 묻히고 싶은 책의 문장들이 가득 등장해서, 덕분에 잊고 살고 싶었던 거대한 공간이 주는 막막함과 덧없이 찰나 같은 생명이 서글프다. 사실이든 진실이든 실체든 진짜를 마주하는 일은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든다.

 

눈을 감고 오래 자고 싶어서 깊은 밤이 아까운 날도, 눈을 감지 않고 혼자 깨어서 온전히 누리고 싶은 어두운 밤이 간절한 날도, 이 책의 문장들이 나 대신 뒤척이고 어두워지고 잠들고 깨어나는 듯했다. 읽는 내내 든든했다.

 

시간이 무한히 느려지는 이런 밤에, 기억들은 스스로 살아나 움직인다. 부서진 조각들이 서로 부딪치며 나아간다. 끝나지 않는 돌림노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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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에 잊힌 사람들
발레리 페랭 지음, 장소미 옮김 / 엘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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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전임에도 빨리 읽고 싶어서 참지 못하고 신청한 가제본. 삶의 끝자락이 아주 먼 일은 아니다. 내가 만날 풍경은 어떨까 싶네... 일단 재밌게 읽어야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두 가지가 있다. 바로 음악과 노인이다.”

 

짐작이 틀릴수록 작품이 더 재밌게 느껴진다. 에세이 주제로 더 잘 맞는 소재가 아닐까 싶었는데, 큰 착각이었다. 새로운 누군가를 만났는데, 나와 너무 달라서 조심스러웠다가, 매력에 홀려 하루 종일 그 사람 얘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장편 소설의 재미를 지극하게 느낀 행복한 시간이었다.

 

20대의 나는 이 어수선하고 거의 모든 게 미정인 시간이 빨리 지나길 바랐지만, 지금은 아무리 엉망이라도 20대의 체력이 부럽기만 하다. 한국의 극악한 노동 조건과 달라서일까. 낮에 요양 보호사로 일하고 밤에 책 읽고 토요일이 춤추러 가는 화자를 한없이 부러워하며, 그래서 더 귀 기울여 읽었다.

 

나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추위를 느껴본 적이 없다. 우리 집 온도는 절대 40도 밑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의 기억은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다.”

 

한 생의 대부분을 산 사람들의 시공간에 오래 머무는 직업이란, 관찰과 기록을 세밀하게 다듬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들을 방문하거나 방문하지 않는 젊은이들과의 대비가 에 대한 숙고를 더 선명하게 벼리기도 한다. 사람은 과연 어느 시점부터 늙는 걸까... 나는 언제부터 내가 늙었다고 이토록 익숙하게 받아들이게 될 걸까... 덕분에 잠시 돌아보았다.

 

오르탕시아 요양원 지붕에도 새가 한 마리 있다고, 아마 그 새가 엄청난 이야기, 내가 파란 공책에 쓴 것과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지 모른다고 말하고 싶다.”

 

새를 무서워하지만, 이 작품에서 새가 설정된 방식이 좋다. 오래 전 타국에서 낯선 집시 여인이 내게 spirit animal이 무엇인지 알려주겠다고 했을 때도 반갑기만 했다. 모두가 모두를 오해하며 사는데, 날 때부터 지정된 내 편이 있는 건 뭉클한 일이다.

 

화자가 둘이고 스토리 두 개의 무게도 비슷하다. 그래도 전혀 헷갈리지 않고, 두 개의 미스터리를 번갈아 즐기듯 전개를 고대하고 탐닉했다. 생각한 대로 말하지 않고, 입을 닫고, 침묵 뒤에 숨은 모든 비밀이 결국엔 수렴되어 환하게 드러나는 그 순간에 이르는 필력이 신비롭다.

 

돈을 훔치듯 사람을 훔쳐도 되는 걸까? (...) 내 삶은, 내 삶의 주소는 어디일까? 이게 과연 삶일까?”

 

내 질문들에 답을 줄 통계는 존재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종종 몹시 궁금하다. 한 사람만 혹은 그 사람만 사랑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인지, 사람도, 집도, 일도, 뭐가 되었든 떠나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는지, 눈에 보이지 않고 존재한 적 없는 것을 믿는 의지는 무엇인지, 여전히 낙관할 수 있는 순진함은 무엇인지.

 

몇 개의 사소한 오타를 제외하고는 전혀 아쉽지 않은 가제본이었다. 장편 소설의 세계에 푹 빠져드는 시간을 아주 좋아하는데, 아주 오랜만인 듯해서 살 것 같았다. 그렇게 까진 기대하지 않았는데, 완벽한 도피처까지 되어 주어서 고맙다.

 

왜 항상 우리가 기대하는 일들은 우리가 그것을 더 이상 기대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것일까? 왜 모든 것이 결국 타이밍의 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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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사박물관이 세계를 구하는 법 - 대멸종의 시대, 자연의 기억보관소가 들려주는 전시실 너머의 이야기
잭 애슈비 지음, 제효영 옮김 / 김영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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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친구가 권해서 가게 된 런던 자연사 박물관, 원형처럼 박제 복원한 생물들은 보기가 슬퍼서, 골격 구조만 남은 생물들을 한참 보았다. 규모가 커서 평생 다녀야 다 볼 수 있을 듯했다. 그땐 생각해보지 못한 기록의 필요와 의미에 대해서 처음으로 배워 볼 기회다.

 

자연사박물관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존한 장소가 아니라, 인간 사회의 시선과 권력, 기술과 제약 속에서 자연을 선별해 저장해온 장소다.”

 

유익하고 진중한 분위기의 글일거라 생각했는데 그렇기도 하지만 아주 재밌다. 불쾌하거나 불편하지 않게 전하는 기술과 중요한 것들을 놓치거나 빼놓지 않는 능력이 절묘하게 결합한 글이다. 너무 쉽고 빠른 지적보다는 차분하게 역사를 함께 살펴 이해하는 과정이 멋진 강의 같다.

 

새롭게 배운 점들은 너무나 많다. 극히 일부만 소개할 수 있어서 안타깝기만 하다. 박물관이 전시와 보존을 위한 공간이라는 이해를 덕분에 바꿨고, “자연을 대변할 사람들을 길러내는역할까지 가능하다는 점이 기쁘다. 물론 박물관을 만드는 사람들이 편향적이고 정치적이며 대체로 그리 과학적이지 않아서, “박물관이 해석한 자연에는 편향과 정치가 녹아 있다는 것을 정확히 이해한 후에만 긍정이 가능하다.

 

자연사박물관이 처음부터 전시를 목적으로 표본을 수집하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 수장고에 있는 표본은 관람객들의 기대에 부응하기보다는 연구에 더 적합하도록 처리되고 보관된다.”

 

선명한 기억은 아니지만, 어릴 적부터 보아온 여러 전시에서 나는 - 우리는 - 갖가지 편향적 사고가 반영된 모습들을 만났을 것이다. 그 내용들을 책을 통해 함께 짚어보고, 비전공자로서 잘못된 과학 지식을 바로 잡고, 다른 생물들의 생태를 새롭게 배우는 시간도 즐겁기만 하다.

 

또한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된 - 전시에 적합한 - 생물종의 생태적 기능이 전시되지 않거나 배경으로 처리되는 다른 생물종보다 크지 않거나, 오히려 후자들의 기능이 인간의 생존에 결정적이라는 반전 내용들을 배우고 기억하는 일이 중요하다. 현실적이고 현재 진행형이며 미래에 영향을 끼칠 과학 지식이다.

 

건강한 지구 생태계에 막대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식물과 균류는 자연사박물관 전시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곤충 생물량이 "해마다 2.5퍼센트씩 줄고 있는지, 그렇게 심각한 상황인지 몰랐다. 지독하게 고단한 일상에 매몰되어 살다보니, “생물서식지의 문제와 총체적인 이해 같은 것을 잊고 산다. 윽박지르거나 비난하지 않는 재밌는 이 책이, 간과한 많은 것들을 조목조목 상기시켜주어 고맙다.

 

순수를 내세우거나, 그 기준으로 분류하고 배격하는 이들을 늘 경계하며 살았다. 혼자 살 수 없는 생명체가 함께 살기 위해 고안된 시스템과 깔끔하게 분리되어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이해 부족이나 무지에 대한 무지거나 혹은 의도된 프로파간다라고 간주했다.

 

사실 과학도 문화의 한 부분이다. 과학계가 던지는 질문은 특정 시대와 지역의 사회적 규범, 정치, 우선순위, 금기시되는 것의 영향을 받는다.”

 

객관과 논리를 존립 조건으로 삼은 과학 연구도 마찬가지다. 거칠게 말하자면, 연구비 지원이 없는 어떤 연구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엇도 완전무결할 수 없다면, 가능한 최선은 인간도 인간의 모든 행위도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잊지 말고, 그로부터 신중하게 고갱이를 골라내는 일일 것이다.

 

읽기 전에 제목을 보고 피식 웃었는데, 지금은 자연사박물관이 어떤 한 방식으로 세계를 구하는 장면이 몹시 기대된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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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시인선 52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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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종교인들은 많지만, 종교는 가져본 적 없다. 그래도 기도하는 방법은 시인에게 배웠다. 걷기 명상을 좋아하니, 걷다가도 문득 기도할 수 있는 이 방법이 좋다. 살아갈수록 모르는 것만 더 많아진다는 슬픔을 나눌 형편이 아닐 때는 더 좋다.

 

2014년에 처음 배웠으니 어느새 12년차 기도쟁이가 되었다. 문득 낯설고 익숙하기도 한 것이 삶 자체와 닮았다. 봄꽃들이 진 자리마다 봄이 왔다 감, 이라고 적혀 있다. 남은 꽃잎들이 더 적은 하늘 어디에서, 다시 꽃잎 하나가 떨어진다. 기도하고 싶은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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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 시가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라고 묻곤 했다. (...) 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

 

존경하는 친구가 말했듯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관(世界觀)이 아니고 세계감(世界感)이다. 세계와 나를 온전하게 느끼는 감성의 회복이 긴급한 과제다. 우리는 하나의 관점이기 이전에 무수한 감점(感點)이다.”

 

이렇게 모아놓은 조금은 낯선 낯익은 이야기가, 오래된 기도 같은 이야기가 다른 삶,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사람들과 손을 잡았으면 한다.”

 

2014년 봄 이문재 시인의 말 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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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단
정보라 지음 / 상상스퀘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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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속에서 계엄군은 대화나 협상이 통하지 않았다. 군인들은 종이 피켓 한 장을 손에 들고 거리에서 행진하는 사람들에게 실탄을 발사했다.”

 

청청이 패션이라는 말에 격세지감(?)을 크게 느낀 적이 있다. 내게 청청은 끔찍한 폭력의 상징이라서 명명도 실제 착장도 보기가 편하지 않다. 대단한 희생과 피해를 감수하면 산 당사자는 아니지만, 한국근현대사를 필수과목처럼 배우며 살았다. 그래서 정말 역사가 된 줄 알았다. 그런데...

 

뇌가 이해를 못했다. 뭐라는 거니... 계엄?! 환시를 보고 환청이 들리는 건지, 가짜뉴스인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친구들 연락이 들이닥치자 현실감도 함께 찾아왔다. 바로 국회로 달려 간 가족 때문에 벌써 울고 있는 친구, 나처럼 일종의 쇼크 상태로 멍해진 친구, 분노에 차서 내란 수괴는 사형이라고 해당 법령을 찾아 알려주는 친구... 그 밤이 어떻게 지났는지.. 기억 속에서도 혼란스럽다.

 

총성, 핏방울, 쓰러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휴대폰 화면을 통해 그대로 전송되었다.”

 

신경이 찢어질 듯 긴박하고 결정적인 그 밤이 지나 계엄은 해제되었지만, 수면도 정신도 챙길 새가 없이, 재시도를 막고 제대로 처벌하며 사회 공동체를 지키고 바꿔나갈 거대한 일은 막 시작되었다. 202412, 겨울이 더 깊어지는 계절에.

 

지금은 20264월이다. 재판()은 아직 진행 중이고, 명명백백하게 내외란 음모를 다 밝히고 있는 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민주적 절차를 통해 선출한 자들의 온갖 헛소리를 매일 들어야 하는 악몽 같은 시간도, 기세등등하던 다종다양한 불법 세력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게 된 것도 다행이다.



 

연대하는 동지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소설이라서 현실보다 더 무서웠다. 고문과 살해 장면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며 겨우 읽었다. 그리고 계엄의 밤 이전부터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오래전부터 싸우고 있었던이들을 다시 떠올렸다. 이 정부는 어떤 기대들을 배반하지 않을 것인지 배반할 것인지도. 사는 일이 곧 저항인, 그래도 계속해서 좀 더 좋은 날을 기다리고 만들어 나가는 이들을 떠올렸다.

 

밀도 높은 시절을 사느라 우리 모두 힘이 들지만, 이런 기회가 흔한 것은 아니니까, 부디 미래를 위한 설계를 제대로 잘 해나가길 조마조마하게 지켜본다. 그리고 그 설계도에 따라 삶의 실질적 풍경을 바꿀 지역 정치의 지형도와 내용도 바뀔 수 있길 기대한다. 그 모든 희망과 변화의 주체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꼭 해치우면서.

 

투쟁은 헌법에 보장된 권리이지만 내가 지키기 않으면 빼앗기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란이 나에게 남긴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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