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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에 잊힌 사람들
발레리 페랭 지음, 장소미 옮김 / 엘리 / 2026년 5월
평점 :
출간 전임에도 빨리 읽고 싶어서 참지 못하고 신청한 가제본. 삶의 끝자락이 아주 먼 일은 아니다. 내가 만날 풍경은 어떨까 싶네... 일단 재밌게 읽어야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두 가지가 있다. 바로 음악과 노인이다.”
짐작이 틀릴수록 작품이 더 재밌게 느껴진다. 에세이 주제로 더 잘 맞는 소재가 아닐까 싶었는데, 큰 착각이었다. 새로운 누군가를 만났는데, 나와 너무 달라서 조심스러웠다가, 매력에 홀려 하루 종일 그 사람 얘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장편 소설의 재미를 지극하게 느낀 행복한 시간이었다.
20대의 나는 이 어수선하고 거의 모든 게 미정인 시간이 빨리 지나길 바랐지만, 지금은 아무리 엉망이라도 20대의 체력이 부럽기만 하다. 한국의 극악한 노동 조건과 달라서일까. 낮에 요양 보호사로 일하고 밤에 책 읽고 토요일이 춤추러 가는 화자를 한없이 부러워하며, 그래서 더 귀 기울여 읽었다.
“나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추위를 느껴본 적이 없다. 우리 집 온도는 절대 40도 밑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의 기억은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다.”
한 생의 대부분을 산 사람들의 시공간에 오래 머무는 직업이란, 관찰과 기록을 세밀하게 다듬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들을 방문하거나 방문하지 않는 ‘젊은’ 이들과의 대비가 ‘삶’에 대한 숙고를 더 선명하게 벼리기도 한다. 사람은 과연 어느 시점부터 늙는 걸까... 나는 언제부터 내가 늙었다고 이토록 익숙하게 받아들이게 될 걸까... 덕분에 잠시 돌아보았다.
“오르탕시아 요양원 지붕에도 새가 한 마리 있다고, 아마 그 새가 엄청난 이야기, 내가 파란 공책에 쓴 것과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지 모른다고 말하고 싶다.”
새를 무서워하지만, 이 작품에서 새가 설정된 방식이 좋다. 오래 전 타국에서 낯선 집시 여인이 내게 spirit animal이 무엇인지 알려주겠다고 했을 때도 반갑기만 했다. 모두가 모두를 오해하며 사는데, 날 때부터 지정된 내 편이 있는 건 뭉클한 일이다.
화자가 둘이고 스토리 두 개의 무게도 비슷하다. 그래도 전혀 헷갈리지 않고, 두 개의 미스터리를 번갈아 즐기듯 전개를 고대하고 탐닉했다. 생각한 대로 말하지 않고, 입을 닫고, 침묵 뒤에 숨은 모든 비밀이 결국엔 수렴되어 환하게 드러나는 그 순간에 이르는 필력이 신비롭다.
“돈을 훔치듯 사람을 훔쳐도 되는 걸까? (...) 내 삶은, 내 삶의 주소는 어디일까? 이게 과연 삶일까?”
내 질문들에 답을 줄 통계는 존재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종종 몹시 궁금하다. 한 사람만 혹은 그 사람만 사랑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인지, 사람도, 집도, 일도, 뭐가 되었든 떠나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는지, 눈에 보이지 않고 존재한 적 없는 것을 믿는 의지는 무엇인지, 여전히 낙관할 수 있는 순진함은 무엇인지.
몇 개의 사소한 오타를 제외하고는 전혀 아쉽지 않은 가제본이었다. 장편 소설의 세계에 푹 빠져드는 시간을 아주 좋아하는데, 아주 오랜만인 듯해서 살 것 같았다. 그렇게 까진 기대하지 않았는데, 완벽한 도피처까지 되어 주어서 고맙다.
“왜 항상 우리가 기대하는 일들은 우리가 그것을 더 이상 기대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것일까? 왜 모든 것이 결국 타이밍의 문제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