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의 꽃 - 내 마음을 환히 밝히는 명화 속 꽃 이야기
앵거스 하일랜드.켄드라 윌슨 지음, 안진이 옮김 / 푸른숲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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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손이 닿지 않아도 절로 마르며 지난해를 마감한, 자줏빛 천일홍 꽃송이를 옆에 두고 천천히 읽다보니, 청보랏빛 히아신스 두 송이가 만개했다. 책과 함께 사진에 담은 몇 초 동안 정신이 비틀거릴 만큼 향이 진하다.





 

아름다운 책을 만나 알아가는 동안 내가 속한 인간 사회는 소란과 요란을 거듭하며 결정적이고 전환적인 사건들을 차례로 맞았지만, 꽃향기에 잔뜩 취해서인지, 꽃이 피는 사건보다 더 놀라운 일은 아니었던 듯싶기도 하다.

 

약속을 지키기보다 어기는 경우가 더 많고, 아름답기보다 난감하도록 추한 결과도 많고, 인간 사회의 풍경은 그런데, ‘꽃이 핀다는 건 아주 다르다. 조건이 딱 맞으면 알람이 울리듯 피어나는데 아름답지 않은 적이 없다.

 

SUMMER SNOWFLAKE

RESEMBLES A GIANT

SNOWDROP,

FLOWERING IN SPRING -

NEVER SUMMER.

 

서머스노플레이크는

자이언트스노드롭을 닮았지,

봄에만 피어나고 -

여름엔 절대 피지 않아.

 

애나 앳킨스, <레우코줌 바리움>

Anna Atkins, Leucojam Varium, 1854



 

화구를 찾아내어 뭐라도 그리고 싶게 만드는, 위험하고 고혹적인 그림들을 하나하나 한참 바라본다. 예술가들이 매혹된 이야기들, 사랑에 빠진 채 작업한 이야기들, 다양한 종류의 꽃에 끌려나오는 내 기억 속 이야기들.

 

특히 이번 산불에 타버렸다는, 종가의 목련과 모란과 작약과 사과나무를 애도하며, 아직 살펴보러 가지 않은 나를 채근하며, 자연의 사계절도 예술작품 속 사계절도 내 사계절도 담긴, 그림 속 꽃들 속의 기억 속 꽃들을 가만 본다.





 

때론 나보다 오래 살 것이라 부러워했던 꽃나무들은 분명 경이롭게 자력 재생할 것이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서는 사라질 일 없는 그 꽃들을 - 피워낸 생명력을 - 믿고 나는 곧 부모님 본가와 친지들을 뵈러 갈 것이다.

 

그 길에는 이 책에서 만난 화가의 꽃들이, 다채로운 빛과, 경험과 상상으로 재구성한 향기로 동행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더 많은 꽃들을 알아보고 반가워하게 될 새 봄과 여름을 설레며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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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은
파올라 퀸타발레 지음, 미겔 탕코 그림, 정원정 외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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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서 반짝이며 사라져가는, 모든 날들의 수많은 순간들을 아름답게 포착한 시선일 거란 기대. 문득... 마음껏 게을러도 나른해도 되는, 약속도 책임도 알람도 없는 하루가 이제는 이룰 수 없는 소원 같다.

 

느긋한 위안과 잔잔한 감동을 기대하고 펼쳤는데 시험에 들게 되었다. 짧은 한 줄 문장이 피하지 못할 질문 같다. 이게 만약 시험문제들이었다면 나는 낙제다. 제대로 온 힘을 다해 살지 않는 피상적인 삶을 들킨 듯 허둥거렸다.

 

심신이 무탈한 어떤 날이 언제였는지, 흐릿한 기억을 뒤져봐도 또렷해지는 하루가 없다. 삶을 견디는 비법 같은 건 없이 심호흡과 산책으로 얼마나 관리 가능할지 모르겠다. 화가 병이 되어 고달픈 친구들이 적지 않아 더 힘겹다.

 

이런 날을 마주하게 된 것은, 얇고 단단하고 노릇한 이 그림책이 제안한 것들을 하지 못한 자업자득인걸까. 두려움 앞에 마주 선 시간이 모자라서, 기억해야할 이들을 잊고 살아서, 끝까지 알아내려하지 않아서, 꺼내야할 진실을 꺼내지 않아서.




 

삶은 가차 없어서, 이제 알겠다 싶을 때는 이미 늦은 거라고, 늦었다 싶을 때는 너무 늦은 거라고 하던데……. 회한을 놓아 주고 반복하지 않기 위해 다시 뭐라도 해보면, 누구의 어떤 날도 무탈하고 어떤 밤도 편안하게 될까.




 

너무 잠이 오거나 너무 잠이 안 오거나 하는 모든 이들의 휴식을 간절히 바라고 싶은 밤이다. 3월의 마지막까지 봄의 노래는 들리지 않았다. 내일이 4월이고 1일이라는 것이 불쾌한 농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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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한다는 착각 - 나는 왜 어떤 것은 기억하고 어떤 것은 잊어버릴까
차란 란가나스 지음, 김승욱 옮김 / 김영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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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증을 넘어 슬슬 두려워지는 나이, 지금이야말로 기억의 메커니즘을 더 잘 배워보고 싶은 때.




 

기억하는 자아는 우리가 내리는 거의 모든 결정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항상 그리고 심오하게 현재와 미래의 형태를 만들어간다.”

 

이 책은 기억에 관한 오래된 질문과 최근에 더 절박해진 질문 모두를 잘 설명해준다. 기억, 망각, 오해, 편향, 상상, 망상, 오류 등의 단어들보다, “재구축이라는 개념이 인간 뇌의 상상력과 결합하니 많은 게 더 선명해진다.



 

외부환경과 유입자극이 끊임없이 변하는 환경에서 생존하자면, 당연히 뇌는 그 변화에 대응할 수 있도록 변형이 쉬워야 한다. 예외 없이 올바른 상대와 연결되는 것이 불가능하니, 이 능력이 곧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물론 인간이 주의력의도에 충분히 집중한다면, 어지러운 머릿속을 일부 정리할 수도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즉각적으로 잘 작동하는 능력은, 중요도에 따라 정보를 정리하는 망각의 능력이다. 즉 망각이 기억의 실패는 아니다.

 

우리가 서로 협력하며 개인적인 기억과 집단적인 기억을 끊임없이 재구축하고 갱신하기 때문에 (...) 우리는 이 (...) 기억을 렌즈 삼아 세상에서 자신이 처한 위치를 바라보며,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와 화해한다.”

 

뇌의 가소성이 평생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인간이 정보와 상상력을 동시에 활용하는 기능은, 과거의 고통을 갱신해서, 그 과거를 보는 시각을 바꾸어, 현재 삶을 참을 만하게 바꾸기도 한다.



 

사회적 동물로서 사회 생태계에서 상호 작용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의미학습과 반복 노출로 인해 누구나 가짜뉴스()의 신봉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만나 배운 것처럼, 기억의 메커니즘에 관한 연구 결과가 더 일반적인 상식이 되면, 잘 알려지면, 각자가 처한 상황을 새롭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설명도 대화도 좀 덜 감정적이고 더 선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품어본다.

 

기억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이면서 (...) 스스로를 해방시킨 뒤 오히려 과거를 안내인 삼아 더 나은 미래로 향할 기회를 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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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와 거장 - 위대한 창의성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데이비드 W. 갤런슨 지음, 이준호 외 옮김, 박성원 감수 / 글항아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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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 역시 세잔의 최고의 해는 67, 피카소의 최고의 해는 26세라고 보고 있다.”

 

예술가의 생애나 예술 작품 관련 책들은 늘 관심 있게 읽는 편이지만, 이 책은 처음 접하는 방식의 연구 주제와 내용을 다룬다. 이런 식의 분류와 통계와 이론 도출이 낯설고 그 시선이 재미있어서 흥미롭게 읽었다.

 

한국사회에서는 흔히 암기력과 창의성이 대척되는 능력인 것처럼 교육 이슈로 다루어지지만 그렇게 다룰 문제는 아니라고 늘 생각했다. 저자는 가설을 세우고 방대한 수집 연구를 통해 분석하고 패턴을 찾는다.

 

예술가의 사고 과정을 보여주는 것들은 때때로 완성된 작품보다 더 흥미롭다”* * 솔 르윗, 1967



 

통계 경제학의 방식은 대개 즉자적 흥미를 끌진 못하지만, 대상이 예술가들 - 화가, 조각가, 시인, 소설가, 영화감독 - 이라서, 그들이 창의성을 활용하는 방식과 그 결과인 예술 작품들을 생애주의를 통해 다시 보는 전개가 재밌다.

 

배경 지식이 없어서, 자세하고 정확한 소개는 어렵지만, 피카소로 대표되는 개념적 혁신가와 세잔으로 대표되는 실험적 혁신가의 분석 내용을 자세히 정독하고 싶은 독자에게는 매력적인 연구다. 경제학 책이나, 예술가가 겪는 창작의 불안과 고백과 마침내 창의성이 발현하는 순간들은 늘 그렇듯 극적이다.

 

실험적 혁신가는 찾고 개념적 혁신가는 발견한다.”



 

흔히 천재나 거장은 한 명의 인물로 언급되지만, 그 인물이 이루어낸 예술적 혁신은 결국 고립된 천재한 명의 성과가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 인간의 유의미한 행위는 늘 협력에 기반을 둔다는 것을 이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저자의 제안처럼, 한국 사회에서도 창의성에 관한 이런 차이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 좋겠다. 창의성을 높이는 예술에 무게를 더하는 교육 변화나, 예술 분야가 아니더라도 학습하고 학문을 발전시키는데 활용되는 미래를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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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개자식에게
비르지니 데팡트 지음, 김미정 옮김 / 비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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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스한 개자식보다 훨씬 강렬한 놀라움일 듯, 이 제목 아래 담긴 내용이 너무나 궁금하다.


도서제공: 비채


 

우리 언제 만나요. 당신 말이 맞아요. 편지 속이 좁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최강 변론처럼 들리는 소통방식의 소설이다. 밑줄을 긋거나 필사하거나 메모를 첨부하고 싶은 문장이 가득하다. 억측과 거짓과 왜곡과 그 무엇도 신경 쓰지 않는 악랄함이 너무 시끄럽다. 입을 열면 욕이 튀어나올 듯한 감정 격변을 달래는 중에 정제된 작가의 글을 읽는 것은 치료 행위와 다를 바 없다.



 

듣지 않고 혹은 들을 여유가 없이 살다보면 누구의 목소리도 충분히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듣는 방법을 잊고 인내심을 잃는다. 말이 되든 안 되든 구호 같은 외침이 점점 더 커지고 호응을 얻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거침없이 솔직한 시선을 유지하는 것이 버거워서 놓아버린 선택이 기억났다. 그래서 나는 평안을 얻은 걸까. 겁쟁이에 게으른 편이라 생존 도모를 위한 에너지 배분이었다고 변명부터 또 하고 싶다. 여전히 개선의 여지가 없네.

 

우리를 인정하기를거부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요?”


대개 외모의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애석해하지만, 더 심각한 변화는 지성의 퇴보가 아닐까. 한 때 빛나던 이들의 황당하고 비겁한 언행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짐작해보곤 했다.

 

문화사대주의자라고 지적을 받아도 어쩔 수 없지만, 알코올 대신 진한 커피를 마시며, 밤새 혹은 몇날며칠을 새면서라도 자신의 생각을 타협하는 법 없이 토로하는 프렌치 필름을 감상한 듯하다.

 

뭘 해도 뭘 봐도 현실 도피에 실패하는 날들이었는데, 에라 모르겠다,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두고 빠져들어 탐독했다. 그동안 세상은 다 망하지 않았고, 현실은 강고하게 퇴행하고 있지만, 나는 언어의 힘을 더 독실하게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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