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평점 :
포장을 뜯고 첫 대면에 잠시 처지를 다 잊고 행복했는데, 아름다운 색감의 표지를 이렇게 어둡고 이상하게 찍었네... 빛의 작가와 여러 해 만의 조우다. 어떤 다정한 멜로디가 들릴까...
.....................................
“익숙한데도, 추우면 슬픈 기억에 잠식되는 건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어쩌면 추워서, 추운 것이 싫고 무서워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지도 몰랐다. 사진을 찍을 때는 빛이 모여들었으니까.”
그럴 거라고, 아니 그러면 좋겠다는 과욕 같은 기대를 가득 품고 읽기 시작한 경애하는 작가의 작품인데, 정말 그랬다. 흐리고 약하고 온기조차 품지 못할 듯 가는 빛들도 모두 어룽거린다. 그 모든 빛이 어둠의 밀도를 더해가던 내 심경에도 찾아들었다.
버거운 상례와 이어진 우환으로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 부친과의 이별도, 병환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하는 모친의 상황도, 정신이 하나 없는 와중에 결정하고 처리하고 떠맡은 상황 변화도 호흡을 무겁게 가로막지만, 그래서 이 작품과의 조우가 완전한 적시(適時)일 수 있었다.
“셔터를 누를 때 카메라 안에서 휙 지나가는 빛이 있거든. (...) 평소엔 잘 안 보이는 곳에 숨어 있겠지?”
어느새 한 달이 지나는 동안 속눈을 감고 지냈다는 걸 그 희미한 빛들을 만나고 깨닫게 된다. 괜찮은 척 버티며 엉망으로 사는 동안 큰 아이는 대입원서를 썼고, 꼬맹이는 이상한 문제로 가득했다는 전국모의고사를 치렀다. 이 환한 존재들이 나보다 더 굳건한 삶의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빛난다.
모티브가 카메라여서 완벽하게 좋았다. 물성과 실체가 인간에게 어떤 구체적 위안을 주는지 종이책으로 통해 매일 평생 절감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기능이 권은의 시선과 생각과 존재를 ‘밖’을 보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그 바깥에서 다른 이들을 오래 보고 살리는 방식으로 내 안의 나도 살리기 때문이다.
“죽음만을 생각하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사진에 담아 뭐든 쉽게 잊는 무정하도록 나태한 세상에 타전하고 싶다는 마음. 그들을 살릴 수 있도록, 바로 나를 살게 한 카메라로……”
진심은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세지만(그렇다고 믿기로 결심했다), 그 진심의 발로는 모든 계기로 이루어진다. 때론 당신의 그 진심을 촉발한 이유는 잊기도 한다. 그래도 그 진심의 힘이 고스란히 상대에게 전해지고, 세계 곳곳의 필요한 다른 이들에게로 퍼져나가기도 하기를.
나는 종교도 없으면서 경전을 펼쳐든 듯 읽는 내내 기도했다. 치기든 우쭐함이든 뭐였든 과거의 내가 내보인 작은 진심들도 부디 누군가에게 잠시 힘이 되었기를 기도했다. 대단한 일을 못해서 한껏 움츠러든 마음들이, 내가, 작은 호의를 내보일 힘을 잊지 않기를, 포기하지 않기를 기도했다.
추석이고 보름이고 밤도 두꺼운 구름도 빛을 다 가리진 못했다. 거기 있을 달을 바라보며, 수많은 이들이 오늘밤에 달을 향해 올린 기도와 노래를 생각했다. 사랑하는 누군가의 소원이 이뤄지도록 빌었을 마음을 생각했다, 어쩌면 일면식도 없고 만날 기회도 없을 이들의 비극을 아파했을 마음들을 생각했다.
현실에서도 문학 속에서도 ‘살리려는’ 빛과 멜로디가 가득한 세계를 이렇게 다시 만난다. 차분하고 아름답고 정성스러운 책을 자기 전에 꼭 껴안아 보았다.
“알마를 살린 장 베른의 악보와 권은을 방에서 나오게 한 카메라는 결국 사랑이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둘은 다른 사랑이지만 같은 사랑이기도 하다고, 한 사람에게 수렴되지 않고 마치 프리즘이나 영사기처럼 그 한 사람을 통과해 더 멀리 뻗어나가는 형질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그렇다고 덧붙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