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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취 없는 세계를 위한 생태정치학 - 사회적 생태론과 코뮌주의 선언
머레이 북친 지음, 서유석 옮김 / 동녘 / 2024년 8월
평점 :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심각한 생태파괴의 핵심에는 대부분 경제적, 인종적, 문화적, 성적 갈등이 있다.”
기후정의행진에서는 “기후가 아닌 세상을 바꾸자“고 명명한다. 이는 인간 생존에 적합한 환경을 제 스스로 망가뜨리는 ‘인간적 요소’들에 대한 확실한 자각이며 이해며 제안이기도 하다. 자연이나 지구를 구하자는 구호는 그렇기 때문에 문제 인식의 실패나 부족을 드러내며 공허하거나 무의미하다.
“생태문제는 다른 무엇보다도 인류 전체의 장기적 이해관계와 기업 권력의 이해관계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된다.”
인류는 문명 ‘사회’를 만들어 단일 거대 집단으로 성장했고, 무절제한 방식을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구조로 삼아, 자기파멸을 향해 부지런히 나가고 있다. 이미 기회는 놓쳤을지도 모르고, 이제야말로 제대로 된 변역을 위한 기회를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두려운 나의 간절한 희망사항).
“우리는 갈림길 앞에 서 있다, 하나는 생태계가 파괴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 전적으로 새로운 환경친화적 사회를 만들어내는 길이다.”
머레이 북친의 ‘사회적 생태론’은 “생태 위기가 사회적 요인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언한다는 점에서 나는 1990년대부터 공감하고 동의했다. 인간 사회의 “지배와 위계구조라는 사회관계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한다.
“계급사회보다 위계구조가 역사적으로 더 뿌리 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 설령 계급지배가 종식되고 경제적 착취가 사라진다 해도 정교한 위계구ㅗ와 지배 체계가 사라진다는 보장은 없다.”
다른 사회변화와 마찬가지로 이해 이후에 변화를 진실로 원한다면, 폐지나 해체와 재구성의 과정이 필연적이다. 문제는 이해의 확산과 더불어 그 여정을 현실로 만들어나갈 동력이다. 나는 대개 비관적이고 현실은 늘 나보다 낙관적이다. 당장 지난 주 기후행동에 모인 수만 명의 시민들이 희망이고, 광고와 소비에 거리낌 없이 동참하는 일상 풍경이 거대한 절망이다.
“자본주의는 이제 하나의 경제가 아니라 사회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자본주의는 한때 그것에 반대했던 의식마저도 이런저런 방식으로 자기 궤도 내로 흡수해버렸다.”
머레이 북친의 사상을 30년 만에 다시 만나 한글로 읽는 것은, 짐작보다 큰 위로와 의지가 되었다. 그가 해부하고 역설하고 강조하고 제시하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어쩌면 권력과 언론이 애써 비가시화시키는 것들이 전 세계에 점점 늘어나고 있는 30년이 아니었을까 행복한 꿈같은 희망을 번지게 한다.
“급진 변혁운동의 이면에는 언제나 공동체의 강한 유대가 있었고, (...) 시민 영역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급진적 실천에 있어 지역자치의 삶은 매우 중요하다.”
물론 다른 한편, 자본주의가 삶 전반을 장악하고 영향력을 넓혀나간 면면을 확인하는 일은 괴롭다. ‘트렌드’(따위가) 삶의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이 두렵다. 그럼에도 3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선명하게 기후문제(라고 불리는 인간사회의 문제)가 인지되고, 수많은 이들이 직접 행동에 나선다.
‘코민주의 정치’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내용들, ‘사랑philia’(사람들 사이의 연대)가 자리 잡은, 코민주의가 실현된 윤리학, 인간의 고유한 속성인 ‘자유’의 내용을 곱씹는다. 희망이 아니라 ‘과업’을 위한 동참을 위한 북친의 호소가 30년 전보다 더 뜨겁고 간절하게 들린다. “녹색의 멋진 신세계”가 아닌 미래가 당장 필요한 인류의 선택과 행동에 달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