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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닌 - 제2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하승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7월
평점 :
“이 피부색은 나를 계급의 가장 낮은 단계로 내려보낸다. 다수에 속해 있음이 정상성을 정의하는 세상에서 내 피부는 확연한 비정상이었다. 장애를 가진 것과 다름없었다.”
몇 달을 소설에 잘 몰입이 되지 않아서 드물게 읽었다. 지식과 경험도 적으니 작품을 평가할 능력은 없지만, 수상작 중에 내게는 최고로 강렬한 작품이다. 문학 체험 같기도 하고, 사회과학논문을 읽은 듯도 하고, 현대사 이슈들에 대해 작가와 신나게 토론한 듯도 하다. #최고
“인종주의가 인류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라는 거였지. (...) 인종주의는 사람들을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어. (...) 이 시스템은 열등한 타자를 등장시켜 차별을 합리화하고 있는데, 서로를 공격하느라 진짜 적이 누군지 생각하지 않아. (...) 효과가 있다니까. 언제나.”
뭐, 이렇게 실감나는 작품이 다 있는지 많이 놀랐다. 내가 만난 이 세계와 인물인데, 현실에 없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이런 것이 진정한 창조능력인가. 조금만 읽고 천천히 읽으려 했는데 놓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재일의 다음 여정이 궁금하고 염려되어 애가 탄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곳에 속할 수 있는 현자가 아니었다. 나는 개인이었다. 작고 어린 파란색이었다.”
30쪽이 넘는 밑줄을 긋고 필사를 한 뒤, 문학도 허구도 이겨먹는 기막힌 현실을 떠올렸다. 인간이 다 만들었는데, 어떤 인간들은 교묘하고 강력하게 이용해먹고, 다른 인간들은 목적도 결과도 상상조차 못한 채 휘둘려서 서로 죽고 죽이는 문명. 결국엔 공멸할 듯한 어리석음. 그런데 또 어떤 이들은 최고의 상상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선량한 이웃으로, 이상적인 존재로 살아간다.
“잔잔한 농담이 나를 찔렀다. 공기처럼 지나가는 경멸과 혐오가 나를 두들겼다, 흉터는 영혼에 남았다.”
바로 전에 읽은 흑인 소녀의 자전 소설 속 문장들과 같은 이야기를 만나서 망연했고, 더 이전에 읽은 사회학자의 탄식과도 같은 이야기를 만나서 불안감에 휩싸였다. 태어나보니 다수가, 정상이, 평범이 아니라서, 저주에 걸린 것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현실, 악당 한 명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듣지도 않는 시스템과 싸워야 하는 막막함.
“우리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였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서로를 공격하고 있었다.”
작년 어느 날에는 리얼리즘이 리얼리티를 못 이기는구나 생각했는데, 이 작품을 만나서 그동안 삼킨 말들을 한 번에 다 쏟아낸 듯 후련하기도 했다. 밑줄 그은 문장들을 아주 큰 소리로 읽고도 싶었다. #강추
“생각해봐요. 언젠가 (...) 피부색만으로 무지개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