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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번째 우주
김아영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4년 6월
평점 :
왜 512번째인지가 엄청 궁금하다.* 게다가 ‘시간의 비가역성’으로 논문 쓴 물리학 전공자라서, 불가능을 가뿐히 넘은 문학에 늘 관심이 크다. 재미는 물론이겠지만, 온갖 안타까운 감정들도 가득할까. 과거로 가고 싶은 가장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 8번째 세제곱수, 2번째 아홉제곱수. 다른 인물인 지수의 평행 우주는 536,870,912,623,489개다.**
** 제곱근을 계속 구하다보면 최종 ‘1’이 된다. 작가가 특별한 수학적 의미를 두고 찾은 숫자들인지 완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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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만 자전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잊고 있었다. 모든 천체가 각기 다른 방향과 속도로 움직이듯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궤도를 그리며 살아간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친척이 다른 우주에서 온 사람이라면. 취업도 주선해주고 덕분에 자신도 다른 우주로 넘나들 수 있게 되었다면. 선명하고 대립구조가 전형적이지 않은 설정의 SF문학이다. 대신 질문들이 깊다.
“그렇지만 곧 알게 돼요. 다른 선택을 했다 한들 그 이후의 삶도 내가 기대한 만큼 완벽하지 않다는 걸, 결국 그때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깨닫게 되더라고요.”
20대에 들은 말 중에, 내 세계관을 가장 크게 바꾼 것은 “Intelligence is larger than reality”였다. ‘인간이 최고’란 의미가 아니라, 지성이 상상한 것을 현실로 만들고 확장한다는 뜻이다.
나는 잠시 현실감을 잃고 발밑이 불안정하기도 했지만, ‘지금 만들고 있는 것 이외에 다른 현실은 없다’고 생각하니, 내가 가질 세계에 대한 태도를 확립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인식이 존재를 결정합니다. 내가 인식하지 못하면 나의 평행우주는 그저 가능한 상태로만 존재하게 됩니다.”
사실 이런 역학은 무섭기도 하다. 숙고하지 않은 선택과 인식이 없을 리가 없다. 책임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따르고, 생활공간이 평행 우주(들)이 되면, 책임도 그만큼 커지게 마련이다. 말조심하며 살아야지…….
근본적으로 내재한, ‘죽음의 공포’, 그 결과로 구현된 인류 문명, 각자의 욕망과 기대와 선택과 결정으로 얽혀드는 관계, 그렇게 멈추기도 하고 확장되기도 하는 각자의 우주. 나는... 가능하다고 해도 시간여행은 안 할 듯하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가능한 최악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삶은 삶을 가장 덜 인식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하지만, 나는 (계속 변할지라도)이 현실이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고 믿기로 했다. 애쓴 분들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싶다.
기억도 다 못하는 이전의 나의 선택들이 누군가의 생과 사에 관여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두렵다. 이 책의 메시지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갖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을 진 하늘처럼 애절하고 포근한 정서가 흐르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