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나에게 쓴 편지 카프카 전집 8
프란츠 카프카 지음, 오화영 옮김 / 솔출판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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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가 일기장을 맡길 만큼 신뢰했던 밀레나에게 쓴 편지이자 유고, 한국어 정본 완역은 최초라고 한다. 어떤 번역인지, 내용만큼 궁금하다. 전집의 표지 일러스트가 카프카의 문학 퍼즐 조각처럼 멋지다.

 

나는 편지를 알고 활용하고 추억도 있는 세대다. 얼마의 진심을 얼마나 긴 내용을 써서 한 때 누군가에게 보냈는지, 기억도 가물거리지만, 장면만은 선명하다. 손가락의 고통으로, 머리의 뜨거움으로, 심장의 간질거림으로.

 

마지막 편지를, 팬데믹의 어느 날 의도적으로 써보았다.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를 보내면서, 상대의 손으로 꾹꾹 눌러쓴 답장을 받고 싶었다. 육필, 이란 단어를 새삼스럽게 느껴보았다. 편지를 쓴다는 건 무엇이었을까.

 

이제 그만 써야겠습니다. 이 끝도 없는 하얀 종이는 저의 눈을 태워버리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꾸 쓰게 되지요.”

 




 

최상의 선입견과 최상의 오독, 인간의 소통이란 그런 것인가 싶을 때도 간혹 있다. 그 결함(?)이 때론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예술작품처럼도 보인다. 오해가 상상을 촉발하고 독려하여 어딘가의 이상향으로 질주하는.

 

이제 부인을 더 또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몸과 손의 동작들을 말입니다. 그렇게 민첩하고 그렇게 단호할 수가 없군요. 거의 직접 만나 뵙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느낌입니다.”

 

실시간 채팅의 방식이 아닌, 이모티콘으로 충분한 방식이 아닌, 구구절절한 의문과 의심과 불안과 간절함이 담긴, 도착과 읽기와 답장 쓰기와 회신의 물리적 시간이 여러 날 걸리는 편지라는 방식이 이제 와서 새삼 애틋하고 그립고 부럽기도 하다.

 

단 한 통의 편지로도, 아니, 아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요? (...)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뒤로 한껏 기대어서 편지들을 들이켜고는, 계속 들이켜기를 멈추지 않겠다는 생각밖에 할 줄 모른답니다.”

 

프란츠 카프카라는 문학 대가의 편지는, 대화체의 퇴고 없는(아마도) 문장들이라서, 빠른 속도로 재생되는 영상 대본을 읽거나, 대화를 엿듣는 기분이 든다. 당연히 지루할 틈 없이 재밌다. 문장마다 담긴 감정의 종류와 상태도 달라서, 웃고 감탄하기를 반복한다. 중반쯤 읽다가 가름끈을 찾았을 정도로, 펼치면 즐거운 속독을 하게 된다.

 

이렇게 다채롭게 격변하는 감정의 동요와 변화와 열렬함과 뜨거움을 밀레나는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계속 (거의) 모르는 상태로, 카프카의 다량의 편지를 읽는 일는 일은 카프카 퍼즐을 맞춰나가는 즐거운 놀이 같기도 하다.

 

병은 그에게 거의 믿기지 않을 정도의 섬세함과, 거의 소름끼칠 절도로 타협을 모르는 지성적 민감함을 가져다주었다.”

 

작품을 번역한다는 것은 작가를 가장 깊이 들여다보는 일이라서일까, 마침내 밀레나의 편지들을 만나고 애도사를 읽으니, 단단하고 차분하게 카프카라는 작가(사람)을 본질적으로 이해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프랑크는 살 수가 없습니다. (...) 우리는 모두 겉으로 보기에는 살아갈 능력이 있습니다. 언젠가 거짓 속으로 도피했기 때문이지요. (...) 하지만 그는 아직 그를 지켜줄 만한 어떤 피난처로도 도피하지 못했습니다. (...) 그에게는 아무 피난처도 안식처도 없습니다.”

 

전혀 만만하지 않은 자신의 형편에도 굳건해서 너무나 궁금해진 밀레나라는 체코어를 사용하는 인물이 이 책을 가장 매력적으로 갈무리하는 요소다. 그의 문장들은 정갈하고 의지적이다.

 

그는 세상을 비범하게, 그리고 깊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 또한 비범하고 깊은 세계였다.”

 

한 시대, 어느 인물들의 사랑과 아픔과 재능과 열정과 병과 죽음이 한차례 비바람처럼 지나간다. 편지지가 깃발처럼 날리는 상상을 한다. 비범하든 아니든 인간의 삶은 짧다. 울컥하는 기분에 그 핑계를 댈 수 있어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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