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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너머 자유 - 분열의 시대, 합의는 가능한가 ㅣ 김영란 판결 시리즈
김영란 지음 / 창비 / 2024년 3월
평점 :
낙태를 기본권으로 인정한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이 뒤집히자, 1989년 이미 그 판결을 뒤집으려 시도 했던 다른 네 명의 대법관들과 합류를 거부한, 미국 최초의 여성 대법관인 샌드라 데이 오코너Sandra Day O'Connor 이야기가 들려왔다.
오랜 공화당원이었지만, 소수인종 우대, 낙태, 소수 인종 투표권 확대, 종교, 연방주의, 성차별 등 논란이 큰 쟁점에 대한 판결이 오코너 전 대법관 판단에 의해 결정됐다. 중도 보수주의자라고 하지만, 대법원이 우경화할수록 상대적 진보인사로 평가되었으면, 기본권에 대해 확고한 생각을 가졌던 이다.
어느 통계를 봐도 부동의 꼴지를 기록하는 종합적으로 여성이 사람답게 살기 어려운 한국사회의 최초 대법관은 김영란이다. 누더기법을 만들려는 시도들이 이미 극성인 부정부패척결을 목적으로 한 김영란법으로 널리 호명되고 기억되는 분이자, ‘소수자들의 대법관’으로 불렸던 분이다.
관리직 이상의 여성을 보기도 어렵고, 있어도 조명되지 않는 사회에서, 그의 존재는 낯선 희망의 빛 같았다. 평생 독서량도 아주 많다는 것은 출간한 책들을 반갑게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엄중한 시절에 비춰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유치한 선거를 다시 목도하는 때, 이 책을 통해 잠시 고민하고 토론하여 ‘합의’하는 간절한 인간 능력에 대해 생각하며 판결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을 천천히 두 번 읽었다.
대법관으로서 기본적 자유와 기본권이라는 단단한 원칙을 세우고, 그 기준으로 판결을 살피되, 선택보다 절충과 조율, 합의의 책임을 지닌다는 것은 얼마나 우아한 태도인지. 화만 많아진 시민으로서도 배우고 싶은 모습이라 마음이 눈부셨다.
공화당원이지만 민주당 의원들과도 친하게 지낸 오코너 대법관과 김영란 대법관은 성찰하는 법관이자, 법철학자이자, 사법부의 일원으로서 닮은 점이 자주 중첩되어 보였으며, 이들이 사례가 되면 민주사회의 중첩적 합의를 위한, 기관으로서의 법원도 제 기능의 구심점을 가질 수 있다는 기대를 하게 한다.
나는 90년대 존 롤스John Rawls의 정치철학 논문을 쓰는 친구에게 조금 배운 후, 그가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을 쓰고, 인간의 복잡다단한 삶을 너무나 고공 관찰하는 태도가 못마땅했다. 배움과 이해가 부족하고, 활용할 상상력이 적어서였겠지만, 오랜 찜찜함을, 김영란 대법관이 이 책에서 차근하고 차분하게 풀어주어 기쁘다.
무사 안일한 사례와 사안을 다루는 저자와 책이 아니다. 이 책에서는 가장 첨예하고, 아직 한국 사회의 다수 시민이 진지하게 다룰 준비조차 되지 않은, ‘미성년 자녀가 있는 성전환자의 성별정정 허가’도 다룬다.
존경이 깊어만 가는 이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반갑고 귀한 이 신간도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시민들이 함께 읽고 공부할 기회가 많기를 바라게 되는 책이자, 미래세대를 위해 교과서에 실어주길 바라는 책이다.
“법관은 오로지 ‘법을 말하는 입’이란 해묵은 말만으로는 사법이 당면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