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사상과 종교공부 - K사상의 세계화를 위하여 개벽사상과 종교공부 1
백낙청 외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0년쯤 전, 주로 서양생태사상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할 무렵, 한국에서도 ‘생명사상’이라는 사상과 여러 역사적 전통 속의 생태주의 혹은 철학에 대한 연구와 논문과 책들이 출간되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동양철학과 한자에 무지한 상태라서 잘 읽어 내지는 못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 연구자들이 주최한 세미나에 한번 참여했고, 멋진 연구자를 만나 그분이 인터뷰한 김지하의 생명사상에 대해 많이 물어볼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학위 받고 연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분은 암으로 돌아가셨고, 나도 유학준비를 하며 내용을 잊어갔다. 거의 30년 만에 그때보다 포괄적인 개벽사상을 다시 만난다. 백낙청 TV가 생기고, 그때 모두 젊던 분들이 원로가 되어 나누는 이야기를 이제 중년의 내가 듣고 읽는다.






개벽開闢이란 세상이 처음으로 생기고 열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뜻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 세상이 어지럽게 뒤집힌다는 조건도 있다. 비슷한 의미로 더 자주 사용되는 ‘혁명’보다는 지구 자전축이 움직이는 건가 싶게 스케일이 큰 표현이다. 


“여기서 말하는 개벽은 물론 후천개벽인데 (...) 사람의 정신과 마음에 일어나는 근본적 변화와 더불어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대변혁을 ‘후천개벽’으로 규정하고 추진한 것은 유독 한반도에서 시작된 현상이요 사건이다.”


그러니 어렵다. 국가 단위의 혁명조차 사라진 시절에 인류 문명의 성격과 삶이 양식 자체를 바꾸는 정신, 도덕, 윤리의 토대를 전환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생존이 가장 간절한 욕망이자 동력이라면 무엇이든 가능할 것도 같지만, 어째 현생 인류의 행보는 이대로 살다 죽는 길로만 걸어가는 듯하다.


절망도 좌절도 무기력도 무력감도 지겨워서, 이 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어른들이 많이 떠나셨고 계속 떠나실 것이라, 애틋하고 반갑게 아홉 분의 토론을 천천히 듣고 읽었다. 기록과 가이드가 있다면 언젠가 필요한 누군가가 쓰겠지, 막막함이 덜하겠지 싶은 사상의 유산을 만난다.


“하루에 꽃 한송이 피네. 이틀에 꽃 두송이 피네. 삼백육십일 지나면 꽃 또한 삼백육십송이 피겠지.” 수운 최제우


서양학문을 한 나로서는 여전히 쉽지는 않다. 동학, 천도교, 원불교, 그리고 기독교 사상도. 이론만이 아닌 실천 사상으로서 조망도 연마도 제안도, 수운 최제우, 해월 최시형, 증산 강일순, 소태산 박중빈 등 어려운 시도를 했던 사상가들도 모두 묵직하다. 


다행스러운 것은, 내 기우보다 문헌자료가 많다는 것이다. 낭비적이고 파괴적인 자본주의는 이미 대실패를 했다. 기후재난과 생태위기가 그 결과이자 증거다. 살던 대로 살면 수많은 경고를 담은 과학자들의 예측이 현실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말기국면을 살고 있는 현대인으로서, 사람다운 삶을 쟁취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노선이 무엇이고 덜 효과적인 노선은 무엇인지를 판별하는 기분이 필요한 것만은 분명하다.”


문제를 야기한 방법으로는 해법을 찾을 수 없다는 통찰이 옳다면, 우리는 문명을 샅샅이 뒤져 쓸 만한 사상을 찾거나, 새로 만들어야만 한다. 탐구하는 치열함은 살던 대로 사는 것보다 훨씬 도덕적, 윤리적, 희망적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행동하게 하고, 변화를 이끌어내기에 충분한 사회운동을 촉박하는 사유와 역량은 무엇이며 어떻게 연마하는지를, 평생을 연구와 토론과 논문과 저서활동을 하며 살아온 분들의 간절하고 뜨거운 육성으로 만난다.


“오늘의 현실은 모두 각자위심(各自爲心)하고, 불순천리(不順天理)하고, 불고천명(不顧天命)하는 위기의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공동체 윤리의 상실,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위기 상황이 다시개벽의 요청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를 만들어내는 일에 종교와 사상은 가장 강력하고 큰 무기가 된다. 문명은 종교와 사상을 공유하는 이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현실이다. 그래서 공부가 중요하다. 어쩌다 시험이 더 중요한 협소하고 시시한 세상이 되었지만, 학습은 인류 문명의 탄생과 영속을 위한 근본적인 인간 활동이다.






이 책이 담은 내용들은 사상적 논쟁만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발생한 수많은 사회운동의 사례들을 확인하며 우리 이전의 사람들이 어떤 세상을 꿈꾸고 어떤 시도를 했는지를 새롭게 배울 ‘역사이야기’이기도 하다. 생각보다 가까운 역사의 풍경들이 이 모든 것과 이어져있다.


“3.1독립만세혁명이나 그 이후의 즉각적인 임시정부의 성립, 공화제 선포, 독립운동가들의 활약, 건준의 성립, 이후의 인민위원회의 활약 등등 이 모든 것이 동학이라는 거대한 민족체험을 떠나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 반드시 동학의 뿌리를 언급했어야 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