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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주에 깃든 지리의 향기
신희수 지음 / 지식과감성# / 2023년 11월
평점 :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통주 지도를 보니, 마셔본 것도 몇 개 안 되고, 이름조차 모르는 전통주들이 더 많다. 애주가라고 하기에는 많이 마시지도 않고 찾아 마시는 수고로움도 하지 않지만, 맛있는 술 한 잔을 무척 반기고 즐기는 것도 사실이니, 호감이 있다는 정도가 맞겠다.
주종 불문 한 잔을 천천히 마시는 편이고, 작년에 주중 금주를 결심한지라, 맛있는 술이 좋다. 희석식 소주는 거의 마시지 않는데, 맛이 나쁘기 때문이다. 술이 품은 향이 중요하니 소독약을 삼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소독약 삼켜본 적 없음). 취할 때까지 마시지도 않으니 싼값에 다량을 삼킬 이유도 없다.
하여간 이런 어정쩡한 애호를 가지고, 각 지역을 닮은 생산물인 전통주와 그에 잘 어울리는 지역 특색을 지닌 음식을 짝 지어 소개하는 책을 재밌게 읽었다. 한국의 술 문화는 대개 음식을 가득 차려두고 술도 잔뜩 마시는 축제같은 분위기라서 모임 자체가 몹시 부담스러운데, 이 책은 전통주를 다뤄서인지 상대적으로 무척 차분한 술자리가 상상된다.
한 때 하루 종일 운전하며 여행하기를 즐겼기 때문에, 지역별로 만난 특산물과 식사와 술이 생각나서 즐거웠다. 예를 들면 공주의 왕율주는 모르지만, 부여에서 아침 9시 산책길임에도 밤 막걸리를 능숙하게 권하던 분이 유쾌하게 떠오른다. 미처 대답하기 전에 병을 열고 잔에 따라주셔서 친구들과 한잔씩 얻어 마시고 아침부터 취해서 숙소로 돌아오는 평생 처음의 경험을 덕분에 했다.
여행을 좋아했지만, 지리에 대한 식견이 부족해서 지형과 식생에 관해 깊이 있게 보고 느끼지는 못했다. 인간의 삶에 지리적 환경과 날씨, 기후, 섭생이 얼마나 근본적이고 중요한지를 알게 된 건 나이가 한참 들고서다. 지리 과목을 배울 때 지도 작법이나 축적계산이 아닌, 다른 내용이 있었다면 좀 더 일찍 지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을까.
“지리는 세상을 정확하게 볼 수 있게 도와주는 안경이다.”
전통주에는 지리 이야기와 더불어 그 지리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분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이 함께 담겼다. 역사도 문화도 들린다. 전통주들마다 전하는 다른 향과 맛과 이야기를 책을 따라 만나 가다보면 이 땅에서 우리가 함께 살아온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음식이든 술이든 즐기는 것은 좋지만, 좀 더 차분하게 애정을 가지고 감사함을 느끼며 대하는 문화가 새롭게 생기면 좋겠다. 먹는 일이 인류의 생존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도 깊이 이해되면 좋겠다.
“품질 좋은 여주의 쌀과 물을 재료로 만든 증류주 화요에는 쌀의 고소한 단맛이 풍부하게 농축되어 고급스러운 맛이 우러나게 된 것이다.”
책 덕분에 앉아서 하는 여행을 마친 기분이 든다. 주로 수입된 술을 많이 마시는 경향이 있는 나에 대해서도 가만 생각해본다. 가장 무난하고 대중적일 듯한 여주 증류주 화요를 한 병 구매해야겠다. 그 향과 맛과 이야기를 만나보고 싶다.
“화요의 맛이 완성되는 단계는 (...) 옹기에 숙성하여 깊은 맛을 내는 과정이다. (...) 잡스러운 맛은 없어지고 깊고 부드러운 맛만 남아 맛좋은 술이 된다. (...) 사람과 자연이 함께 빚어 낸 조화로운 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