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되어 내린다
유형준 지음 / 지식과감성#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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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고 새해이고 주말이고 시집은 언제라도 좋지만, 지금은 더 좋다. 시가 아주 빼곡해서 목차를 보며 놀랐다. 소나기나 함박눈이 내리는 풍경 같다고도 생각했다. 시가 되어 내리는 것이 무엇일지 궁금해 하며 시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나는 그럴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럴 수 있는 세상]

 

그럴대신 써넣을 수 있는 것들을 오래 생각해본다. 애틋하고 애절하고 약하고 큰 말들, 꿈들, 희망들, 상식들. 내가 사는 여기가 어딘지 한순간 눈앞이 깜깜해지던 소식을 듣고, 할 말은 많지만 내내 참는 중이다.

 

나를 위한다는 말은

누굴 위한다는 것인가

 

(...)

 

할 수 있다는 말은

누굴 위한 것인가

 

[누굴 위한 것인가]

 

위한다는 말에 대해 낯설어하며 생각해본다. 그 목적성은 어디를 향하는 것이었는지. 사랑이라기엔 너무 무겁다. 변명과 원망처럼도 들린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것들이 적지 않은 새해기를 바라는 중.

 

어제가 오늘이 되고

오늘은 내일이 되고

 

[제한할 수 없는 것]

 

내가 아는 시간의 방향과 달라서 잠시 멈춤한 시. 가만 생각해보니 이 방향도 맞다. 영화 <컨텍트>에서처럼 시간을 느끼고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우고 싶다. 모든 것을 다 알고도 하는 선택이 진짜가 아닐까 하는 생각.

 

저는 여기 없습니다

(...)

제 생각도 여기 없습니다

(...)

나의 의지도 여기 없습니다

(...)

이곳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그저 지나갑니다.

 

[여기 없습니다]

 

경사보다 조사가 많은 나이라서, 죽음도 삶도 자주 확연하게 절감하고 만다. 본질에 너무 가까우면 일상을 사는 일이 버거워진다. 연말연시 긴 연휴와 바쁜 일정과 시시한 체력에도 불구하고 학전의 마지막 공연을 본 것은 사라지는 것에 대해 애도와 존경 때문이었을까.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

(...)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

 

알지만 아는 대로 살지 못하니 그런 현실을 슬그머니 외면한다. 하다 보면 점점 더 자연스럽게 할 수 있고, 그렇게 사는 방식이 삶이 되고, 함께 사는 세상이 되고, 그 결과가 지금, 여기, 현재라고 생각하니 부끄러움이 거대하다.

 

끼리끼리 축하하고

끼리끼리 축배를 들고 있다

 

끼리가 없는 사람은 넘어졌지만

끼리끼리 세상은 눈길도 주지 않는다

 

[끼리끼리]

 

인간은 끼리끼리가 되면 최악으로 시시해진다. 시시해진 인간들이 벌이는 무도하고 잔인하고 무지한 짓들은 세상을 시시하게 만든다. 새해가 되자마자 희망이 뚝 끊기듯 들리는 갖가지 소식들.

 

사람은 사람으로 병들어 간다

(...)

사람은 사람으로 병들어 간다

 

[사람은 사람으로]

 

사람은 사람으로 병들고, 사람 아닌 존재들도 사람으로 병들고. 사람은 지구 역사에서 어떤 존재였나 생각해보는 것도 지치고, 그럼에도 태어나 살아볼 수 있어서 벅찬 짧은 시간이다.

 

내 눈 위로 꽃비가 내린다

 

(...)

 

얼어붙은 노여움을

녹여 내린다

 

[내린다]

 

내리는것들이 시집 속에 문득 등장한다. 몇 개인가 세다가 무의미해서 그만 두었다. 내리고 흐르는 것들이 모두 시가 되어 다시 내린다. 겨울눈을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네가 없는 일상보다

네가 있는 꿈에 갇히고 싶다

 

(...)

 

의미 없는 일상보다

네가 있는 꿈에 갇히고 싶다

 

나의 꿈은

꿈속에서 이루어진다

 

[꿈에 갇혀]

 

꿈이 있어 불행하다는 고백을 들었다. 꿈이 없어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면 꿈과 함께 불행한 것이 낫다는 생각을 했다. 온통 절망할 것 투성이라도 새해라는 핑계로 꿈을 꾸고 희망하고 애써 보는 거지. 이렇게 시집도 펼쳐 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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