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휘말린 날들 - HIV, 감염 그리고 질병과 함께 미래 짓기
서보경 지음 / 반비 / 2023년 11월
평점 :
비로소 ‘한국 에이즈 이야기’ 책이 나왔다. ‘앞줄에 선 사람들’,‘먼저 휘말린 사람들’의 목소리. 이 책을 읽는 경험 속에서 휘말린 후 나는 살고 싶은 어느 미래에 기착할 것인지 궁금하다. 장애도 질병도 감염도 모두 ‘경험’이 아닐까. 그러니 경험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고마운 일이 아닐까.
“인간은 바이러스에 ‘감염한다’. (...) 서로 휘말린다. 감염은 인간과 바이러스 모두의 속성이자 양자가 함께 겪는 일이다.”
이 책을 통해 ‘감염’이라는 것에 대해서 새롭게 배우고, 현상을 두려워하고 기피하기보다, 좀 더 차분하게 과학 지식을 따라가며 인간의 생명 현상의 일부로서, 사회적 존재의 상호작용으로서 ‘감염’을 살필 수 있는 시선을 얻었다. 감염에 따르는 불편과 고통은 여전하겠지만, 불필요하게 더해지는 괴로움을 덜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안도감이 든다.
“우리의 몸은 지금 당장 직접 닿아 있지 않다 하더라도, 감염이라는 작용이 매개하는 생명의 의미망 속에 늘 휘말리고 있기 때문이다. 몸으로 우리는 들이마시고, 만지고, 맛보고, 삼키고, 내뿜고, 그러므로 서로 드나든다. 서로의 몸에 가닿는다. (...) 서로 휘말리고 있다.”
근시안적인 사회적 비용을 이유로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과학적이지도 사회적이지도 못한 반응이다. 감염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면, 감염하지 않았다는 것이 어떤 증명이나 자격이 될 수도 없다. 즉 감염한 것이 죄를 짓거나 수치심을 강요당할 일도 아닌 것이다.
무감염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식을 찾아 예비하는 것이다. 그 일에 먼저 감염한 이들의 목소리가 꼭 필요하다.
“건강은 그 무엇에도 감염하지 않았다고 확신할 때, 즉 육체의 청결함과 순수성, 완벽성에 대한 강박적 환상 속에서 실현되는 게 아니라, 무수히 많은 것들과 휘말린 상태를 얼마나 어떻게 감수할 수 있는지에 따라서 오로지 효과로서 등장할 따름이다.”
다중 억압의 역사를 살아간 이들을 기록한 이 책에는, 부정적인 온갖 말이 덧붙여지고 한 순간에 난폭하게 분류되고 경계되고 차별받고 혐오와 폭력과 살해를 겪은 아프고 고된 시간이 가득하다.
질병보다 낙인과 더 싸울 필요가 없는, 숨거나 도망쳐야 할 존재가 아닌, 진단이 두려운 선고가 아닌, 해당 질병의 발현을 서로 이해하고,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감염체가 아닌 ‘사람’을 보고 공동체의 일로 인지하는, 그런 방식으로 건강과 질병을 다루는 사회를 지향하며 기록한 귀중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