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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은 사람 - 차원대 산문집
차원대 지음 / 지식과감성# / 2023년 10월
평점 :
현재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과거에 비겁한 조상을 두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 생존을 최우선으로 두고 열심히 잘 도망 다닌 - 그보다 우리 모두는 무척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살아 보니 살아남는다는 건 수많은 행운의 지속이다.
그에 더해 나는 기여한 바가 별로 없음에도, 타인의 노동과 배려와 업적에 기대에 사는 면면이 아주 많다. 가만 생각해보면 내 삶도 내 생명도 나만 지켜오고 가꿔온 것이 아니다.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살자고 선택한 삶의 방식은 거대한 마법을 부린다.
이 책은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살았고 어떤 생각을 하나 궁금한 내가 읽기에 맞춤하고, 만듦새부터 문장까지 단정하고 단단해서 기분이 좋다. 글은 글 쓴 이를 닮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종종 에세이가 더 어렵기도 하다.
관찰력과 탐색력과 문장력과 자기 시선이 있는 글이 좋다. 겸손한 글이 좋다. 구성이 탄탄한 글이 좋다. 희귀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흔한 소재로 흥미롭게 쓴 글이 좋다. 진지하게 산 사람의 이야기가 좋다.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의 글이 좋다.
“2022년 겨울, 둘째 아이가 회사에서 받았다면서 작은 노트를 나에게 선물했을 때 (...) 받은 노트를 그냥 두기가 아까워서 (...) 멍하니 방치되어 있는 만년필의 모습이 안타까워서 (...).”
노트와 만년필, 잉크 채우기, 연필, 연필 깎기, 손글씨... 설레고 좋아하는 것들이다. 왜 설레는지는 모르겠다. 어제도 칼로 연필을 사락사락 깎으며 심장이 두근거려서 즐거웠다. 획수도 줄도 못 맞추는 손글씨는 날로 엉망인데, 연말이라 이것저것 적어두고 있다. 꽤 즐겁다.
인터넷 사용을 더 줄여보자고 결심한 뒤로는 신기하게 손글씨를 쓰는 시간이 조금씩 늘고 있다. 읽고 표시하고 다시 펼쳐 사진을 찍고 그중에서 쓸 내용을 고르고 쓰고 다시 읽고 기록하는 느리고 고된 방식, 왜 좋은 걸까.
나는 초등6학년부터 컴퓨터를 배우고 20대 초반부터 PC와 랩톱을 사용한 세대다. 강의 시간 필기와 시험을 제외하곤, 리포트도 논문도 지원서도 공문서도 모두 자판으로 썼다. 손편지보다 이메일을 더 많이 썼다. 그럼에도 연필과 만년필과 종이책과 노트를 좋아하는 건 왜일까.
나는 내가 무엇인지 누구인지 설명할 방법이 점점 줄어든다. 나라고 생각한 것들이 옅어지기도 하고 변화하는 나를 내가 낯설어하기도 하고. 작가가 비슷한 고민을 나눠서 반가웠다. ‘습관’을 예로 들어 좋았다. 한편 내 삶은 좋은 습관을 만들기 위해 애를 많이 쓴 시간이었으니까.
나이가 든다고 모두 어른이 되지 않는(못한)다는 것을 이제 안다. 평생을 사춘기로 사는 건가 문득 아찔하기도 하지만, 내가 그렇다는 걸 잊지 않으면 도움이 된다. 타인을 섣불리 판단하는 일도 피하고, 아는 척도 말고, 고집도 접고, 예의를 지키며 살자고 결심을 자주 경신한다.
희망과 긍정이 어렵지만, 내가 삶을 비관한다고 해서 타인에게 무례할 필요까지는 없다. 사랑할 이유는 많고, 존중은 늘 필요하고, 친절하지 않을 이유는 없고, 겸손하지 못할 상황도 없다. 보이는 나는 태도의 문제이고,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단정한 위로를 받은 시간이었다. 고마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