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이야기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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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가 쉽고 말하듯 들리는 표현 덕분에, 한편으로는 출장과 워크숍과 친구 초대로 방문한 이탈리아와 로마를 자주 떠올렸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는 일과 구경하는 일, 생활인과 방문객,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이들과 뿌리에서 멀어져 잠시 휴식하는 이들의 간극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는다.

 

이곳은 공기조차도 다르다고 (...) 이렇게 모든 것에서 멀리 떨어져 함께하는 것이 참 좋다고 그들은 말한다.”

 

허름한 집에서 보내는 매일매일의 똑같은 날들에 대해 그들은 무엇을 알고 있을까? (...) 겨울 내내 이곳을 지배하는 무자비한 고요함을 과연 좋아할까?”

 

내 삶의 많은 행운은 눈치가 없어서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눈치가 없이도 살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 특권일 수도 있다는 것을 40대에 겨우 배웠으니 그야말로 눈치가 없는 편이다.

 

그럼에도 20세기에 20대인 내가 모를 수 없었던, 유럽에서 경험한 경계성과 소외감은, ‘far-far-east’에서 왔냐고 묻던 질문(국적)오리엔탈 여성을 보는 시선(성별)어려 보인다는 쉬워 보이는 말(나이)로 지겹게 소환되었다.

 

배에 가벼운 펀치를 맞은 것 같은 불편함을 느끼며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21세기에도 국적, 성별, 나이는 무화되지 않았고, 디지털로 변환되는 증명서류들이 첨가되었다. 나는 문득 두렵다. 기껏 서류 몇 장이었을 뿐이지만 원본이 무의미해진 시대에 나의 원형originality은 이제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이었고 무엇인가.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이름, 국적, 성별, 나이로 구성된 정체성이 흐릿하다. 소설집을 읽었는데 이름을 아는 인물이 없다. 숫자로 명기된 나이도 없다. 짐작할 뿐 확인된 국적도 없다. 작가는 문학의 방식과 필력으로 만들어가면 된다고 주어진것들의 힘을 빼놓았다.

 

이렇게 간단한 문장으로 감탄하기란 너무 쉽지만, 작가의 시도는 거대하고 공고하게 구축된 시스템에 반하는 도전과 저항이다. 인류 문명의 역사에서 정상과 주류와 기득권의 카테고리를 차지했던 이들은 천지창조의 날들처럼 제언 명령을 역사 속에서 거듭했다.

 

우리와 다르다고 분류하니 구별과 차별이 쉬워지고, 다른 것을 틀리다고 재규정하니 폭력과 혐오 위에 성립된 위계가 뚜렷해지고, 틀린 것은 죄악이라 종교가 거드니 이웃이 아닌 자들을 벌주고 죽이자하고, 약해서 손쉬운 곳으로만 시선이 향하니 불경하게 향하던 질문과 저항이 해소되더라. 부작용의 책임을 돌릴 다르고 틀린존재들은 많고 많아서, 달디 단 열매를 가득 채워서 기생할 준비를 갖춘 우리만 잘 살기에 좋았더라.


 

간신히 삶을 꾸려보려는 작품 속의 불안한 존재들이, 나와 내 가족을 다르고 틀려서 싫은이방인으로 보고 가해하는 타인들과 혼재된 상태로,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혼돈의 공간과 상황은 외롭고 위험하고 괴롭다.

 

그것만이 아니야, 증오가 가득했어.”

 

이민자에게 무자비하게 자행되는 폭력, 충분하지 않은 처벌과 보상, 제거되지 않는 두려움과 위험. 타인들과 어울려 살아가길 원하지만, 영원한 이방인으로도 모자라서 적대시되는 존재. 경계인의 처지를 다시 새롭게 내 이해 속에 채워 넣는다.

 

우리는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네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뜨거운 열기를 작가는 단문이 지닌 속도감과 집중력으로 숨을 멈추고 따라 읽게 만든다. 참았던 긴 숨을 몰아쉬면 한편이 끝나있고 내가 잘 몰랐던 외롭고 불안한 존재를 대면한 기억이 남는다. 특기 중 하나인 픽션을 논픽션으로 읽기 능력은 잊었던 상처가 쑤시듯 책을 경험하게 한다.

 

뱃속에 있는 음식이 버겁게 느껴진다. 그녀는 참을 수 없는 슬픔에 사로잡혀 추하고 비통한 감정뿐 아니라 굴욕감까지 느낀다.”


 


마음산책에서 출간한 에세이만 읽다가 소설을 처음 만났다. 그래서 설렜는데 에세이처럼 친밀했다. 아무도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모두의 삶을 아주 가까이 보고, 등장인물 각자의 무늬가 직조된 줌파 라히리라는 한 장의 진심을 고백 받은 기분이다.

 

살아남는 법을 배우려면 얼마나 오래 살아야 할까?”

 

몇 번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까?”

 

태어나보니 주어진 것들 - 장점으로 보일 수도 있었을 - 로는 정체성을 편안하게 채우고 아무 일 없이 살아갈 수 없었던 존재, 더 촘촘하게 주류로 변신을 시도할 수도 있었겠으나, 창작 언어를 달리함으로써 스스로 언어와 문학과 문화의 가장자리로 이동한 용감한 작가를 작품으로 더 많이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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