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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을 어루만지면 ㅣ 창비청소년문학 123
박영란 지음 / 창비 / 2023년 10월
평점 :
‘시공간’이란 단어를 들으면 내 의식은 어쩔 수 없이, spacetime으로 4차원과 상대성 이론으로 이동하고 만다. 시간은 발명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는 우주공간을 배우며 놀라던 20세기의 강의실이다.
다른 한편, 경험적 시간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내가 머물던, 살던 공간에 대한 기억과 애착에 서러워지기도 한다.
표지의 이층집에는 누가 살고 있고 어떤 일이 일어날까. 살짝 무서운 상상을 했지만 김중미 작가님 추천사가 있어 안도하며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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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주택을 1, 2층으로 나눠 사는 설정이 독특했다. 더구나 숨어사는 가족이라니. 마당에 무성한 식물은 그 처지를 가리듯 그늘을 만들어낸다. 무겁고 슬프지 않을까 했던 초반 분위기를 가뿐하게 걷어내는 아이의 존재가 더 귀하고 감동이다. 타인에게 다가가는 태도는 어때야 하는지 내내 생각만 너무 많은 나를 총체적으로 반성하게 한다.
어린 시절의 성장이란 무엇일까. 다른 많은 것들처럼 내 기억 속에서 흐려지는 기억이지만, 청소년문학을 읽으면, 복기하고 싶은 내용을 갱신하는 기분이 든다. 우리 집 십대들과 공감을 조금이라도 오래 유지하고 싶은 생각에 함께 읽는 청소년문학은 매번 그런 효용성 이상의 깊은 울림과 감동을 전해준다.
운이 좋아 이사를 많이 다니지 않은 환경에서 성장했음에도, 내가 태어난 집을 떠났다는 것을 내내 슬퍼했고, 동생이 태어난 집이란 공간에 대한 애착도 컸다. 그 집을 설계한 분의 특별한 사연을 듣게 되고 성장기에 내 악몽의 배경이 되기도 했지만, 시공간이 품은 기억만큼은 지금도 대체불가하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사람보다 집과 마당, 그 시절의 시공간에 더 관심이 갔다. 마치 자의식이나 정체성을 가진 존재 같은 시공간이 허락해준 삶의 여지와 성장의 계기들을 생각하며 읽었다. 공간이 생존에 어떤 의미인지가 더 선명해지고, 충분히 안전한 공간을 제공하지 못하는 사회가 허황되고 잔인하고 그릇된 시스템으로 인지된다.
각자의 어려움과 힘듦을 버티고 견디는 가족들이 다른 곳에서 함께 머물고 조우했다면 반응과 관계는 달랐을 것이다. 가족 구성원들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태도는 어떤 공간인가에 따라 놀랍게도 다르게 변화한다. 무너져도 다시 무성해질 수 있고 천천히 다시 시작해도 된다는 여지를 느끼며 살게 해준 공간과 그 시절이 빛난다. 내 것인 적이 없음에도 그립다.
“맑게 갠 밤하늘 아래 퍼지는 새소리를 준이, 할머니가, 장희 씨가, 자작이, 종려가, 듣는다. 엄마도 듣고 나도 듣는다. 멀리 있는 아버지도 들을 것이다.”
층간소음으로 수많은 다툼과 살해까지 벌어지는 현실에서, 타인들이 살아가는 ‘소리’가 불쾌하고 화가 치미는 ‘소음’이 아니라, “미세한 입자들이 마주치는 소리”, “이른 아침 알싸한 공기 속에서 안개와 꽃향기가 서로 부딪는 소리” 로 묘사되는 것이 뭉클해서 눈물이 고였다.
누구 못지않은 사연을 가진 이들이지만, 발랄하고 다정하고, 힘든 누군가의 손을 잡아 주고 곁에 머물러주는 고요한 풍경이 감동적이고 그만큼 나는 또 부끄럽다. 살아있는 한 변할 수도 성장할 수도 있다는 것을 믿어야지. 가능하면 사랑의 말을 전해야지. 좀 더 용기를 내야지.
“어떤 게 아름다운 건데요?”
“맘먹은 대로 되지 않았을 때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달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