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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가장 보통의 인간 - SF 작가 최의택의 낯설고 익숙한 장애 체험기
최의택 지음 / 교양인 / 2023년 10월
평점 :
결과가 나오고 나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밑밥처럼 이런저런 힌트가 아니 경고가 있었다. 조산과 역산이라는 요란한 방식으로 태어난 아이는 2kg가 채 되지 않았다. 인큐베이터 속의 작디작은 생명은 제 몸무게만한 줄을 달고 여러 주사바늘을 꽂고 있었다.
최소 퇴원 조건인 몸무게 2kg이 된 아이는 두 손 안에 다 차지 못할 정도로 작았다. 눕히는 것도 두려워서 백일까지 안고 살고 앉아서 잠들었다. 살이 통통 오르고 고개도 들고 눈 맞춤도 하고 그렇게 자라던 어느 날 뇌병변장애 진단을 받았다. 초음파 사진 속 아이 왼쪽 다리가 비슷한 모양으로 펴져 있었던 것이 장애 진단과 설명을 들으면서 그제야 해석이 되었다.
‘장애’라는 것은 아주 느슨한 분류다. ‘경험하지 못한 것은 공감하지 못하고 사유할 뿐’이라고 했던 문장은 이후로 낱낱이 이해되었다. 나는 세상에 장애의 종류와 경중과 증상이 그렇게 다양한지 매일 놀라며 배웠고, 한국에 장애인이 상시적으로 예약하고 방문하고 치료받고 입원할 수 있는 병원이 그렇게 적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운이 좋아야 한두 달 입원 치료가 가능한 전국의 병원들을 순회하는 삶이 여러 해 흘렀다. 종종 숨이 안 쉬어지는 날도 있었지만, 나보다 큰 깜냥을 지닌 분들이 많아 온갖 도움과 위로를 받았다.
자신의 아이와 눈 한번 못 맞춰본 이에게, 예고 없이 찾아와 언어 폭행을 하는 시부모를 견뎌야 하는 이에게, 평생소원이 자식이 앉는 것이라는 이에게, 엄마라고 한번만 불리고 싶다는 이에게, 반찬도 뜨개 선물도 받았다. 그렇게 애쓰던 이들 중 몇 분이 소식을 끊고 생을 버렸다.
끝없는 하소연이 끓어 넘치는 흘러나와서 이만 정신을 차리고 책 이야기를 해야겠다. 작가가 반갑고 이 책이 고맙다. 맑고 곱고 순진하고 착하고 무해하지만 않아서, 동정을 구하는 전형적인 이미지 구축이 없어서, 까칠함과 당당함과 담담함과 낙관적이지만은 않은 모든 느낌이 좋다.
‘가장 보통’ ‘그냥 보통’ 이웃 같아서 더없이 좋다. 내 아이가 주목받지 않고 특별할 것 없이 어울려 살아가길 바라서, 작가의 삶과 글이 선례와 실례(實例)가 되어줄 것 같아서 또 좋다.
초등학교 특수반에 입학하고, 아이의 심적 고통이 심해져서 한번 전학을 갔고, 평생 일주일에 세 번은 병원 치료를 받고, 이제 열일곱 살인데 전신 마취 수술을 두 번 받았다. 절개 자국과 봉합 자국들이 다리 곳곳에 있다. 신기할 정도로 잘 웃고 뒤끝이 없는 성격이고, 반바지도 잘 입고 아무렇지도 않아 해서 내 속이 아프고 쓰리다. 운이 좋아 사촌들이 시샘을 할 만큼 양가 조부모님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덕이 크다.
그럼에도 장애를 경험하는 당사자와 가족들은 살면서 원하지 않은 롤러코스터를 몇 번씩 경험한다. 작가가 자신의 성장기를 기록한 문장들을 읽으며, 기억하는 시간만큼 몸이 아파서 잊고 덮은 순간들이 종종 끼어들었다. 지난 일이라 괜찮기도 하고 여전히 흉터가 되지 못하고 아픈 상처인 것들도 있다.
시난고난한 시간 동안 쌓인 경험과 이해를 기반으로 한 작은 내 세계의 경계가 넓어질수록 지혜보다 혼란이 커져갔다. 거듭 말하지만 장애의 종류는 다양하고 그만큼 입장이 다르고 각자가 처한 환경도 다르니 때론 말로도 글로도 표현할 수가 없는 형편을 마주하곤 한다.
이 책을 만나 가장 고마운 건 ‘장애 경험자’란 표현을 배운 것이다. 거부감도 저항감도 없이 기쁘게 당장 사용하고 싶다. 북유럽 어느 나라엔 새로운 공공건물을 지으면, 어린이와 고령자와 장애인을 초대해서 사용하기에 무리가 없는지를 묻는다고 한다. 유니버설 디자인을 그 이야기로 배웠다.
그러니 ‘장애’는 그저 누구나 가진 어려움이라고 번역해도 좋지 않을까. 곧 반백 살이 되는 나는 이미 진행된 노안처럼 매일 늙고 약해질 것이다. 아프지 않고 늙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우리 모두는 일종의 장애 경험자들이 아닐까. 이런 이야기를 하니, 아이가 등록된 장애만 인정해준다고 놀리며 웃는다. 어릴 적... “저는 다리가 좀 불편할 뿐인데, 제가 장애인이에요?”라고 묻던 아이가.
“더는 나의 장애를 외면함으로써 나의 일부를 지우지 않고(그래, 나 장애인이다), 타인에 의해 규정되는 것에 저항하고(나는 ‘장애인’이길 거부한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나 스스로를 유리시키지 않겠다는 뜻이다(따라서, 다시 나댈 것이다). 그러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뜻이다.”
특별하지 않고 별스럽지 않은 존재로, 일상에 당연한 풍경으로, 2022년 추산 20명 중 한 명이라는 등록된 장애 경험자들이 어디서나 만나는 이웃으로, 그런 세상이 되기를. 찌그러질 기분으로 광광 우는 대신, 가볍고 부주의하게 살아도 성장과 삶의 흔한 시행착오 정도로 경험하는 안전한 사회가 되기를. 장애를 경험하는 이들이 다양한 직군에서 그저 평범하게 대단한 성취를 하지 않아도 함께 일하는 세계가 되기를. 책을 덮고 한참을, 아직 미래라서 희망이 될 수 있는 날들을 상상해본다.
“disabled person(장애인)과 person with difficulty(장애가 있는 사람) 사이에서 나는 여전히 갈등한다. (...) 내가 장애인일 뿐이든, 장애가 있을 뿐이든, 오늘 나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오늘을 나로서 내가 선택한 대로 사는 일이다.”
언젠가 나도 명랑한 할머니 얼굴로 ‘그땐 그랬지’라거나, ‘심각할 게 뭐 있어’라거나, ‘인생 뭐 별 거라고, 즐겁게 살아’라거나, 내 아이의 엉뚱한 모험에도 발작이 날듯 불안이 솟는 대신, ‘재밌겠네!’라거나 ‘잘 해봐’라고 하면 충분한, 그런 가볍고 느긋한 보통의 인간으로 살 수 있는 날들을.
“안녕, 읽는 동안 즐거웠어요. 작가님도 쓰는 동안 즐거웠기를. 앞으로도 그러하기를. 글쓰기가 즐거운 버티기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