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관하여
정보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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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산으로 태어나 온갖 병치레를 하고 자랐다. 매일 20시간씩 울었다고 하시니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믿을 수밖에. 초등학생 때 소원은 개근상을 한번이라도 타는 것이었다. 어릴 적엔 아프다는 표현밖에 몰랐는데, 통증과 고통과 괴로움 등이 있고 모두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세월을 통해 배웠다.

 

몸에 생기는 질환보다 깊은 상처를 낼 수 있는 상황, 물리적 접촉이 없이도 지독한 통증을 느끼는 경우도 있었다. 뇌가 인지한 내용이 심장을 조이거나 명치에 둔중한 통증을 느끼게 했다. 분리되었던 여러 유형의 아픔은 원인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고통으로 경험되기도 했다.

 

의미 있고 소중한 존재들 - 타자들 - 이 생기면서, 타인의 고통이 나의 통증처럼 감각되기도 했다.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하는 생각은 거짓이 아니었고, 그들의 슬픔과 고통은 나의 통증과 아픔 같았다. 내가 공감하고 애도하는 인간임에 안도했다. 비록 그 동력이 유전자의 목적에 합치한다하더라도.

 

무통의 세계를 열었다는 의료과학기술의 선언과 이에 반대하는 종교단체라는 설정은, 같은 목적에 오래 복무한다고 느껴온 현실과의 아이러니라서 좋았다. 자극적이지만 과장은 아닌 갈등구조가 작품에 대한 호감을 끌어올렸다. 고통과 구원에 대한 모든 서사가 오래된 미래의 철학 논쟁처럼 흥미로웠다.

 

토론을 통한 갈등 조율이라는 문명적 풍경을 보여주던 작품 속 인물들은, 포장이 풀리자, 지겹도록 반복된 폭력의 방식 - 테러, 살해, 보복 등 - 이 야기한 상처로 뒤덮여 있었다. 나는 고통이 필요하다는 신념 이면의 서사를 계속 상상하며, 작가의 가이드로 그들이 경험한 고통의 순간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경애하는 작가의 작품을 무례하게 문해하는 건가 두렵지만, , , , , , 현 등은, 다른 인물처럼 보이나 발화 주제만 다른 보편적인 인간 존재 같았다. 그들의 대화는 인간 보편이 느끼는 고통이라는 경험, 삶의 일부로서의 의미, 고통을 견디는 존재 방식과 그 이유, 죽음과 구원에 관한 것이었다.

 

인간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여 삶을 견딥니다. (...) 그러나 인간은 무의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생존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인간은 의미와 구원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누구나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 누구나 같은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자신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인간은 경험하지 않은 것을 공감하지 못한다. 사유할 수 있을 뿐이다. 인상적인 의 이야기는 생생하고 날카롭게 고통의 경험과 외로움을 묘사했다.

 

인간은 자신의 신체를, 신체의 감각과 기능을 타인과 공유할 수 없다. 그 어떤 환희나 쾌락도 오로지 감각하는 사람 자신만의 것이며 고통과 괴로움도 마찬가지다. (...) 인간은 오랫동안 그렇게 전달하고 소통하고 공유하려 애썼으나 (...) 완전한 의사소통의 방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신체 안에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욱에게 가장 친밀하고 잘 알고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 것은 고통자체였을 것이다. 경험을 통한 의미도 극복의 가치도 없이, 그저 지쳐가는 자신을 무력하게 견뎌야했을 세월 동안 욱은 외롭게 절망했고, 생존하기 위해, ‘의 말을 믿고, 의미를 찾고, 목적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 입장을 잠시 상상해보았다.

 

과학의 발달도 지식의 진보도 제아무리 충실한 의료 지원체계도 인간이란, 생물이란 결국 죽는 존재라는 사실 자체를 바꾸지 못한다. (...) 인간은 그런 사실을 이해하는 채로, 죽음을 언제나 똑바로 바라보는 채로 하루하루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 선택을 통해 고통의 터널 끝을 본 것 같았다. 운이 좋았던 편이지만, 나름 버티고 견디며 반백년쯤 살았다. 나의 상처도 타인들의 상처도 무통의 흉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세월이 서늘했다. 수많은 타자들의 슬픔을 정확히 이해하고 작품을 통해 발화하려 애쓴 작가가 겪은 세월도 감히 상상해보았다.

 

어느 날부터 나는 이렇게 정리했다. 우리가 지금을 견디는 건 언젠가의 달달한 희망을 위해서가 아니라고, 살아있는 한 다시 마주할 다음 고통을 견디고 버틸 조금만 더 증량된 힘을 키우기 위해서라고. 깊은 상처도 반드시 고통 없는 흉터로 바꾸어내며 계속 살기 위해서라고.

 

신체에 새겨진 고통의 기억을 간직한 채, 상처 입은 흉터투성이 존재를 떠안고 죽는 순간까지 망가진 채로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었다. (...) 망가졌더라도 살아갈 수 있고 살아갈 자격이 있다는 사실. 망가진 채 살아가도 괜찮다는 승인을, 다른 존재를 통해 재확인하고자 하는 생의 가장 깊은 추동이었다.”

 

팬데믹 동안 가정과 가족이 안전하지 않은 이들은 어디로 안전하게 도망갈 수 있나, 문득 소스라치는 의문이 들곤 했다. 구원처럼 기다리던 이후의 세상에서,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가정 내 외의 폭력과 비극이 줄지 않는다.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을 살고자 해도 상황은 날로 힘겨워진다. 자주 고통스럽다.

 

던져야 할 질문들을 모두 던지고 나면 같은 질문에 더 이상 머무르지 말아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곁을 돌아볼 여력이 없어서 저항도 연대도 쉽지 않고, 변화의 동력은 사라졌나 두렵고 때론 모멸감이 든다. 고통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감싸 안은 작품이 둔중한 통증 같기도 희망 같기도 하지만, 한결같이 품이 넓고 시선이 올곧은 정보라 작가의 작품은 무형이지만 확실한 위안과 의지가 된다.



 

내 깜냥으로 이해한 만큼이라도, 작가와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를 기억하며, 뭐라도 하는 삶의 순간들을 늘려가야겠다. 사는 동안은 희망, 사는 동안은 변화, 사는 동안은 성장이 가능하다고, 현재의 모든 선택이 바라던 미래에 도착할 수 있다고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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