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단어들의 지도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어원의 지적 여정
데버라 워런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무 페이지나 펼쳐 쓱 읽어보세요. (...) 단어가 가는 길을 누가 알겠어요?”

 

기억을 가진 채로 수험생이 된다면 언어학과를 지원할 것이다. 한국에서일 지는... 심정적으로 미정이다. 국경선이 있지만 왕래가 자유로운 여러 국가를 오가며 유럽에서 살았던 시간은 학업 자체보다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언어의사소통에 관해 처음인 듯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하고 배우고 깨달았다. 여러 국적의 많이 다른 이들이 모여 함께 살아보는 경험은 내가 배울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공부였다. 순혈, 순수, 단일은 위험하고 어리석다.

 

수십 개의 영어와 각지 자기 나라의 언어가 뒤섞인 의사소통은 놀랍도록 별 문제가 없었다. 한국의 도() 경계를 넘듯 유럽 각국의 워크숍과 학회를 다니다보니, 그나마 배운 해당 국가의 언어조차 헷갈렸지만 역시 문제가 없었다.

 

간신히 한 국가의 언어가 익숙해지면 또 다른 국가로 이동해서, 주문하다보면 불어인지 독일어인지 이탈리아어인지 모를 단어들이 튀어나오곤 했다. 복숭아 디저트가 한번 나온 것 빼고는 생존에 문제없이 잘 지냈다.

 

“‘어원=진화입니다, 다시 말해, 언어는 돌연변이의 연속입니다.”

 

이 책은 기대보다 훨씬 더 방대한 여정을 담고 있었고, 덕분에 나는 익숙한 유럽 국가들 외에도 몽골까지 언어를 타고 휙휙 날아다녔다. 언어가 가는 길은 때론 좁은 미로 같았지만 못 가는 곳이 없어서 신기하고 부러웠다.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된다는 가이드는 사실이었다. 좀 더 다양한 언어 지식이 있었다면, 문학적 경험이 있었다면 훨씬 더 즐거운 여행이었을 것이다. 재밌게 읽고 배웠지만, 기억하지 못할 내용들이 아깝다. 꼭 재독하리란 결심.

 

저자의 서술 방식은 생각이 출력 되는대로, 말이 나오는 대로 받아 쓴 것처럼 자유롭고, 단어들의 지도 위에서 길을 완전히 잃지 않는 한 문제없다고 여기는 분방함이 독특하고 즐거웠다. 그렇기 때문에 교과서와 같은 부담은 없다.

 

진지하고 진중하게 언어적 맥락을 꼼꼼하게 따지며 하는 공부를 원하는 이들을 위한 책은 이미 많고, 누구나 본격 도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언어에 큰 관심이 없던 사람에게도 즐거운, 일상어가 많은 즐거운 가을 한 때의 야외 수다 같았다. 모르는 단어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면 권하고 싶다.

 

세세하게 재밌는 내용들이 많은데, 놀라운 어원적 의미도 많은데, 도저히 짧은 글로는 소개가 불가능하다. 기꺼이 지도 위에서 밤 샐 기분이 드는 아주 재밌는 책이다. 걸림 없이 읽을 수 있는 번역도 감사하다.

 

, 일상이라는 것은 사소하고 지엽적이고 피상적인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현재 누리는 일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인류 문명 전체가 필요했다. 그러니 언어에 관한 이야기에는 철학, 과학, 사회사상도 당연히 포함된다(그래도 헤겔과 칼 마르크스가 등장할 때 좀 놀람).

 

세상에 단어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모두 하고 싶은 말은 또 얼마나 많은가. 시리즈로 써주면 지칠 때까지 단어 지도 위에서 몇 번이나 세계를 여행 다니고 싶다. 아니면...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의 진화를 알아차리고 한국어 단어들의 지도를 누군가 써줄 지도 모를 일이다. 설레는 상상이다.

 

언어는 멈추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이 해도 다 할 수 없는 게 이니까요.”


! 재밌고 새로운 내용들이 많고 많지만, 몇 개만 소개해본다.

 

* travel: '이동, 여행'이라는 뜻을 갖게 된 것은 14세기경으로, 원래는 프랑스어 travail, 고생 과 똑같은 뜻이었습니다. 그 어원인 라틴어 tripalium은 말뚝 세 개로 만든 고문 기구였습니다. palus말뚝이었거든요. 영어 단어 palisade말뚝 울타리 와 beyond the pale도를 넘은 이라는 표현도 거기에서 유래했습니다.

 

* shape: 고대 영어에서 여성 생식기를 뜻했습니다. ‘출산에서 창조로 개념이 확대되면서 형성하다’, ‘형상을 뜻하게 된 것이죠.

 

* yoga: ‘결합을 뜻하는 힌디어/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두 마리의 소를 나란히 연결하는 막대, yoke멍에 도 같은 어원에서 왔습니다.

 

* shampoo: 힌디어(Hindi= ‘인더스 강 너머’)두피 마사지를 뜻하는 champo에서 왔습니다.

 

* fox: 개과 동물인 여우의 영어명 기원은 독일어 Fuchs꼬리 에서 왔습니다. (물고기에 버금가는 작명... 너무 하네요.ㅠㅠ)

 

* algorithm: 알고리즘은 페르시아 수학자 알콰리즈미al-Khwarizmi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고대 로마의 붕괴 이후 유럽이 진흙탕에서 뒹굴던 8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페르시아는 수학의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