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보인다 : 한 권으로 읽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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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보고 지난 세월을 가늠하는 일은 어쩐지 조금 덜 서글프다. 손으로 꽉 잡은 종이책의 물성이 위로가 된다. 1993년 나는, 대학생활에 조금 익숙해지고 막 전공과목을 배우기 시작한 자연과학대 물리학과 학생이었다.

 

사학과가 읽는 책인가 싶은 제목의 답사기를 운이 좋아 나도 만나게 되었다. 과내 산악동아리 선배들은 돈도 없이 신이 나서 목록을 따라 방학 중 여행 계획을 짜기 시작했고, 후배들 역시 돈도 없이 선배 따라 떠나는 여행에 설렜다.

 

시작은 그토록 들뜨고 진지했지만, 목표한 문화, 유산, 국토에 대한 공부를 충실하게 하지는 못했다. 어딜 가나 학생들에게 너그러웠던 분들의 배려에 어리광을 부리며, 한껏 민폐를 끼치고 소란스럽게 굴다 먹다 쉬다 돌아왔다.

 

전공을 바꿔 진학한 대학원 시절, 함께 조교일을 하던 문사철 친구들과 두 번째 답사여행을 떠났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여전히 놀러가기 위한 지적인 변명과 기회였고 여행의 풍경은 여전히 조금 배우고 많이 노는 시간이었다.

 

졸업 후 문화도 유산도 국토도 언어도 다른 곳으로 유학을 갔고, 책도 답사여행도 잊었다. 귀국 후 취업을 했고 출장과 업무에 바빠서 잠만 자던 오피스텔의 책장 속에는 추억이 된 여행과 문장들이 자리를 지키며 흐려지고 낡아갔다.

 

혼자 떠나거나 친구들과 함께 떠나는 여행은 불가능한 삶이 평범한 일상이 되었고, 답사 여행에 모셔보지 못한 조부모님들이 돌아가셨고, 언젠가 함께 여행을 가자는 생각만 하는 사이, 부모님이 날로 쇠약해져갔다.

 

사랑해서 알게 되는 것들엔 경계가 없을 텐데,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 소홀한 이유가 되어버렸다. 기저질환과 고령으로 여행을 반기시지 않는 부모님 앞의 나도 반백()의 머리를 한 반백()이 되었다.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최재현 교수가 사경을 헤매느라 말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할 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입모양만 보고도 빠짐없이 들을 수 있었던 분은 부인 한 분뿐이었다. 오직 사랑만이 그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내가 아는 풍경 속 그리운 분들이 떠나고, 기후도 식생도 건물도 변했지만, 옛적 사진을 꺼내보는 일보다, 현실의 풍경을 눈에 담고 냄새를 공기를 느끼는 것은 살아 있는 특권이자 소중한 경험일 것이다.

 

본래 화려함에는 으레 번잡스러움이 뒤따르게 마련이지만 배롱나무의 청순한 맑은 빛에서는 오히려 정숙한 분위기마저 느끼게 되니 아무리 격조 높은 화가인들 이처럼 맑은 밝고 화사한 색감을 구사할 수 있을 것인가.”

 

부모님께서 가깝고 익숙한 곳들을 한 번 더 보고 싶으실지, 낯설고 먼 곳을 더 궁금해 하실지 열심히 캐물어볼 것이다. 약을 다 잘 챙겨서 일단 떠나보자고, 못할 게 뭐냐고 얼얼한 마음으로 졸라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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