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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또 내일 또 내일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8월
평점 :
분명 번역 문학인데, 글로벌한 게임문화 덕분인지, 여러 조각들을 공통으로 난눈 어린 시절을 보낸 것처럼 친근하게 읽었다. 용량이 너무 적어 문서와 이미지 파일 몇 개만 저장했던 ‘플로피디스크’가 이리 반가울 일인가.
친구들 중 누구에게 새 컴퓨터가 생기면 그 핑계로 모여 새 게임들을 했다. 오락실 게임들도 컴퓨터로 들어오고, 간단하지만 꽤 재밌는 롤플레잉 게임들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마성의 테트리스는 논문과 졸업을 미루게도 했다는 소문.
운동장과 친구 집을 번갈아 방문하며 모여 놀 수 있었던 짧은 시기가 지나고, 물리적으로 함께 모여 노는 일은 점점 어려워졌다. 인터넷이 일상화되기 전 우리는 대개 혼자 가끔 친구들과 게임을 하며 고단과 무료를 잠시 잊었다.
함께 놀고 싶지만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고, 소통의 원활하지 않음이 늘 인간관계에 있는지라, 본질적인 쓸쓸함이 내비치지도 하지만, 결국엔 계속 같이 놀자고 끈질기게 권하는 고마운 친구 같은 이야기라 좋았다.
“시간이동 모드는 유의미한 시간을 알고 지낸 사람들 사이에서만 작동된다.”
자꾸 사라진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는 나이라서, 적지 않은 세월을 녹여 담아준 소설의 시간도 참 좋다. 어릴 적 세상과 지금의 세상은 한편으로는 전혀 다른 세상처럼 변해서, 사라진 많은 것들이 그리울 때가 늘어난다.
예전에 그랬지, 하는 장면들마다 내가 체험한 시절처럼 마음이 살짝 녹아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 옛날에도 어떤 의미의 가상세계는 현실의 인간들에게 도피처가 되어 주었구나, 늘 그런 곳이 필요한 것이 삶인가 싶기도 하고.
“이치고처럼 백만 번 죽고, 낮 동안 육체가 어떤 손상을 입더라도 다음날 일어나면 말짱해지고 싶었다. (...) 각종 실수와 살아온 날의 흉터로부터 자유로운 이치고의 삶을 원했다.”
나는 <문명Civilization>을 가장 좋아했다. 참지 못하고 유학 중에도 출시된 새 버전을 구매해서 탐닉했다. 아무리 궁리하고, 외교에 애써도 전쟁이 일어나고, 플라스틱을 발명하고, 누군가는 핵무기를 개발하는 결론이 매번 슬펐다.
“인생은 피할 수 없는 윤리적 타협으로 점철되어 있지. 우리는 쉽게 타협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야 해.”
그 시기와 그 게임은 남은 평생 내게 영향력을 잃지 않을까. 게임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서, 지독하게 집중하는 사랑이 아니라서, 감정의 농도는 다르지만, 사라진 과거는 물론, 현재를 상실하며 미래 역시 상실 중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화면의 테트리스 조각 대신 내 뇌 속에 여러 조각들을 맞춰 넣는 중일지 모르겠다. 아주 좁은 내 세계에서 조금씩 경계 밖으로 나와서, 다른 사람들 어떻게 살았는지, 사는지를 보고 읽고 배우고 이해하는 늦은 학습.
무척 밝은 에너지가 고르게 퍼진, 활기차게 내일과 미래를 살아가자고 재밌게 권하는 기분 좋은 작품인데, 감상글이 울울하다. 오해마시고, 사랑과 우정과 꿈과 빛나는 많은 순간들을 즐겁게 만나시길 바란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이잖아. 무한한 부활과 무한한 구원의 가능성. (...) 그러면 죽음도 영원하지 않아,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