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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요새 - 사유의 미로를 통과하는 읽기의 모험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3년 8월
평점 :
사용하는 언어가 현재 내 수준이라고 믿는다. 유유상종의 과학도 믿으니 가능하면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어울리고 싶다. 이 야망 때문에 매일 괴롭다. 인내심은 얕아지고 짜증은 표면 부상하고 화가 울컥거린다. 소리를 지르거나 못된 말을 더 날카롭게 벼려 던지고 싶을 때도 적지 않다.
6개의 챕터를 하나씩 차분히 읽으며 8월의 더위 속에서도 생각을 표정을 서늘하게 식히고 싶었다. 101권의 책들이라니, 한 권에 담아낸 것이 신기할 정도다. 성실하고 치밀한 사유를 좋아한다. 전달하는 방식이 친절한 문장들이 좋다. 연결의 고리 어디쯤에서 생각의 갈피를 놓치기도 했으나 즐거운 독서였다.
“기적이란 (...) 이 세계의 현상을 종교적 태도로 본다는 뜻이다. (...) 이를테면 이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눈으로 보면 가장 놀라운 기적일 것이다.”
인류는 이렇게 많은 생각의 흐름을 기록하고 배우며 살았는데, 우리는 왜 여기에 도착했을까 때로는 혼란스럽고 억울했다. 사유와 기록은 정말 힘이 있는 것인지, 혹시 나처럼 도피나 피난의 수단으로 삼은 독자들이 더 많았는지, 생각할수록 내 생각이 더 가난해졌다.
“인간이 해방될수록 그 해방이 낳는 욕망의 보편성이 역으로 인간 자신을 위협한다. (...) 비극 예술은 세상에 넘쳐나는 비참을 이해하게 해주는 눈이자 인간의 자기파멸 위험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창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나 같은 독자의 질문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독서란 ‘곤궁한 마음에 생각의 씨를 뿌리는 일’이라 한다. 그 문장에 힘을 얻어 계속 읽었다. 목차 말고 말미의 도서목록을 보고 있으면 읽을 수 있는 책과 시간과 기회가 모두 있다는 것이 더 큰 행운이라 느낀다.
“인간은 사건에 참여함으로써 주체가 되고 그 진리를 향유하는 자가 된다.”
자본주의와 얼마든지 가스라이팅이 가능한 현실의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논리는 인권과 철학의 외피를 하고, 자기 욕망에 충실한 단 한 가지 이유를 감춘 이들은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사기를 거침없이 정당성으로 내세운다. 위기는 한 지역이나 한 국가의 범위를 넘어선 지 오래다.
심장이 팽팽해지고, 기분이 우르릉 거리고, 눈앞이 흐려지는 날들이 반복된다. 나만 그런 건 아니라 위로가 되고 더 불안하기도 하다. 변화를 위한 새로운 생각은 태어날까, 변화를 위한 동력은 어딘가에 축적되어 있을까. 지구가, 아니 인간의 영토가 무척 좁아졌는데 여지는 남았을까.
종이책을 오래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노년의 마지막 시간들에 나는 누구의 책을 읽고 있을까. 몇 살이면 제대로 정리하며 생각하는 법에 익숙해질까. 그때도 몰입할 집중력이 있었으면, 새롭게 배우는 기쁨이 있었으면 좋겠다. 재미가 없어서이긴 하지만 TV를 드물게 보고 산 것도 조금 도움이 되기를.
나이 덕분에 어떤 내용의 문해는 조금이나마 늘었겠지만, 좋은 번역 덕분에 예전보다 덜 어렵게 읽는 책들이 많아졌다는 것도 고마운 일이다. 남은 시간 하루 종일 책만 읽어도, 만나지 못할 사유의 대가들이 많겠지만, 어쩌면 책은 친구처럼 결국 적은 수의 오래 대화하는 한 명이 남는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