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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7월
평점 :
때론 경기장에서 직관할 수 있는 경기 내용보다 TV 화면에서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여행은 사진과 소설로 가는 것이 더 생생하다. 작가의 상상력은 현실에 색채와 소리를 더하기도 한다.
정보 없이 책을 펼치듯 목적 없는 여행을 떠나고 싶다, 언젠가. 그래서 기차 객실로 들어가는 문장에서 벌써 설레었다. 그런데... 한 시절 반복해서 꾼 악몽처럼 남자는 잘못된 기차를 타고 있다. 그의 긴장이 나의 불안으로 옮겨온다.
세상 모든 조롱은 폭력이라 믿기에, 그 남자를 향해 뿜어져 나오는 조롱과 비웃음이 신경을 긁는 불쾌한 소음처럼 느껴진다. 그 기차간에 나를 태워보았지만, 그의 옆자리는 여전히 비어있다.
작품도 대단하지만 평화주의자로 쓴 글을 읽고 존경하게 된 톨스토이, 이십여 년 만에 겨우 일독 도전에 성공한, 두 번은 못 읽겠다 싶은 작품의 거장 도스토예프스키, 러시아 문학에 대해서 나도 아는 척과 위선 어딘가에 속한다.
미국이 이상적인 자유와 민주주의의 공동체가 아니듯, 대학 역시 진실한 학문의 전당이 아니다. 불안과 신경증을 겪지 않으면 이상할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았던 이민자 미국시민 프닌의 러시아어 강의가 이물처럼 느껴지는 건, 내 안에 구축된 서구 문명의 기준과 규범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오래 전 농담처럼 고충을 토로하며, 러시아어는 알파벳이 뒤집히고 회전한 것 같다고 했는데, 러시아어를 전공한 그 친구는 웃었지만, 더 깊게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지 이제야 궁금하다. 농담처럼 표현된 위계와 차별 의식이 부끄럽다.
인류 문명이란 무엇일까. 조금이라도 더 잘 살기 위한 고심의 산물일까, 실수와 오판의 찌꺼기일까. 러시아의 주의와 이즘도 거대한 폭력이었고, 신세계 미국이 시스템과 미국인들 역시 묵직한 고통이다.
총과 칼을 들어 사람을 해치는 것도 폭력이고, 비열한 조롱과 비웃음과 교묘한 배제와 비가시적인 발길질도 폭력이다. 누군가를 병들게 하고 죽게 하기에 충분한. 생각과 배려에 앞서 ‘다름’을 알아보는 시선 하나면 시작되는.
새로운 것들을 배우는 것이 여러 해전 이미 고단해졌지만, 누군가의 생각과 언행을 낡은 것이라 판단하며 살았다. 나무가 뽑히듯 살던 곳을 떠나 생존을 도모해야 했던 이의 의식과 언어가 얼마간 망가진 것은 필연적 귀결이자 아픔의 증거이다.
프닌이 웃어도 나는 웃게 되지 않았다. 그리움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과거에 있고, 기억은 날로 흐려질 것이며, 미래는 고투의 연속일 것이다. 나레이터의 조곤조곤한 흉기 같은 문장들이 모두 내가 뱉을 수 있었던 위선처럼 들린다.
매일 현실을 피해 책으로 도망가는 처지나, 책 속에 현실이 소환되고 그 현실에 잡혀 현실로 돌아가는 패턴을 반복한다. 말과 글로 타인을 조롱하고 모욕하고 삶을 짓밟는 가시적인 가학과 무차별 흉기 난동의 시절에 이 책은 시의적절해서 아프다.
유학 시절, 타인을 평가할 때 써서는 안 되는 아주 무례한 단어들 중에는 ‘laughable’이 있었다. ‘재밌고 웃기다’는 의미가 아니다. ‘비웃어줄 만한, 비웃음을 당할 만한’이라는 공격적이고 무례한 표현이다.
다시 물어야한다. 홀로코스트의 실무를 충실히 행한 ‘생각 없이 지시에 따른’ 이들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건 아닌지. 타인을 웃음거리와 적으로 삼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범죄다. 위태롭고 위험한 그 의지와 의도가 걸친 겉옷에는 자유와 민주가 적혀 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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