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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위에서 니체를 만나다 - 사람과 예술, 문화의 연결고리 다리에 관하여
토머스 해리슨 지음, 임상훈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23년 6월
평점 :
토목공학을 전공한 할아버지께서는 어린 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며 자신이 설계하고 참여한 다리들을 보여주고 관련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것을 좋아하였다. 이해하기엔 어린 나이였지만 옛날이야기처럼 재밌고 신기했다.
이야기 속에는 정직하고 성실한 이들과 방해꾼들, 거짓말쟁이, 협잡꾼, 도둑들도 등장했다. 학과는 다르지만 안식년에 연구자금을 받아 놀기만 한 교수가 선박에 녹이 슬지 않게 시멘트를 바르자고 했다는 뻔뻔한 얘기도 들었다.
성수대교 붕괴참사가 있었을 때 나는 너무 놀라 기억을 황급히 꺼내보고 할아버지가 설계하신 다리가 아니란 이기적인 안도를 잠시 느끼기도 했다. 그런 분이 작은 다리에서 실족한 후 시신경을 잃어간 것이 잔혹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그래서 다리는 내겐 좀 특별한 건축물이다. 내 전공이 아니라 그동안 건너다닌, 방문한 다리 사진과 기록이 없는 것이 지금에서야 많아 아쉽다. 공기도 나쁜 양화대교를 함께 여러 번 걸어준 지금은 아주 멀리 사는 친구도 그립다.
독일의 작은 마을에서 잘 써지지 않는 학기말 논문을 고민하다가, 겨울눈이 쌓인 여기저기를 걸어 다녔다. 아주 작은 다리 난간에 소복한 눈을 치웠다가, 한글로 누구누구 왔다감, 이라고 적혀서 너무 당황해서 다시 눈으로 덮었다.
꼬맹이가 다섯 살 때 여행간 어느 장소에 흔들다리가 있었는데, 건너도 좋고 건너지 않아도 좋고, 손을 잡고 건너도 좋다고 했더니, 입구에서 고민하다가 “제가 겁은 많은데 막상 해보면 할 수 있는 것도 많아요”라고 해서 감동했다.
다리란 무엇일까. 다리의 목적은 건너는 것일까, 잇는 것일까, 만나는 것일까. 현실에서는 물론 경험하지 못하는 죽음과 이후의 세계에 대한 묘사에도 다리는 왜 거듭 등장하는 것일까. 인간은 다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의미를 두는가.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무지개는 흔히 인간과 신의 영역을 잇는 연결고리로 여겨졌다. (...) 다양한 문화권에서 무지개는 땅과 하늘 사이를 잇는 기적의 연결점을 만든다.”
이런 질문들을 이 책을 통해 이리저리 배우고 생각해보는 시간이 새로운 다리를 건너보는 경험 같아서 즐거웠다. 다리는 물질이고 관념이고, 존재했거나 존재한 적이 없고, 그럼에도 인간의 예술과 철학에 등장한다.
“다리라는 인공의 길이 만들어지면서 자연적 방어는 취약해졌다. 그래서 다리 입구에 요새 같은 작은 성과 탑을 세웠다. (...) 자연이 분리하기로 선택한 것을 악마의 힘으로 연결해서 이 구조물 위로 왕래를 가능하게 하는 것 같았다.”
어릴 적 힘겨웠던 육교, 배를 타고 들어가선 섬에 생긴 다리, 장소는 여전하지만, 형태는 완전히 달라진 다리들, 위로는 다닌 적 없지만 아래로는 지나간 다리들. 차로 지나간 다리들, 걸어 지나간 다리들. 모든 계절의 다리들.
다리 앞에서, 다리 위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