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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목소리를 닮았어 ㅣ 자이언트 스텝 2
김서해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7월
평점 :
가끔 어떤 우연은 아찔하게 반가워서 우연이란 걸 모른 척하고 한껏 의미를 부여하고 싶기도 하다. 예를 들면, 무척 좋아하는 이의 글을 읽다 발견한 표현과 정서가, 직접적인 관련이 전혀 없는 다른 작품 속에서도 둥실 떠오를 때. 발췌독서를 하느라 대충 읽긴 했지만, 간만에 읽은 근대철학사상의 한 구절이 문학으로 재현되었을 때.
인간은 자아와 자유의지에 대해 늘 궁금해 했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의 개별성과 나를 알고 싶다는 건, 관계와 더불어 상대라는 타자가 있어야 가능하다. 타자와 분리된 나를 비교 관찰하고, 차이점을 고유성으로 인지하고 구성한다. 고유한 개인들이 구성한 관계망 속에서, 나의 일부가 된, 내가 수용한 ‘나’를 발견한다.
융합과 일치가 아니라, 좀 더 느슨하게 연대하는, 함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고민은 모든 문명 공동체에 필요한 태도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있는 차이는 늘리고 없던 차이도 만들며 욕설과 막말과 조롱이 기세등등한 시절, 대화하는 인간 존재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그래서 반갑고 귀하다. 대화하며 이동하는 동선이 저무는 시간처럼 다사롭다.
낯선 사람의 목소리는 잘 안 들린다. 나는 특히 그게 심한 편이라 말하는 입을 유심히 보거나 말을 다시 청하기도 한다. 자기연민에 쉽게 빠지고, 게으르기까지 하니, 대화를 이어나가는 데도 서투르다. 그래서 타인에 대한 무례하지 않은 궁금증이 많은 사람들, 질문을 유쾌하게 하는 이들을 좋아하고 부러워한다.
가장 아름다운 대화 방식은 서로 묻고 서로 듣는 것이다. 어려울 것 없고 다 아는 것이지만 잘 못한다. 묻는 것도 듣는 것도 늘 쉬운 일이 아니다. 묻고 싶은 것이 있다는 건 상대에게, 어떤 주제에, 세상에, 삶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잘 듣는다는 것은 질문에 대한 자신만의 충분한 생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대화가 어려우니 현대인들은 명상과 기도를 한다. 나는 그 본질이 자신과 시도해보는 대화라고 생각한다. 한 때는 걸으며 골똘하게 생각하는 특정 주제가 있었지만, 어느새 내 산책은 스스로에게 묻고 답을 찾는 혼자만의 대화로 생각이 가득 찬다. 때론 정리가 되고 때론 뭉텅 버리고 귀가한다.
늙은 독자가 젊은 작가의 글을 읽으니, 눈부시고 아름다워 시큰하고 얼얼하기도 하고, 다양한 실패를 안전하게 경험한 뒤 다시 별 탈 없이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서 미안하고 아프기도 하다. 돈과 권력을 가진 나이든 이들이 기껏 한다는 일이 어리고 약한 사람을 괴롭히고 죽음에 내모는 것이라니.
엉망으로 망치고 책임도 회피하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mz세대 어쩌고 욕이나 하는 어른들의 쓰레기더미 같은 세상을, 피로한 빨리빨리의 사회를, 느리고 더딘 시간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안전한 삶의 울타리로 바꿔나가길 바란다. 대화를 달려가며 할 수는 없으니까.
작가가 보여주고 들려준 작품 속 풍경처럼, 현실에서도 닮은 목소리들을 찾고 듣고 대화를 계속하며 ‘우리 세대’의 이야기와 삶을 만들어가길, 맞지 않는 부당한 질서에 저항하고 새로운 규칙들을 찾아 다른 세상을 살아가길 얼얼한 마음으로 응원한다.
“그래도 자기만의 질서가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