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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의 꽃향기 - 베네치아 푼타 델라 도가냐 미술관과 함께한 침묵의 고백 ㅣ 미술관에서의 하룻밤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이재형 옮김 / 뮤진트리 / 2023년 5월
평점 :
예상치 못한 여행을 떠나서 혼자 너무나 설렌 사람처럼 작은 책을 아껴 읽었다. 미술, 예술, 문학에 대해 골고루 무지해서, 모든 짐작과 예상이 빗나가는 문장 전개와 이야기의 펼쳐짐에, 들뜬 호흡을 자주 의식하며 골랐다.
“소설을 쓰려고 할 때 가장 먼저 지켜야 하는 규칙은 아니오, 라고 말하는 거예요. (...) 아니오, 라는 말을 되풀이하다 보면 병적일 정도로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거만한 인간 혐오자 취급을 받게 돼요.”
내밀한 고백 같은 글의 농도가 짙어서 모든 문장이 뜨거운 온도로 떠올랐다 사라져갔다. 이처럼 진솔하고 절절한 글에, 생존을 위한 도피처나 힘을 내기 위한 식량으로 문학을 소모하는 얄팍한 독자가 어떤 말을 건넬 수 있을까.
“등장인물들이 곁에 있으면 나의 삶 전체가 이 강박관념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외부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 나는 은밀하게 살아간다.”
치열하고 솔직하게 살지 못해도, 그저 살아간 시간이 쌓이면, 단단한 심지 같은 게 조금 생기기도 한다. ‘좋은 게 좋은 거’라거나 ‘다들 그렇게 산다’는 말에 흔들리거나 현혹되지도 않는다. 하기도 싫지만 참 듣기도 싫은 말이다.
“관심의 과잉, 빛의 과잉은 우리 내면의 어둠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없애버리는 듯하다.”
문득 뜻대로 되는 일 별로 없는 모두의 삶이 애처롭기도 하지만, 한 개인의 뜻대로 흘러갈 수 있는 삶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진 풍경은 모호해도, 내 자신의 삶의 태도를 가능한 분명히 해야 한다.
“어떤 의견을 표명하든 폭력과 증오에 노출되고, 예술가는 여론을 따라야 하는 우리 시대를, 충동적으로 백마흔 개의 글자를 쓰는 시대를 어떻게 생각할까?”
베네치아와 미술관 사진들을 괜히 뒤적거리다가, 아래향나무를 찾아보고 밤의 서늘한 온도에서 피어나고 퍼져나가는 신기하고 신비로운 향을 상상해본다. 아쉽도록 적은 분량에 퍼진, 감각과 감수성과 감정이 번지듯 공기 중에 떠돈다.
새로운 생각, 도전, 삶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 밖에 없다고 한다.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아무도 없어 나(의 것들)로 가득했던 미술관에서의 밤은 우아한 환상임에도 그 결실이 탐스럽다.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한 것은 바로 갇힌다는 사실이었다. (...) 나도 나갈 수 없고 다른 사람도 들어올 수 없는 장소에 혼자만 있는 것. 의심의 여지없이 이것은 소설가의 환상이다.”
‘아니면 말고’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그런 건 어쩌면 꿈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꿈을 이루는 건 자신을 만들어가는 조각과 같을 지도 모른다. 이 꿈이어야 하는 수많은 이유들은 고유한 나를 구별하게 하는 정체성일 지도 모른다.
레일라 슬리마니Leila Slimani 작가가 던지고 문답하는 문학, 글쓰기, 삶에 대한 사유는 패배를 결코 염두에 두지 않는 고군분투의 전장 같았다. 불안하고 허약하지 않다. 결연하고 단호하고 섬광처럼 빛난다.
작가란 암흑 속에서도 어떻게든 써내는 그런 존재라는 생각은 이 책 덕분에 믿음으로 변화했다. 떨렸다. ‘밤(레일라, Leila)’의 이름으로 불리는, 경계인이 아니라 두 세계 모두에 사는 그에게. 문학에게.
“모든 것이 허용되며, 실수는 잊히고 잘못은 용서 받는다고 상상한다. (...) 밤은 현실적인 것과 평범한 것이 더 이상 우리를 강제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장소다. 밤은 (...) 무수한 목소리와 무한한 세계가 간직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꿈의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