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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에 감사해
김혜자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12월
평점 :
김혜자 배우를 나는 봉준호 감독의 <마더>에서 처음 제대로 만났다. 영화를 보기 전에도 누구인지는 알았지만 출연작들을 제대로 시청한 적이 없었다. 영화도 배역도 배우도 잊으려야 잊을 수 없이 강렬했고 메시지는 두려웠다. 지금 비교해도 <기생충>이 상대적으로 밋밋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책이 출간되고 어머니와 이모들 선물로 드렸다. 연세가 많으시지만 재밌게 읽으실 수 있는 드문 책이라 생각되어 반갑고 기뻤다. 덕분에 세 분이 전화 통화만 몇 시간씩 했다고 하시니 끼지 못해 궁금하고 녹음이 되지 않아 안타깝기 그지없는 심정으로 나도 뒤늦게 책을 펼쳤다. 분명 기록된 문자인데 입말처럼 들린다.
몇 장 넘기지도 않아 벌써 좋아졌다는 친구의 추천에 공감이 금방 되었다. 한국에서는 어떤 직업을 가졌든 자신의 정체성은 엄마라고 하는 일이 흔하디흔한데, 김혜자 배우는 여러 가지 입장 중 가장 자신다운 정체성을 배우라고 한다. 물론 그건 환경과 가족들의 이해와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몰입과 헌신은 자신의 몫이다.
“나는 배우로서 잘해야만 했습니다. 내가 가족에게 남긴 자잘한 상처들이 흐지부지 묻히지 않도록. 가족에게 상처를 주면서 배우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배우로서 떳떳하지 못하면 정말 면목이 없는 일입니다. (...) 최선을 다해서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배우가 되어야 한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몰입과 헌신의 구체적인 면면을 읽다보면 허투루, 대강, 적당히 살아온 순간들이 어쩔 수 없이 떠오르고 덕분에 나는 오늘도 아무도 보는 이 없는 공간에서도 얼굴이 달아오른다. 가짜가 가득한 세상에서도 진짜들이 없을 수는 없다. 아니 많다.
김혜자 배우가 ‘배우’를 잘 해내고 싶었던 것은 가족에 대한 미안함만은 아닐 것이다. 공연을 한 연극 대본을 공연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읽고 또 읽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다른 감정들이 찾아 들면 그 연기를 하고, 새로운 것을 보고 재현하고, 새로운 깨달음을 연기에 담고, 지난 공연의 부족함에 미안해하고, 이런 애씀은 미안함으로 해내는 일이 아니다.
“나 자신이 납득할 때까지 대사를 백 번도 더 읽습니다. 아까 했던 것과 지금 하는 것이 다르니까. 아흔아홉 번째 했을 때는 몰랐던 것을 백 번째 했을 때 느껴지는 것이 있으니까. 읽을수록 느껴지니까 대본을 계속 읽고 싶어집니다. 잘 쓴 대본은 읽을수록 깊어집니다.”
에세이를 재밌게 읽기 시작한지는 얼마 안 되었다. 읽다보니 내가 재밌어 하는 에세이는 자신의 일을 오래 해온, 버텨온 삶이 단단한 이들의 글이었다. 그런 기준으로 보자면 김혜자 배우의 삶과, 매순간 경신하는 놀라운 태도의 생각과 태도가 결국 그의 삶을 이루고 이 책으로 정리되었다는 설렘과 기대를 마다할 이유가 없어진다.
모두 70대인 어머니와 이모들이 씩씩하게 살아가자고 결심했지만, 때론 그가 혼잣말처럼 들려주는, 드라마 대사 같기도 한 70대인 자신과 변화에 대해 어떻게 느끼셨을지, 거듭 그 대화에 끼지 못하고 엿듣지도 못한 것이 통탄스럽다. 정답지 못한 자식과 조카인 나는 모르는 이야기가 통화에 모두 담겼을 것 같다. 어머니와 이모님들 감상문 써서 제게 주세요.
“그냥 궁금했어. 여기서 얼마나 더 나빠질까. 요즘 아침마다 일어날 때 좀 놀라. 하루가 다르다는 게 이런 말이구나. 어젠 분명 저기까지 걸었는데 오늘은 숨이 가빠. 앞으로 얼마나 더 나빠지는 건가 궁금해서……. 화장실 가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못 간다며, 늙으면 나도 좀 더 차례차례 늙었으면 받아들이는 게 쉬웠을까 싶은 거지 그냥.”
또래 독자에게는 공감과 감동을 좀 더 젊은 독자들에게는 죽비와 같은 일갈로 선입견과 편견을 깨주시는 단순하지도 뻔하지도 않은 글이었다. 생각해보면 이분이 이제 와서 무슨 분칠이 더 필요하셔서 연예인 광고 같은 글을 쓰실까. 그럴 리가 없었다.
“80을 눈앞에 둔 내 인생의 길 끝에서 나는 내 꿈 앞에 서 있습니다.”라고 하시는 분의 삶과 글에 감동이 적다면 모두 나의 부족일 것이다. 함께 온 은방울 향이 ‘연기 밖에 모른다’면서 명징하게 삶을 뚫어보는 그의 맑은 시선 같다.
나는 아직 내 꿈 앞에 서 있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다. “행복해지려면 좀 더 단순하고 혼자가 되어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라고 하시니 더 단순해져야겠다. 복잡한 꿈같은 생각의 갈피를 계속 정리해야겠다.
무수히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이제껏 살 수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도 참으로 감사한 생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