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엄숙한 얼굴 소설, 잇다 2
지하련.임솔아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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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생일날 출간된 작가정신의 소설, 잇다 시리즈의 첫 작품,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를 생일선물로 받았습니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함께 책모임 하던 친구가 보내주어 의미가 깊었습니다.

 

최진영 작가님 팬이라 그저 좋았고, 읽고 난 후에는 여태 과문해서 모르던 역사와 인물, 백신애와 그가 본 인물들을 만났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건 어떤 이해와 공감을 넓혀 주는지라, 읽는 도중 책을 가슴에 바짝 붙여 껴안고 조금 울기도 했습니다.

 

최진영 작가의 <이제야 언니에게> <내가 되는 꿈>의 여성서사들이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에서 백신애 작가와 재회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비록 뜨거운 삶은 흉내 낼 수 없지만, ‘읽기로도 얇지만 느슨한 연대와 역사를 만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근 반년만의 잇다 소식 <제법 엄숙한 얼굴>이 무척 기쁩니다. 한 치의 허위의식도 봐주는 법 없는 임솔아 작가님의 빈틈없는 분석과 재구성이 어떤 빛나는 창작물이 되었을지 깊이 설레고 많이 기대했습니다.

 

나는 슬픔 고향의 한밤, 홰보다도 밝게 타는 별이 되리라.”



 

책이 도착한 날, 권김현영 선생님 출연한 알릴레오북스를 뒤늦게 보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여성들이, 누구의 아내, 애인, 뮤즈로 불렸고 불리는 현실에 분노하지만, ‘데이터에서 여성은 아예 빠져 있는 경우가 많고 많습니다.

 

<보이지 않는 여자들> 권김현영 편

https://youtu.be/PY9y4YcS0LI

https://youtu.be/-rNJTMzC87Y

 

중년이 되어 다시 읽기 시작한 문학 고전과, 시절한정적일 거라 여겼던 사회경제학 책들이 지적한 문제들이 현재도 해결되지 않은 것 투성이라 무척 놀랐습니다. 임솔아 작가가 지하련의 작품에서 구시대적 느낌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는 느낌을 알 것 같습니다.


 

인류는 그저 옷만 바꿔 입은 것일까요. 만 년 전과 거의 같은 뇌, 구태의 전형 같은 현대의 인물들. 물론 제게도 다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때와 장소를 못 가리고 맨스플레인하는 남성들을 저도 꽤 만나긴 했습니다. 얼른 잊자 주의라서 오래 분하지 않았을 뿐.

 

일제 강점기의 남성, 남편, 남자형제, 지식인, 차별주의가, 위계주의자들의 모습이 전혀, 하나도, 조금도 낯설지 않아 현재가 낯설어집니다. 너무 익숙한 모습이니 작품을 개별적으로 소개할 필요가 없을 것처럼도 느낍니다. 낯선 어휘들과 문학적 재미는 물론 다채롭습니다.

 

정말 견디기 어려운 건 자랑이 아니야. 자랑 끝에 달려 나오는 씁쓸함이지. 지식인 남성들은 자랑만 늘어놓지는 않았다. 그들도 아는 것이었다. 자랑하는 남자가 별로라는 것을. 그러나 자랑을 포기할 수는 없었으므로, 자기가 자랑하고, 자기가 자기 자랑을 씁쓸해하고, 그 씁쓸함도 자랑했다.”

 

지하련이 보았던 70년 전의 남성이 임솔아의 곁에 있고, 내 곁에도 있을 것이고, 누구의 곁에도 있겠지요. 무려 친일을 해도 성범죄를 저질러도 교과서에 작품이 실리는 일도 있습니다. 눈은 감으면 되지만 귀에는 꺼풀도 없으니 딴 곳을 보고 딴 생각을 하며 견뎌야할까요.

 

저 인간은 외로움조차 모를 것이다. 영원히 결단코 모를 것이다.”

 

문명의 기본값default이 남성인 세상에서 여성은 어떻게 독립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내일은 5.18입니다. 폭력적인 남성 권력이 행한 살육과 비통의 역사입니다. 그 역사의 진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조차 여성에게 가해진 성폭력이 언급된 것은 불과 몇 해 전입니다.

 

지하련은 우리에게 "가장 독립한 인간"이 될 것을 요청한다. 그에게 가장 독립한 인간이란 스스로가 허락하지 않으면 결코 타협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 사회주의 활동가, 카프 비평가이, 임호의 아내로 알려진 지하련. 지식인 검거로 인해 월북한 임화를 뒤따라갔으나, 처형된 남편의 주검을 찾아 평양 시내를 헤매 다니던 모습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습니다.

 

근대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공기 속으로 향이 퍼지듯 고요하고 밀도 있는 시간입니다. 가상이지만 작품을 통해 만난 현대 작가들의 글과 논평도 함께하니, 시공간이 이어진 듯 아찔하고 설렙니다. ‘잇다가 최장수 시리즈가 되길 응원합니다. 오래 살아 많이 읽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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