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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박미옥
박미옥 지음 / 이야기장수 / 2023년 5월
평점 :
멋진 언니들(연령 기준이 아닌 존경심 기준)의 삶을 글로 만나는 시간 동안은 겁쟁이인 나도 결연해진다. 살아지는 대로 살자란 게으른 기분이 흩어지고 내용을 담지 못했지만 용기가 조금 난다. 해야 할 일 중에 할 수 있는 것들부터 해치우자는 생각을 기분 좋게 한다.
‘직업이 귀천이 없다’란 거짓말과 비견할 만한 것이 ‘직종에 성차별이 없다’일 것이다. 그래서 제목만으로도 몇 번이나 설렜다. 건장한 남성용으로 최적화 디자인된 사회에서, 그 사회의 질서를 지키는 공권력은 경찰이다. 가시적으로 대표적인 남성의 영역이다.
여성의 활동이 없었다는 건 아니지만, 업무 재량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는 가끔 보았던 치마 정복에서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좁은 자신의 영역에서만 살아가는 형편이니 다른 직군에 대해서도 피상적으로만 알거나 짐작할 뿐이라서 다른 직종 사람들의 에세이가 늘 귀하고 반갑다.
형사가 개인이자 조직인 것처럼 형사 박미옥의 삶과 글도 개인사이자 한국 사회의 경찰 성립/성장사로 읽혔다. 모르던 분을 가깝게 느끼게 되는 독서일거란 짐작을 넘어서, 수사체계, 프로파일링 도입 사연, 젠더 차별과 대립을 고루 아우르는 역사적 사실을 만나고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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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제나 이슈에 집중하는 구성도 기능하는 직업인의 성취사도 아니었다. ‘형사’라는 직업을 통해 만난 사람을 이해하고, 피해자의 상처를 깊이 들여다보고, 범죄전문가로서 성장하며,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한 깊은 사유를 나누는 충실하고 체계적인 삶으로 가득한 이야기였다.
“수사 과정에서 나는 결코 객관적이고 전지전능한 신이 될 수 없다. 타인의 눈과 말에 따라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무너질 수 있는 한낱 사람일 뿐이다. 모두가 용의자로 낙인찍은 사람일지라도 일말의 억울함이 없을까 돌아보고 검증하는 것, 그것은 내겐 윤리의 문제를 넘어 생존 그 자체였다. 현장에서의 실수와 오판은 교도소로 범인이 아닌 내가 갈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므로.”
“형사의 두려움은 예견되어 있고, 범인의 두려움은 자초한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의 두려움은 난데없다. 왜 겪어야 하는지 모를 세상 억울한 두려움이 될 수 있다.”
“범인이 제 생각과 한계에 갇혀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 적는 조사가 되면 안 된다. 죽은 자가 말하지 못한 내용을 대변해주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재판은 범인의 주장을 발표하는 장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우리는 말하지 못한 자의 말을 묻고 찾아내고, 그 말이 우리의 해석에 따라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사실에 근거한 명료한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개별 범죄 단상이나 경찰 조직에 대한 자투리 이미지 정보가 아닌, 헌신하는 직업인 당사자의 삶을 통해, 형사라는 직업이 갖는/가져야하는 직업윤리와 의미와 철학을 독자인 나도 맛보고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언론의 보도가 얼마나 선정성과 화제성에 집착하여 만들어지는지도.
당장 어떤 결함이 있든, 얼마나 변화가 어렵든 결국 공공성, 공권력, 공적 영역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를 위한 시스템이어야 하고, 해당 직군의 사람들은 인간을 살피고 돕고 싶다는 그런 의지로 자신의 업무를 수행해야한다고 믿는다. 그런 분을 만나서, 폭도 깊이도 대단한 분을 만나서 먹먹하고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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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흐리는 건 덩치가 크고 포악한 소수이지만, 사회의 어느 분야라도 깊이 찬찬히 살펴보면, 그 도가니의 한가운데서, 현장에서, 무수한 실무를 처리하며 성실하게 꾸준히 노력해서 조금씩 바꾸며 반듯한 발걸음을 남긴 이들이 많다. 잘 모르면서 함부로 싸잡아 욕하는 건 말자고, 타인의 노고를 폄하하지 말자고 다시 결심한다.
참 좋다. 멋진 언니의 문장들을 필사하며 월요일을 담담하게 씩씩하게 만날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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