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파스칼 키냐르 지음, 백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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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는 도착하지 않기를 바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떠돌아다니는 것이다. 독서는 방황이다.”

 

이 문장들에 의지하면서도 낯설었다. 나는 단선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다. 도착지에 가까워지는지 여부를 알 수 없는 목적지 지향이 아닌 독서는 도전이었다. 그건 풀이 과정을 거쳐 답에 도착하는 자연과학 전공자이기 때문일 듯도 하다.


 

그래도 더듬대며 읽는 과정이 의외로 즐거웠다. 뭔가 이해할 듯한 문장들에 즐거웠다(오독 확률 높음). 비언어적 방식의 소통이 어렵고 제발 언어를 정확하게 사용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늘 커서 반가웠을 지도.

 

언어는 로고스라서 감정이 휘몰아칠 때도 생존 수단이나 의지가 된다. 아무도 물어뜯지 않고 살아가는 예방책이지 않을까. 내 언어에는 부재하지만 어둑한 시절에 빛처럼 만난 다른 이들의 언어의 아름다움이라니.

 

외국어를 배우는 일은 모르는 것은 들리지 않고 들리지 않는 건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는 기회다. 어릴 적 첫 언어학습 과정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 언어가 문화로 사회로 이어지고 학습자의 세계를 확장시킨다.

 

언어는 인간의 유일한 사회이며(재잘거림, 치장, 가족, 계보, 도시, , 수다, 노래, 학습, 경제, 신학, 역사, 사랑, 소설), 그로부터 해방된 인간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나는 문학인이 아니고, 언어의 절정이 무엇인지 몰라서, 키냐르가 상정하는 본원 세계 - 언어가 삶에 개입하기 이전 인간 육체의 경험 - 에 대한 욕망과 추구를 모른다(모를 것이다).

 

언어로 걸러지지 않은 것, 그것이 미지다. ‘이라는 말은 그저 최대치의 고유명사일 뿐이다.”

 

오래 전 영국에서 추천받은 책*에서 만난 경계가 흐린 포괄 언어inclusive language throughout가 떠올랐지만, 키냐르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더 본원적이고 경계를 한 분석과 진실이다.

 

* <Language Older Than Words> Derrick Jensen

 

나는 사색적 수사학의 과거를 되살리려는 것이 아니라, 박해받은 한 전통의 기록을 정리하려는 것이다.”

 

내 이해 정도와 무관하게 박해받은 전통은 적어도 기록되기를 응원한다. 문자 언어와 로고스와 윤리를 가진 쪽이 박해한 것이라면, 문학은 때론 윤리일 수 밖에.


 

문자사文字史는 밝혀진 것만 기원전 3000년경으로 거슬러 간다. 시간의 바닥에서 쏘아 올린 화살을 찾는 일이 읽기라고 생각하니 아득하고, 모르던 모든 것이 더 모를 일이다.

 

언어가 갖지 않은 것을 제공하는 언어, 그것이 수사학이다. 투자누스는 그것을 추정conjectura이라고 명명한다.”

 

이전에 알고 있던 정의와는 무척 다른 키냐르의 수사학이고, 그 점이 읽는 내내 편안한 안도감을 주었다. 망각과 불가지를 호쾌히 인정하고 나서 여전히 읽는 시간은 무겁지 않고도 진지할 수 있는 즐거운 일이었다.

 

손가락 끝으로 더듬어 언어를 알고 나면 언어를 잊어라. 언어가 악기가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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