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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의 사료편찬관
마엘 르누아르 지음, 김병욱 옮김 / 뮤진트리 / 2023년 2월
평점 :
모로코에는 아주 오래 전 경유하다 하루 묵게 되었다. 아프리카 대륙이라는 흥분에 무색하게 상당히 유럽적인 분위기였고,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고 우아한 사람들이 오갔다. 목적지가 아니고 역사와 문화는커녕 기본 지식도 없을 때였지만 많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 작품을 읽기 전에 약간의 정보를 찾아가며 조금 공부하였다. 3.1절을 막 지낸 한국인으로 공감할 역사였다. 한국은 분단되었지만, 독립운동과 여러 어려운 시기를 지나 1958년 4월에 입헌군주국 모로코의 영토가 통일된 점이 무척 부러웠다.
1961년 사회주의적인 국왕 벤 유세프 병사, 아들 하산 2세 즉위, 우익민족주의로 전향, 모로코 알제리 분쟁 지속, 우호관계로 발전, 1969년 이프니 정식 반환, 1976년 4월, 사하라 북쪽 반을 병합, 나머지 영토 병합 답보 상태, 하산 2세 사망, 1999년 7월 왕세자 모하메드 6세 즉위, 현재까지 통치 중.
1979년 태어난 작가는 1900년대 중반, 독립 기운이 한창인 시절, 훗날 하산 2세가 되는 왕세자와 한 학급이 되고, 측근이 되고, 유배되고, 왕국의 사료편찬관이 되는 인물을 이 작품에 남았다. 낯설어서 설레는 세계로 입장이다.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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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약간의 역사 공부를 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나는 처음 배우는 모로코의 역사와 문학을 온통 헷갈리며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방식으로 경험한다. 전혀 불만은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결국 이야기일 뿐이니까.
작가가 화자로 삼은 ‘압데라마네 엘자립’은 소설 속 인물이면서, 1999년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현실의 인물이며, 작가는 소설의 모티프가 된 원고를 엘자립에게서 직접 건네받았다. 작품의 탄생도 현실과 창작의 공동작업이었다.
20세기는 누가 어디로 쓸려가도 이상하지 않을 격변의 세기였다. 한반도의 역사만 봐도 왕조, 식민지, 공화국, 쿠데타, 민주화, 산업화, 여러 위기 등등 인류 문명의 압축된 성과와 부작용이 반복되고 격화되는 시절이었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모로코의 상황도, 그곳에 살던 총명하고 성실하던 개인도 시대적 격류에서 안전할 수는 없는 일이다. 혼란과 독재가 병존하고 갈등하며, 자신의 총명함으로 권력 가까운 삶을 받아 들여야 했던 인물은 들여다볼수록 더 흥미롭다.
차기 왕의 친구였고 최측근이라 교육받고 일도 할 수 있었지만, 자신으로 사는 일은 쉽지 않았다. 민주주의와 공화정이라는 사회체제가 형태를 갖춘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 계산으로는 받은 것보다 치른 대가가 더 큰 삶으로 보인다.
수많은 부당함이 보이지만, 그는 거부하지 않고 견뎠다. 독재 군주의 권력 하에서 시절을 살아내는 불가피한 생존책이었겠지만, 나는 무언가 더 있을 심의를 자꾸 찾아보고 싶었다. 그는 그 모든 것에 갇힌 생명처럼 느껴졌다.
“나의 능력에 대한 이 같은 오마주는 물론 나를 안심시키고 격려하는 것일 테지만, 이 표면적인 경의의 배후에서 나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이 완벽한 짜 맞춤이 어쩌면 표적 조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무기의 조준장치에 맞춰 놓고 언제든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세심하게 고른 표적 말이다.”
과제를 하던 젊은 작가에게 원고를 건네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건 어릴 적부터 정해진 운명에 말없이 살아야 했던 모든 침묵을 대신한 목소리는 아니었을까. 그에게 왕은 한번이라도 친구였을까. 왕에게 그는 무엇이었을까.
“왕은 자신에게 아부하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자신에게 저항하는 사람들을 싫어해. 그와는 어떤 관계도 불가능하지. 수준이 좀 떨어지는 신하를 대할 때는 지적으로 자신과 대등한 사람을 찾으려 안달하지만, 정신적으로 자신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그를 없애지 못해 안달하지. 누구도 감히 그에게 그늘을 드리워서는 안 되니까 말이야.”
1900년대 모로코에 실제로 일어난 일들은 무엇일까. 프랑스인들이 이 책에 가지는 관심은 무엇일까. 소설 읽기의 시작이 역사 공부라서, 식민지 국가들의 현실로 자꾸 끌려 들어갔다. 공기조차 무거운 문장들에서는 호흡이 들썩였다.
인류의 문명사는 전쟁사와 대부분 일치한다.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인류는 누군가의 피가 쏟아져 흐른 땅 위에서 살고 있다. 오래 전 내가 본 풍경, 평화롭고 빛나던 모로코의 역사 역시 붉고 검게 얼룩져 있었을 것이다.
철학교수인 작가, 마엘 르누아르는 엘자립의 생애를 누락시키지 않으면서도 풍성하게 창작했다. 조사 연구를 통한 역사적 사실들은 의미 없던 단편 조각들을 꿰어 내가 기억할 세계사의 한 폭을 늘려 주었다.
꿈과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흐려 독자인 나는 자유로웠다. 지식정보로 기억된 볼테르, 라신, 프루스트, 생말로 등을 생생하게 조우했다. 식민지 독재의 왕국에도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은 다르지 않았다.
정치사를 문학으로 전환시킨 시도 자체가 극적이다. 내용은 더 드라마틱하다. 질문은 결국 몹시 철학적이다. 우연히 태어난 시대와 장소에서 어떻게 살아갈 지는... 혼자 최종 결재를 해야 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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